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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늘바라기 May 04. 2022

38년 전 어린이날

아이스께끼 100개가 쏟아져 내렸다. 



내일은 어린이날이다. 특별한 선물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몇 년 전 우리 집에 있었던 중대 발표 때문이다. 어린이날이라고 해서 특별한 선물을 사주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나라에서 지정한 어린이날의 의미에 위반되는 내용이다! 어린이에 대한 학대가 아니냐!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다! 오빠는 반기를 들며 열심히 대항했다. 멋있어 보였다. 나도 같은 편에 섰다. 소용없었다. 상부에서 이미 정해져 내려온 정책이었다.     


몇 주 전부터 어린이날 000을 받기로 했다며 자랑하는 짝꿍에게 괜스레 시큰둥하다. 아빠가 사우디에서 오실 때 사다 주신 미국 색연필과 연필을 가지고 전교생이 다 알만큼 자랑하고 다녔던 짝꿍이다. 이번엔 선물 받기 전부터 요란스럽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뻔하다. 얄미운 짝꿍을 뒤로하고 옆집 친구에게 다가갔다. 친구가 내 귀에 살짝 속삭인다. ‘엄마가 마루 인형 사 주신데, 미미랑 바비’ 하늘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았다. 내가 꿈에 그리던 인형이었다. 매일 종이 인형을 오리고 붙이고 하며 마루 인형 하나 갖고 싶단 생각이 간절했었다. 화가 났다. 엄마 아빠가 미워졌다. 이상한 정책이 싫어졌다. 투덜대며 집으로 걸어오는 중에 발에 걸리는 돌멩이만 계속 걷어찼다. 발만 아프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현관에서 신발을 집어던졌다. 씩씩거리며 엄마에게 항의하려는 순간, 커다란 그림자가 내게 다가왔다. 외삼촌이 오신 것이다. 손에는 커다란 누런색 상자를 들고 계셨다. 엄마는 냉동실을 정리하며 갑자기 이렇게 많이 가져오면 어떡하냐고 불평한다. 삼촌은 어린이날인데 이 정도는 사 줘야 하는 거 아니냐며 반문한다. 누런 상자에 천천히 다가갔다. 깐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아이스크림 깐돌이가 박스 한가득 쌓였다. 00제과에 근무하는 삼촌이 어린이날을 맞이해 선물로 가져온 것이다. 녹을까 봐 부지런히 왔다며 얼른 냉동실에 집어넣으라는 삼촌의 말이 귓가에 울린다. 순간 내 눈에는 눈물이 핑 돈다. 엄마가 아무리 정리해도 다 들어가지 않을 거 같다며 동네 친구들을 얼른 불러오라고 하신다. 눈물을 삼키며 현관을 나선다. 놀이터를 향해 내달리며 큰소리로 외쳤다.     


“야!, 다 모여 우리 집에 깐돌이 100개 있어.”


놀란 친구들과 눈이 마주친다. 녹는다고 서두르자고 소리치자 그제야 내달린다. 아이들은 내 앞에 줄을 섰다. 대장이 된 느낌이다. 양손에 깐돌이를 쥔 아이들은 너무 맛있다며 행복해한다. 현관에 들어선 오빠도 친구들을 불렀다. 좁은 거실에 아이들이 잔뜩이다. 어떻게 아이스크림 회사에 다니는 삼촌이 있을 수 있냐며 부러운 시선을 보낸다. 어깨가 뒤로 젖혀지며 다음번에 또 사다 주신다고 약속했다는 이야기를 전했다. 다음번에도 꼭 다시 불러 달라며 내 손가락에 깍지를 건다.     


보기에는 맛깔스러워 보이지 않는 우중충한 갈색의 깐돌이. 팥죽에 설탕에 잔뜩 들어간 달콤한 맛이다. 한입 베어 물면 은은한 팥의 향기가 코끝에 전해진다. 차가운 느낌이 입안에 퍼지는 순간 솜사탕처럼 녹아든다. 깐돌이의 황홀한 맛에 취하며, 아이들의 부러운 눈빛을 즐겼다.     


불합리한 정책에 우울한 어린이날을 보낼 나를 위하여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주셨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아이스크림 깐돌이를 가지고 나타난 것이다. 외삼촌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어 보였다. 지금은 하늘나라에 계신 외삼촌. 38년전 내 생애 최고의 어린이날을 선물로 주신 외삼촌에게 늦었지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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