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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Sep 10. 2021

키 작은 아이와 마음 좁은 엄마

키 작은 아이와 마음 좁은 엄마


며칠 전 딸아이 키 성장 검진을 받으러 대학병원에 다녀왔다. 6개월 만이었다. 초봄에 입던 아이의 원피스 길이가 무릎께에서 얼마큼 올라갔나 눈대중으로 체크해봐도 키가 썩 자란 것 같지 않아 계속 불안한 마음이 들긴 했었는데, 결과는 역시나 엄마인 내 눈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6개월 동안 아이가 자란 키는 2센티가 채 되지 않는다고 했다. 거기다 더 슬픈 것은 안 자란 키 대신 뼈 나이가 혼자 쑥 자라 버린 것이었다. 이전의 뼈 나이는 제 나이보다 1살 어렸는데 이제는 뼈 나이가 제 나이를 채워버렸다.


아기 때부터 계속 작긴 했지만 매년 성장의 흐름은 크게 나쁘지 않고 (1년에 4~5센티 이상 자라고 있으면 정상적인 성장으로 본다고 한다)  뼈 나이도 어린 편이니까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하시던 교수님도 이제는 안타까워하시며 성장 호르몬 결핍 검사를 다시 받아볼 의향은 없는지를 물어보셨다.


아이는 작년 6월에 이미 2박 3일 입원을 해서 해당 검사를 받은 이력이 있었다. 당시 검사 결과가 호르몬 결핍으로 나오면 건강보험 급여 부분에 해당하여 지원을 받을 수 있어서 곧장 호르몬 주사 처방을 받아 치료를 시작할 생각이었는데, 놀랍게도 결과는 호르몬 '정상' 이었다. 두 돌이 되기도 전부터 늘 또래의 키 백분율에서 1퍼센트 이하였던 아이라 당연히 호르몬 결핍으로 나올 줄 알았는데, 정상이라니...


성장 호르몬 수치를 '이상(결핍)' 과 '정상' 으로 구분하긴 하지만 이건 단순한 문제의 '유', '무' 구분은 아니다. 말 그대로 수치의 문제이다. 기준점이 10 인데, 수치가 10 이하로 나오면 성장 호르몬이 잘 분비되지 않는 '결핍' 에 해당하는 것이고, 수치가 그 이상이 나오면 성장 호르몬이 잘 분비되는 '정상' 에 해당한다.


만약 검사 결과 호르몬 수치가 10 이하로 나와서 '호르몬 결핍' 으로 판정이 되면 이 경우에는 성장 호르몬 치료 시 건강보험 급여로 적용되어 지원을 받을 수 있다. 하지만 11 만 나와도 아이는 '정상' 이라 성장 호르몬 치료는 비급여에 해당하여 치료 시 전액을 본인이 부담해야 한다. 호르몬 수치가 11 이라면 분명 '정상' 이지만, 수치가 20 인 아이보다는 성장이 더딜 수밖에 없는데, 이런 경우 금전적인 부담 탓에 부모의 고민이 깊어질 것이었다. 바로 우리처럼.


작년 성장 호르몬 결핍 검사에서 딸아이의 수치는 6개의 수치 중 2개가 기준 10 을 초과했다. 각각 11 과 13 이었다. 호르몬에는 이상이 없는, 특별한 원인이 없이 키가 또래의 백분율 1~3 퍼센트에 해당하는 저신장, '특발성 저신장' 이었다. 보험사에 검사비를 청구하기 위해 발급받은 진단서에는 '단신' 이라고 쓰여있었다.


치료비를 전액 자부담하면서 언제 끝날지 모를 성장 호르몬 주사 치료를 시작할 것인가. 결정이 쉽지가 않았지만 그나마 미룰 수 있었던 것은 아이가 주사를 무서워해서 치료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면 그 효과가 떨어질 수 있다, 또한 아이가 느리지만 분명히 자라고 있고, 뼈나이가 어린 편이기 때문에 좀 기다려볼 여지는 있다, 라는 교수님의 말씀 덕분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매번 '그럼 6개월 뒤에 다시 얼마나 자랐는지 재보기로 하자', 고 늘 말씀하시던 교수님이 그 말씀을 하지 않으셨다. 대신 호르몬 결핍 검사 혹은 치료를 실시하기로 결정하면 그때 다시 내원을 하라고 하셨다.


돌아 나오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아이의 성장이 더딘 것을 확인했으니 그에 따라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면 앞으로 굳이 이 대학병원에서 아이의 키와 뼈 나이를 재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거구나, 싶었다. 그래도 대학병원 검진을 꾸준히 다니고 있다는 그 사실 자체로 그동안 내가 스스로를 위안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도 그제야 들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걸으면서 그러면 안된다는 것을 아는데도 표정 관리가 되지 않았다. '왜 이렇게 안컸지?' 라는 혼잣말이 입술을 타고 저절로 흘러나왔다. 옆에서 아이가 듣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자꾸만 한숨이 터졌다. 아이의 만 18세 예상키가 150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은 너무 충격이었다. 내 딸이 원체 작긴 하지만 그래도 작은 나보다 더 작을 거라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 병원 복도에 안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B병동 1층 성인 코드 블루 발생."


누군가의 심정지를 알리는 방송이었다. 얼마나 급박한 상황일까. B병동 1층은 좀 전에 딸아이 성장판 검사를 위해 들렀던 일반촬영실이 있는 곳이었다.


"B병동 1층 성인 코드 블루 발생."


아득한 슬픔이 밀려왔다. 누군가의 생(生)과 사(死)가 흔들리고 있는 이곳에서 아이의 키가 좀 작은 것이 뭐 그리 대수라고 나는 이 유난이란 말인가. 삶은 정말 우주의 찰나에 불과한 것일 텐데. 고작 키가 좀 작은 것이 뭐 어떻다고.


