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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erimi Oct 20. 2021

삶은 여행


제주도 여행을 다녀왔다. 평일로 날을 잡아서 첫째 아이의 학교에는 가족교외체험학습 신청서를 내고 허락을 받았다. 남편 없이 홀로 두 아이만 데리고 떠난 첫 여행이었다.


겁이 많아서 운전을 못하는 내 입장에서는 아주 대단한 결정이었다. 물론 제주도에서 살고 있는 친구네 집 별채에서 머물기로 했던 터라 겨우 낼 수 있었던 용기이기도 했다.


눈치가 빠르고 영민해서 엄마가 한 번 주의를 주면 금방 알아듣고 말을 듣는 첫째 딸아이와 달리, 아들인 둘째는 고집이 보통이 아니어서 고민이 컸다. 키즈카페에서도 약속시간을 단 한 번도 어겨본 적 없는 첫째 아이와 정 반대로 둘째는 약속한 제 시간이 되었을 때 한 번에 나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정도였다.


이번 한 번만 시어머님께 부탁을 드려서 맡겨두고 갈까, 싶은 고민을 마지막 순간까지 했다. 시어머님은 아이 봐주시는 걸 너무 좋아하시기 때문에 내가 부탁만 드린다면 분명 오케이, 하실 터였다. (사실은 평소 내가 아이 맡기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편이라, 이렇게 내가 필요할 때만 '이용'하려고 하는 내 마음에 자괴감도 들었지만.)


그래도 친구네 집 별채에서 머물 수 있는 이 좋은 기회에 둘째를 데려가지 않으면, 다시 언제 둘째가 엄마와 떠나는 여행을 또 할 기회가 있을까, 싶어 크게 마음을 가다듬고 용기를 내보았다.


그리고 제주도에 도착한 첫날부터 나는, '둘째를 데려오지 않았으면 얼마나 후회할 뻔했을까.' 하는 다행한 생각을 했다. 내 걱정과 달리 또 모두의 예상과 달리, 둘째는 너무나 신나게, 너무나 열심히 엄마의 주의사항을 들으며 여행을 즐겼다. 공항에서도, 비행기에서도, 택시로 이동할 때도, 숙소에서도. '늘 아기 같기만 했던 둘째가 언제 이렇게 의젓하게 컸지?' 하는 생각도 할 정도였다.


4박 5일간의 여행 동안 숙소가 있는 조천읍을 벗어나지 않았다. 아이들은 비옷을 입고 흩뿌리는 비를 맞으며 동네를 산책했고, 고양이의 발자국을 쫒거나, 마당을 가로지르는 달팽이와 비단거미를 구경했다.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마음이 풍요로웠다.


저녁에는 친구가 차로 10분 거리에 있는 함덕 해수욕장이나 김녕 해수욕장 등으로 데려다주어서 노을을 즐기기도 했다. 평소엔 모래 알갱이가 슬리퍼 안에 들어가는 것이 못마땅해서 싫어하던 둘째가 쪼그리고 앉아 바지를 다 적셔가면서 열심히 모래놀이를 했다. 아이의 마음에도 여유로움이 가득 찼던 모양이었다.


돌아오는 날 아침에는 동네에 있던 카페에 잠시 들렀다. 첫째는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고 편지와 함께 용돈을 주셨던 할아버지와 할머니께 답장 편지를 썼다. 둘째는 그 옆에 앉아서 엄마의 얼굴을 그려주었다. 나는 늘 이렇게 고요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오후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 위해 공항으로 향하는 택시에 올랐다. 공항까지의 거리가 50분 거리쯤 되어서 출국 시간으로부터 1시간 40분 전에 출발을 했다. 아이들은 공항에서 대기하는 시간을 못 견뎌하니 그 쯤이면 충분하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택시는 자꾸만 길에서 멈춰 섰다. 앞에는 전에 못 보던 차들이 자꾸만 줄지어 섰다. 금요일 저녁, 퇴근시간과 겹친다는 걸 미처 염두하지 못한 나의 불찰이었다. 아니 제주도는 불금이라든가 칼퇴 같은 단어와도 좀 안 어울릴 것만 같았으니까.


