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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Dec 30. 2021

이키루

* 스포일러 있습니다.

이키루(1952)

'이키루'는 일본어로 '살다'라는 뜻이다. 살아간다는 건 과연 무엇일까. 어릴적 처음으로 시체가 든 관을 화장하는 것을 보고, 아, 저것이 '죽는다'는 것이고, 사람은 누구나 죽게 되어있고, 그렇게 완료되는 것이 삶이라는 것이구나, 라고 깨달았을 때를 나는 기억한다. 후에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의 '인생 수업'이라는 책을 읽으며 삶은 그저 완료되는 것만이 아니라 완결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 나도 언젠가 죽는다, 그렇다면 나는 내 인생을 그저 완료한 채로 죽을 것인가 아니면 무언가를 완결한 채로 죽을 것인가. 나는 무언가를 완결한 채로 죽고 싶었다. 그렇다면 언제 찾아올 지 모르는 죽는 그 순간에 삶을 돌아봤을 때 후회가 남아있지 않도록 살자.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사랑한다고 아낌없이 말하고, 소중한 사람을 소중하게 대해주고, 좋아하는 것을 진심으로 좋아해보자. 그렇게 나는 늘 죽음을 준비하는 삶을 살게 되었다. 언제 죽을 지 모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삶에서는 늘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 '이키루'는 그러한 진리를 말하고 있다.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남자를 통해 전달하는 삶의 진실성. 살아간다는 것.


영화는 주인공 역인 시무라 다카시(시무라 다카시는 구로사와 아키라의 페르소나였다.)가 서류에 도장을 찍는 일만을 반복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만년 과장인 시무라 다카시는 하는 일이 서류에 도장을 찍어 결재하는 일 밖에 없다. 부녀자들이 몰려와서 마을이 하수구 처리장때문에 악취가 심하다고 민원을 넣어도 하는 일뿐이라고는 그것이 우리 과의 담당 역할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부서로 보내라는 말 뿐이지, 민원을 해결해주지는 않는다. 부녀자들은 부서를 뺑뺑이 돌면서 '우리 담당이 아니니 다른 부서로 가 보세요.'라는 말을 듣다가 화가 난 채로 돌아가고, 시무라 다카시는 그저 책상 위에 올라온 서류에 계속해서 도장을 찍는다. 아마 과장보다 이하의 직급이었을 때에도 민원을 적극적으로 해결하기보다는 매일매일 도장 찍는 일만 반복했을 것이고, 과장보다 승진을 한다 해도 매일매일 도장 찍는 일만 반복할 것이다. 그것은 살아있으나 살아있다고 할 수 없는 삶이다. 이는 영화 속 시청 직원들의 대화로 나타난다. "자네는 휴가도 가지 않나? 시청에 꼭 필요한 사람인가보군." "아뇨, 제가 없어도 된다는 사실이 알려질까 두려워서죠." 그렇다. 그들은 없어져도 되는 삶을 산다. 그것을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나 하나 없어져도 아무도 그에 대해서 연연하지 않을 때, 그 사람은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을까? 마치 아무도 쓰러지는 소리를 듣지 못한 나무 한 그루가 숲속에서 쓰러졌을 때 그 나무는 과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처럼. 이 물음은 단지 나무에 관한 물음이 아니라 인생에 관한 물음이다. 사람 하나가 없어졌을 때 아무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그 사람은 과연 존재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물음에 '그렇지 않을지도 모른다.'라고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기 때문이다. 고독사가 서러운 이유는 삶이 실존적으로 존재하지 않음에 대한 슬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시무라 다카시도 그렇다. 그는 병원에 가서 암 선고를 받는다.


그제야 생각한다, 아, 나는 과연 실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이대로 죽어버리면 나는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닌가? 나는 어떤 삶을 살았던가. 이제부터라도 존재하기 위해서는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이키루(1952)

