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번에는 인습적이지 않은 영화 두 편을 보자. 바로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와 장 뤽 고다르의 '비브르 사 비'이다. '세브린느'는 멕시코에서, '비브르 사 비'는 프랑스에서 만들어졌지만 두 영화 모두 1960년대의 대표작들이고 멍때리면서 보고 있다 보면 대체 무슨 내용인지 금방 길을 잃어버린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루이스 브뉘엘과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세계의 비슷한 점 때문이다. 루이스 브뉘엘은 '안달루시아의 개'로 시작해서 어떠한 영화 사조에도 정착하지 않으며 초현실주의적인 취향을 드러내었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지... 라고 말을 하게 되는 것이 정상이며, 장 뤽 고다르는 아예 대놓고 영화에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어야 하느냐는 비평가의 질문에 "그렇다. 하지만 꼭 순서대로 일정할 필요는 없다"라고 대답하며 이야기의 전통을 깨는 작업을 했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보면 이게 대체 무슨 내용인지를 넘어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라고 말하게 된다. 이번에 다룰 장 뤽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 사 비'는 그나마 진라면 순한맛이고 후기 작품인 '미녀 갱 카르멘' 즈음에 가면 대체 내가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인지 이게 영화인지 라틴어인지 헷갈리기 시작하며 덕분에 장 뤽 고다르의 작품들은 관객들의 반발을 샀다. 너무 어려워서.
그래도, 한 번 리뷰에 도전해 보자. 일단 루이스 브뉘엘의 '세브린느'부터다. 영화는 뜬금없이 카트린 드뇌브(극 중 역할: 세브린느, 주인공)가 옷이 벗겨진 채로 나무에 묶여서 채찍을 맞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카트린 드뇌브와 같이 왔던 남자가 둘이 타고 온 마차의 마부에게 카트린 드뇌브를 마음대로 하라고 하고, 마부는 성욕이 가득한 눈빛으로 카트린 드뇌브에게 다가간다. 그런데, 카트린 드뇌브는 그 상황을 점점 즐기는 것 같다?! 마치 오르가즘을 느끼듯이 눈을 감는 카트린 드뇌브를 배경으로 "무슨 생각해, 세브린느?"라는 대사가 들리고 씬은 갑자기 전환된다. 이게 무슨 일. 미간을 짚으면서 영화를 계속 보고 있자면 아까 세브린느를 채찍으로 때렸던 그 남자는 세브린느의 남편이었나...? 싶고, 이건 오프닝의 해프닝이 벌어지게 된 이유를 알려주는 과거의 일인가...? 싶다. 알고보니 세브린느는 남편에게서 지루함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다가 쾌락을 좇아 낮에 매춘부로 일하면서 안정감을 느끼다가 손님 중 한 명이 자기한테 달라붙고 집까지 찾아오는 바람에 남편한테 들키게 되고 남편은 그런 세브린느를 벌하려 하지만 이미 피학적 쾌감에 눈을 뜬 세브린느는 그 채찍질에서 쾌감을 느낀다...는 내용인가 싶은데, 내가 맞게 이해한 건지 모르겠다. (사실 이 영화의 줄거리를 요약한다는 것 자체가 큰 도전이다... 물론 예술영화에서 이정도면 달달한 이슬톡톡 정도긴 한데)
뭐, 그래. 사실 이런 영화는 줄거리 이해하려고 보는게 아니다. 그냥 멍때리면서 영상미가 예쁘네... 옷이 예쁘네... 카트린 드뇌브... 예쁘네... 하면서 보는 거다. '죽기 전에 꼭 봐야 하는 영화 1001'에서도 '세브린느'를 소개하면서 "브뉘엘은 카트린 드뇌브의 나체가 아니라 그 몸을 은폐하는 의복과 베일을, 그리고 그녀의 특별하게 잘 가꾸어 윤이 나는 여성적 표면을 사랑한다."라고 했다고. 이 영화에 나오는 모든 옷이 내 취향이다. (찾아보니 입생로랑이 직접 디자인한 옷들이라고.) 내가 좀 여성적인 옷을 좋아하긴 하지. 여자도 좋아해. 그래, 이 영화 카트린 드뇌브 때문에 본 거 맞다. 카트린 드뇌브가 나오는 재밌고 정상적인 다른 영화들도 많은데 왜 하필 이 영화를 골라서 봤냐고? 나는 원래 새벽에 자다가 깨면 들뢰즈가 재밌어할 것 같은 영화 멍때리면서 봄. 보다보면 나름 재밌음. 분하다 나랑 들뢰즈랑 취향이 비슷하다니. 문송합니다.
너무 헛소리만 늘어놓은 것 같다. 이마를 긁적이면서 좀 말이 되는 소리도 해보자면, 루이스 브뉘엘은 이 영화를 '포르노그래피'라고 했다는데 이건 검열이 심하던 당시 영화계에서 아주 파격적으로 금지된 욕망을 드러낸 작품인 것이다. 그 욕망이 비록... 좀... 범인의 시각에서 이상하긴 해도. 정확히는 좀 남성 판타지가 아닌가 싶긴 한데 (아무리 피학적 욕망을 가진 여자라 하더라도 여감독이 찍었다면 저런 줄거리가 나오진 않았을 거다.) 카트린 드뇌브의 연기로 그냥 모든 걸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카트린 드뇌브의 연기는 정동(情動)이 작다. 그래서 더욱 화면에 집중하게 된다. 나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 같은 정동이 큰 연기도 좋아하긴 하지만, 그런 연기의 경우에는 정말 잘 하지 않는 이상 아마추어처럼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정동이 작은 연기를 선호한다. 연기를 잘 하는 배우란 분노에 찬 고함을 잘 지르는 배우가 아니라 읊조리는 독백을 잘 하는 배우다.