아, 그러네. 제주도 역시 여행만 있는 곳이 아니라 일상 또한 있는 곳이었네. 일상으로 돌아가려는 때에 맞춰 이렇게 일상을 깨닫네.


"저, 기사님, 6시까지는 도착하겠죠?"

"어우, 평소라면 벌써 도착했을 텐데, 오늘 유난히 길이 밀리네요."

"저희가 6시 40분 비행기를 타야 하거든요."

"그래요? 어우..."


둘째는 세상 모른 채 택시 안에서 잠들어 있었고, 눈치 빠른 첫째는 불안한 목소리로, "엄마, 왜? 무슨 일이야?" 물었다. "시간이 빠듯할 것 같네. 택시에서 내리면 우리 곧장 뛰어야 해. 엄마는 한 손으로 가방을 끌어야 하니까, 네가 동생 손을 잘 잡고 엄마를 따라 잘 뛰어야 해. 알겠지?" 불안해하면서도 첫째는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 몰래 다급하게 다음 비행기를 검색했다. 이러다간 정말 비행기를 놓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다행히 1시간 20분 뒤의 티켓이 남아있었다. 다만 가격이 우리가 미리 예매했던 왕복 티켓의 두 배 가까이 비쌌다. 어우...


"20분 전에만 도착하면 비행기는 탈 수 있을 거예요. 근데 서둘러야겠어." 기사님은 공항에 가까워지자 벨트를 먼저 푸셨다. 짐 가방을 빨리 내려주려고 그러시는 듯했다. 둘째를 미리 깨웠다. "서둘러요!", "감사합니다!"


6시 15분이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우리 셋은 나란히 손을 이어 잡고 열심히 뛰었다. 수화물 수취소의 긴 줄에 망연자실하려는데, "6시 40분 부산행 승객분 계십니까?!", 번쩍 손을 들고 외쳤다. "저희요!!!" 다행히 제일 먼저 짐을 맡기고 다시 열심히 뛰어 게이트로 향했다. "마감합니다." 라는 승무원의 안내 멘트를 들으며 겨우 세이브.


우리 셋은 숨을 몰아쉬며 서로 수고했다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평소 동생을 귀찮아 마지않던 첫째가 둘째를 꼭 껴안아주며 말했다. "ㅇㅇ아. 힘들었지? 잘했어." 나는 첫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네 덕분이야. 고마워." 이 또한 여행이 우리에게 준 선물 같은 추억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저녁 비행기 안에서 나는 내내 삶에 대해 생각했다.


너무나 평온해서 더욱 행복했던 여행이었다. 아니, 삶은 여행이라는데, 왜 일상은 여행과 같을 수 없는 걸까.


머릿속에서는 돌아오는 바로 그날 제주의 어느 카페에서 만났던, 친구가 언니라고 부르던 그 사장님이 던진 말이 계속 맴돌았다. 직장에 대한 고민들을 나누던 친구와 내게 혹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으시고는, '복직 때문에요.' 라는 친구의 말에, "때려쳐, 그냥. 뭘 그렇게 고민해,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라고 하시던 그 편안한 목소리. 요즈음의 내게 꼭 필요했던 목소리였다.


그러게. 한 번 사는 인생인데. 매번 뭘 그렇게 자꾸 고민을 하는 걸까.


그 목소리의 여운 또한 여행이 내게 준 선물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그러려고 여행을 하는 거였지. 삶에 관한 자신 만의 답을 찾으려고.


그렇다고 당장 답을 찾은 건 아니지만.

이렇게 천천히 찾아나가는 거겠지.

잊지 말아야겠다.


'뭘 그렇게 고민해. 한 번 사는 인생인데.'


제주 김녕 해수욕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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