시무라 다카시는 '존재함'을 느끼기 위하여 생의 즐거움을 찾기 위한 여러가지 일을 다 해본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허무함만을 가져다 줄 뿐이다. 그러다가 시청에서 일하다가 이것은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님을 깨닫고 사직서를 내고 나가서 이제는 장난감 공장에서 일하는 오다기리 미키(극 중 역할: 도요)를 마주친다. 시무라 다카시는 "너의 활달함이 부럽다. 어떻게 그렇게 활달할 수 있느냐?"라고 묻는다. 영화는 여기에서 오다기리 미키의 입을 빌어 인간이란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임을 밝힌다. "제가 만든 장난감이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줄 거라고 생각하면 즐거워요."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삶을 생기있게 살고 존재하는 비법이다. 시무라 다카시는 그 말에서 자신도 다른 사람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시청으로 돌아가, 아무도 처리하려 해주지 않는 그 부녀자들의 민원을 적극적으로 온 힘을 다해 해결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장면은 갑자기 전환되고 배경은 시무라 다카시의 장례식장으로 변한다. 온통 남자뿐인 시청의 직원들은 시무라 다카시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하고, 상사는 와서 그것이 시무라 다카시의 개인적인 공이 아니라 다른 부서의 공으로 돌린다. 그러나 장례식장에 와서 시무라 다카시의 죽음을 진심으로 슬퍼하며 애도하는 부녀자들을 보면 시무라 다카시는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시청의 직원들은 그러고 보니... 라며, 생전 암선고를 받았던 시무라 다카시가 보였던 행동들을 말하기 시작하고 플래시백으로 시무라 다카시가 오다기리 미키의 말을 듣고 나서 어떻게 살았는지 영화는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것은 서류에 도장만 찍는 기계적인 삶이 아니라, 처음으로 책상 위에 올라온 서류를 읽어보고 이것을 해결하자고 말하기 시작하는 삶, 주체적인 존재함이었다.


이키루(1952)

영화는 시무라 다카시가 눈 내리는 날, 그네에 앉아 노래를 부르며 죽는 장면으로 끝이 난다.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여서 일을 하고 있었지만 실존적으로는 죽어 있는 도장 찍는 기계에 불과했던 시작 장면과 달리, 홀로 있지만 실존적으로는 살아있는 노래하는 시무라 다카시는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대비시키며 과연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시무라 다카시는 고독하게 홀로 그네에 앉아서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고독사가 아니다. 그것은 그가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죽었기 때문이라고 영화는 말하고 있다. 시청의 직원들은 시무라 다카시의 장례식장에서 자신들도 시무라 다카시를 본받아 피상적인 삶이 아니라 주체적인 삶을 살자고 다짐하지만 그것은 말만일뿐, 다음날 시청에 출근한 직원들은 모두 다시 평소와 같이 부녀자들의 민원을 타부서로 떠넘기고, 자신의 책상 위에 올라온 서류에 기계처럼 도장을 찍기 급급한 사람들로 변한다.


이키루(1952)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집단주의와 관료주의가 강한 일본에서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의 이야기를 찍기 좋아했다. 그것이 가장 잘 드러난 작품이 바로 '이키루'다. 그것이 어쩌면 구로사와 아키라가 그토록 유명함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에서는 인기가 없었던 이유일 수도 있겠다. 왜냐하면 동시대의 감독 오즈 야스지로의 전통적 인간상, 그리고 가족주의과는 달리 구로사와 아키라는 셰익스피어에서 영향을 많이 받은 서구적 인간상을 일본 특유의 감성으로 버무려냈고 집단보다는 개인의 삶을 사는 휴머니즘을 그려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50년 '라쇼몽'이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타고 나서야 구로사와 아키라는 주목을 받을 수 있었다. 구로사와 아키라의 영화들에서 실존적으로 살아가는 개인이 사회에서는 아웃사이더라는 점은 더욱 주목할만 하다. '이키루'에서도 주류인 시청 직원들, 남성들은 사회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실존적으로는 죽어있는 것과 다름 없고, 아웃사이더인 부녀자들, 여성들은 실존적으로는 살아있으나 사회적으로는 목소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점을 대비시키며 구로사와 아키라의 아웃사이더에 대한 관심을 드러냈다.


그렇다면 이 한 편의 영화, 그리고 자신의 필모그래피를 통해서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계속 말하고 싶어했던 삶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마지막, 시무라 다카시가 그네에 앉아서 부르는 노래의 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시무라 다카시의 고독사가 아닌 죽음은 이러한 교훈을 남기고 영화는 끝이 난다.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입술이 아직 붉은 색으로 빛날 때

그대의 사랑이 아직 식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삶은 찰나의 것 소녀여, 빨리 사랑에 빠져라

그대의 머릿결이 아직 눈부시게 빛날 때

사랑의 불꽃이 아직 다하지 않았을 때

내일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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