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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Sep 23. 2021

9퍼센트의 희망

키 작은 아이와 마음 좁은 엄마


추석 연휴에 만났던 3살 조카의 키가 5살 우리 둘째와 큰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조카는 여자아이, 우리 둘째는 남자아이.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친정엄마에게 하소연했다. 추석 끝나자마자 영유아 검진받으러 가야 되는데 너무 가기 싫다고. 키가 많이 작네요, 라는 말을 들을 게 뻔한데. 매 끼니 고기나 생선, 달걀 꼭 먹이시고, 매일 우유 200에서 500미리는 먹여주셔야 해요, 잠은 늦어도 10시 이전에 꼭 재우시구요, 누가 모르냐고, 난 이제 지겹다고.


​불과 얼마 전 첫째 아이의 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다가 겨우 정신 차리고 좀 내려놓는가 싶었는데 이제 둘째 차례가 온 것이다. 하필 둘째의 영유아 검진 시기라서. (9월생이라 더 미룰 수가 없다.)


작년 이맘때 받았던 영유아 검진 결과서를 찾아보았다. 또래의 백분율에서 4퍼센트. 또래 아이 100명 중 4번째로 작은 아이.


그리고 첫째 아이가 5세 때, 그러니까 지금 현재 둘째 아이의 시기에 받았던 영유아 검진 결과서도 찾아보았다. 또래의 백분율에서 1퍼센트. 또래 아이 100명 중 1번째로 작은 아이. 아, 맞다, 그래서 의뢰서를 받아서 처음으로 대학병원에 갔었지.


급격히 우울해졌다.


원래도 밥 먹는 걸 좋아하지 않는 둘째는 요즘 그 정도가 더 심하다. 아침밥은 아예 먹지 않으려고 해서 우유에 하이키드(어린이 영양식, 분유처럼 생김)를 타서 겨우 100~150미리 정도 마신다. 점심은 어린이집에서 먹고 오는데, 선생님 말씀으로는 남자아이 치고는 양이 적다고 하셨다. 그리고 문제의 저녁. 밥 먹기를 너무 싫어해서 아이 아빠가 직접 떠먹여 준다. 한 끼 다 먹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이 1시간은 기본이고 거의 1시간 반에서 많게는 2시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


밥을 먹기 싫어하면 밥상을 치우고 다음 끼니때까지 아무 간식을 주지 말아라, 는 이야기를 참 많이도 들었지만, 저 비쩍 마른 우리집 아이들은 그렇게 하면 물만 먹고도 이틀은 버티는 아이들이었다. 식습관을 고치기 위해 밥상을 치우려니 저 조그만 아이들의 가느다란 팔다리와 작은 키가 차마 그러지 못하게 했다.


정말 딱 생명을 유지할 만큼만 먹고 그 외의 모든 섭취에는 관심이 없는 저 아이들(특히 둘째)에게, 일단은 한 숟가락 만이라도 더 먹이자, 라는 게 우리 부부의 절박한 심정.


어쨌든, '어쩌겠냐. 마음을 내려놔라. 안 아프니 다행이라고 생각을 해.' 라는 친정엄마의 말을 되새기며 터벅터벅 병원으로 향했다. 요즘 너무 안먹었는데 4퍼센트에서 더 줄어들었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을 차마 다 지우지는 못하고서.


간호사들이 유독 불친절하지만 집에서 가장 가깝다는 이유로 들른 소아과. 체중도 키도 직접 재야 하는데 아들이 협조를 잘 안 해줬다. "97.7 이네요." 냉정한 간호사의 목소리에, "아, 잠시만요, 딱 한 번만 다시 잴게요." 아이가 비스듬하게 선 것 같았다. "허리 쭉 펴고, 뒤에 기대지 말고, 한 번만 다시 재보자, 응?" 무뚝뚝한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는 간호사의 눈치를 보면서 하기 싫다는 아이를 겨우 달랬다. "97.9." 휴. 잃어버릴 뻔했던 소중한 2mm를 되찾았다.


의사와의 면담을 기다리며 우리 모자는 불안, 초조했다. 엄마는 과연 백분율이 얼마나 나올까 싶어서. 아들은 만 48개월 예방접종 때문에 주사를 맞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어서.


드디어 의사선생님과의 만남. 이 시기의 아이 양육 시 주의사항 같은 것부터 설명해주신다. 귀는 듣고 있는데 눈은 의사선생님이 쥐고 있는 영유아 검진 결과서로 향했다. 작은 눈을 부릅뜨고 열심히 숫자를 훑는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활동력이 대단하기 때문에 안전사고의 위험이 크니까 주의하셔야 해요."


그래서 저게 설마, 9? 진짜? 9퍼센트?!

오 마이 갓.


"킥보드나 자전거, 인라인 스케이트 탈 땐 반드시 헬멧 하고 보호장구 착용해주셔야 되구요."


네네, 그럼요, 당연하죠. 마스크를 끼고 있지 않았다면 의사선생님이 의아해하셨을지도 모른다. 저 엄마가 왜 갑자기 웃지? 하고 말이다.


"3프로 이하일 때 저신장이라고 해서 정밀검사를 해볼 필요가 있다고 보는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좀 작네요."


네, 그렇죠, 하하하.


"매 끼니 고기나 생선, 달걀 꼭 먹이시고, 매일 우유 200에서 500미리는 먹여주셔야 해요."


예예, 암요, 암요. 더 열심히 먹여볼게요.


"잠은 늦어도 10시 이전에 꼭 재우시구요."


의사선생님의 목소리에는 작은 아이에 대한 걱정이 스며있었지만 이미 내 귀에는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9퍼센트라니!


무려 9퍼센트!


늘 1퍼센트였던 첫째 아이를 키우면서 누군가에게 하소연할 때마다 했던 말이, "평균은 바라지도 않아, 딱 10퍼센트만 돼도 걱정이 없겠어." 였는데. 9퍼센트라니!


게다가 작년 4퍼센트에서 올해 9퍼센트가 되었으니 아이가 더욱 열심히 쑥쑥 자라주었다는 뜻이라서 정말이지 감격스러웠다.



아이는 양 팔에 주사 한 대씩을 맞고 뿌애앵 울음을 터뜨렸다. 웬만해서는 주사를 잘 참는 아이인데, 이번 주사는 좀 아플 거라는 간호사의 말대로 정말 아팠던 모양이었다.


아이구, 우리 애기 아팠쪄? 우쮸쮸 우쮸쮸.


남들에겐 9퍼센트도 아주 작은 키겠지만, 나에게는, 아니, 이렇게 크다고?! 할 만큼 기뻤다. 유독 안 먹고 유독 작은 아이들이라 늘 안타까웠는데, 한 줄기 희망을 얻은 기분이었다.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어찌나 가볍던지.


잘 자라줘서 고맙다, 아들!

엄마도 더 힘내볼게!

우리 열심히 커보자!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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