그나저나 왜 남감독들은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욕망을 표현하려 할 때 항상 여주인공을 내세워서 창녀로 만든 다음에 BDSM을 찍게 하는 것인가? 세상의 에쎄머(BDSM 취향을 가진 성소수자들)들이 들고 일어날 일이다. '세브린느'도 그렇다. 루이스 브뉘엘이 이 영화더러 '포르노그래피'라고 말한 것은 포르노그래피란 사회의 규범에서 벗어난 것을 지칭한다는 걸 생각할 때 맞는 말이다. 베드씬 하나 나오지 않지만 검열이 심하던 1960년대였기 때문에 여성이 BDSM적 욕망을 채우기 위해 직접 낮에 일하는 매춘부가 된다는 이 영화는 포르노그래피다. 반면 2010년대에 나온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는 사회가 이제 검열을 그만큼 하지 않기 때문에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 들어있어도 포르노그래피가 아닌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바뀌었는데도 남감독들은 사회 규범에 어긋나는 욕망을 표현하고자 할 때 자꾸 여주인공을 내세워서 BDSM을 찍게 만든다. 덕분에 계속 BDSM은 이상한 취향으로 남아있고 실제 세상의 에쎄머들에게는 이상한 변태 바닐라(에쎄머가 아닌 사람)가 꼬이는 것이다. 그래서 BDSM을 하는 여성들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느니, 자신을 학대하기 좋아하는 정신질환자라느니... 하는 이상한 소리가 끊이지를 않는 것이다. 반사회적 욕망의 상징으로 BDSM을 그만 좀 내세웠으면 좋겠다. 게이와 레즈비언이 반사회적인 사람들이 아니듯이, 에쎄머도 반사회적인 사람이 아니다.
너무 급발진을 한 것 같다... 진정하고 '비브르 사 비' 이야기를 해야지. 이 영화는 좀 맘에 들었다. 물론 장 뤽 고다르가 내용은 어렵게 찍지만 연출과 영상미 하나는 미슐랭 쓰리스타급이라 눈이 즐거웠고 이 영화는 고다르 영화 치고 줄거리가 그렇게 꼬여 있는 편도 아니다. 주인공 역으로 나오는 안나 카리나(극 중 역할: 나나)는 배우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없어서 생존을 위해 성노동자가 된다. 나는 이 영화에서 성노동자를 묘사하는 방식이 좋았다. 정말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하는 사람으로 그려냈기 때문이다. 눈치 챘겠지만, 나는 '세브린느'의 줄거리 설명에서는 '매춘부'라는 단어를 썼고 '비브르 사 비'의 줄거리 설명에서는 '성노동자'라는 단어를 썼다. 그것은 각 영화가 똑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을 어떤 시각으로 어떻게 다르게 묘사하고 있는지를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비브르 사 비'는 성노동자가 포주와 어떤 복잡한 관계를 맺게 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남성 포주는 주인공인 나나와 동업관계라는 암묵적인 친분을 가지고 있지만, 돈이 필요하면 나나는 포주에 의해서 타인에게 팔려가는 갑과 을의 관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갑과 을의 관계는 남성 포주들끼리의 돈 문제가 불거지고 총을 든 갈등이 생겨났을 때, 결국 총에 맞아서 아무도 돌보지 않은 채 죽어가는 것은 나나라는 마지막 장면을 통해서 금방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도 돌변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장 뤽 고다르는 이 영화를 무성영화 시대에 바치는 영화로 만들었다. 그것을 알려주는 대표적인 장면은 배우를 꿈꾸는 나나가 극장에 들어가 프랑스 초기 영화사의 고전, '잔 다르크의 수난'을 보는 장면이다. 한 여름의 상쾌함과 경쾌함을 드러내는 듯한 컬러로 가득찬 '사랑과 경멸'과는 달리 고다르는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는데, 그것도 아마 은막의 시대에 바치는 영화이기 때문일 것이다. 흑백의 화면에서 마치 무성영화 시대 배우의 감성과 우수에 젖은 얼굴을 가지고 있는 안나 카리나는 관객으로 하여금 스크린 속으로 빨려들게 한다. 이 영화는 영화의 상영과 동시에 스크린 앞에 있던 오케스트라가 실연으로 ost를 연주했던 무성영화 시대의 영화처럼 고다르 영화 답지 않게 훌륭한 ost를 사용하고 있다. 장 뤽 고다르는 '시네마 베리테(1960년대에 등장한 프랑스 영화의 사조로 카메라의 기록성을 내세우며 현실을 그대로 찍고자 하는 다큐멘터리 일파이며, 자극적이거나 재생되는 음악과 음향을 회피하는 경향이 있다.)'의 영향을 받아서 대부분의 영화가, 심지어 중요한 대화내용이 촬영현장의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들리지 않는 것도 감안하고서, 현실의 소리를 그대로 담아내며 ost를 거의 사용하지 않고 있다는 것과 대치된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장 뤽 고다르의 영화 중에서 제일 쉽게 접근할만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