작년에 아이는 입원해서 성장 호르몬 결핍 검사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주는 우주고.

나는 이 지구에 두 발 붙이고 생을 살아가는 어리석은 한 마리의 즘생에 불과하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내내 우울함을 떨치기가 어려웠다. 그 어리석음을 스스로 탓하면서도 말이다.


남편은 나보다는 우주적인 마음 씀씀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안타까워하면서도 별 말이 없었다. 그는 매사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자면 '뭐 어때' 라고 관용하는 편이고, 부정적으로 보자면 '할 수 없지' 라고 체념하는 편이다. 아마 내가 좀 무리를 해서라도 당장 호르몬 치료를 시작하자고 하면 '그래' 라고 할 사람이고, 또 내가 당장은 아이도 주사를 무서워하는 것 같고 금전적인 부담도 크니까 좀 더 기다려보자고 하면 또 '그래' 라고 할 사람이었다.


고민을 나눌 사람이 없어 혼자 끙끙 앓는 와중에 둘째아이 마저도 제대로 밥을 먹지 않았다. 아침밥을 먹지 않으면 어린이집에서 점심밥을 먹을 때까지 굶고 있을 텐데 싶어 조금이라도 먹이려 해 봤지만 50분 동안 5살 아이가 먹은 것은 고작 두 숟가락이었다. 배는 고픈데 밥은 먹기가 싫다고 했다. 그럼 우유라도 마시자고 설득해서 우유를 주었더니 그마저도 양치질을 하기 직전에 모두 다 토해버렸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린 것은 아이가 아니라 나였다. '도대체 왜 이러는 거야? 왜? 도대체 왜? 응? 엄마가 뭘 잘못했니? 이러면 안 큰단 말이야! 어쩌려고 이래!' 아기 때부터 정말 안 먹고 안크는 두 아이를 키우면서 쌓여있던 엄마로서의 울분이 폭발했다.


겨우 추슬러 아이를 어린이집에 등원시키고 나서도 터진 감정은 도무지 다시 주워 담아지지 않았다.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엄마의 눈물에 당황하던 둘째아이의 얼굴도 자꾸만 아른거렸다. 다시 엉엉 울면서 제주도에 있는 20년 지기 친구에게 연락을 했다. 아무도 내 마음을 이해하지 못할 것 같은 순간에 유일하게 생각나는 친구였다.


친구가 말한 적이 있었다. '사실 집에서 제일 성격파탄자는 엄마지.' 다른 사람이 그리 말하면 발끈하겠지만, 같은 엄마의 입장이기 때문에 공감하고 위안받을 수 있다.


친구가 말했다. '아이가 작은 거 그 자체보다, 그걸로 인해 '난 작아서 안돼' 이런 상처가 생길까 봐. 그리고 안 먹는 걸로 엄마랑 씨름하는 과정에서 또 서로에게 상처가 생길까 봐 그게 더 걱정이 되네. 내가 ㅇㅇ이 엄마라면, 나는 ㅇㅇ이가 똘똘하고 믿음직스러워서 '좀 작으면 어때' 이런 마음이 들 것 같은데.'




걱정과 우울을 표정에서나마 털어버리는 데에는 꼬박 하루가 걸렸다.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 전에 미리 저녁 반찬을 평소보다 더 정성껏 준비해놓으려 노력했다. 먼저 돌아온 둘째아이를 안고 사과했다. '아침에 엄마가 화내서 너무 미안해.' 동그란 눈을 도르르 굴려보던 둘째는 말없이 엄마를 폭 마주 안아주었다.


저녁에는 차분하게 앉아 첫째아이에게 고요히 물었다. '키 크는데 도움된다는 그 주사 말이야. 어떨 것 같니? 한 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드는지 아니면 아직도 무서워서 안 하고 싶은지, 네 마음이 알고 싶어.' 잠깐 뜸을 들이던 아이는 이내 '무서워. 안 하고 싶어.' 라고 했다. '그래, 알겠어.' 첫째아이도 꼭 마주 안아주었다.




다시 하루가 지나고 나니 그제야 마음에 평정이 조금이나마 찾아온다. 폭풍우가 몰아친 것 같은 며칠이었다. 내 마음이 만들어낸 폭풍이 나 자신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마음까지 할퀴었다는 사실이 후회로 되돌아온다. 애초에 아이가 키가 크고 싶다고 스스로 말한 적도 없었다. 키가 작다는 것 때문에 그리 힘들어하는 아이도 아니었다. 아이의 키가 작아서 힘들어하는 건 아이 본인이 아니라 엄마인 나였다.


아이의 키가 작은 것이 문제가 아니라 엄마의 마음이 너무 좁은 것이 더 문제다.


아이들의 식습관의 문제, 수면의 문제, 운동 등에 대해서도 앞으로 꾸준히 노력해야 하겠지만 그 보다 더 먼저 당장 노력해야 할 것이 엄마의 마음 그릇을 넓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 아이가 자라서 '나는 왜 이렇게 작아?' 라고 말하게 될 날이 올지 모르겠는데, 혹 그런 날이 온다고 해도 그때의 엄마는 '그러니까 밥 좀 잘 먹으라고 했지!' 따위가 아니라, '뭐 어때? 넌 이렇게 예쁜데.' 라고 진심으로 말해줄 수 있는 엄마가 되었으면 좋겠다.


물론 언젠가 아이가 주사를 원한다고, 맞을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때가 만약 온다면 그때는 원하는 것을 꼭 들어줄 수 있도록 더 대비를 해두어야겠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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