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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산드라 Jan 13. 2022

곡성 / 짐승의 끝

*스포일러 있습니다.

곡성(2015)

얼마 전에 이 영화를 미국인 친구와 함께 보았다. 그 친구는 이 영화를 '마지막 30분은 하나도 모르겠다'며 굉장히 불쾌해했다.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보는 사람더러 혼란스럽고 불쾌하라고 만들어진 영화이기 때문이다. 나홍진 감독은 이 영화를 가까운 친지의 죽음을 겪고 나서 구상했다고 한다. 아마 그때 나홍진 감독이 생각했던 것들이 이 영화에 들어가 있으리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나홍진 감독은 크리스천이다. 기독교에서는 사람이 죽는 이유를 원죄 때문이라고 말한다. 죄인이기 때문에 죄의 품삯은 사망이요, 사람은 고로 죽는다는 것이다. 원죄는 아담과 이브가 선악과를 따먹은 죄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사랑하는 나의 가족이 죽었을 때 우리는 그 설명을 쉬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내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 또는 동생이나 친구가 죽은 이유가 존재하는지도 모를 아담과 이브가 몇천 년 전에 열매 하나를 따먹었기 때문이라고? 당신은 그 설명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기독교인으로서 기나긴 변명을 좀 해보자면, 아담과 이브가 한 행동은 그저 열매 하나를 따먹은 게 아니다. 신은 왜 에덴동산에 유일한 금기를 만들어 두었을까? 그것은 인간의 자유의지를 위해서였다.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 것이다. 만약에 인간에게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없었다면 인간은 선하게만 살았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건 입력값이 주어진 대로 움직이는 로봇과 다를 게 무언가? 신은 자신을 숭배하는 존재로 로봇이 아닌 인간을 만들고 싶었고, 그랬기에 선악과를 두고 그것을 따먹지 말라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없는 에덴동산이었다면 인간은 영원히 로봇으로 살았을 테니까. 조금 이해가 가는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왜 신은 쓸데없이 나약한 인간으로 하여금 그런 중대한 나쁜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를 주어서 인간이 이토록 고해(苦海)에 시달리게 만드는 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자. 인간이 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면 선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도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따먹을 권리가 있다면 따먹지 않을 권리가 있다. 거기에서 '주체성'이 생겨난다. 그렇다, 신은 인간에게 주체성을 주고 싶었던 것이다. 수동적으로 선밖에 없는 선택지를 가지고 선하게 살아가는 로봇이 아니라 악을 선택할 수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하게 살아가는 인간을 원했던 것이다. 이제는 조금 이해가 가는가?


그러나 인간은 선악과를 따먹었다. 그것도 뱀의 이러한 꼬임에 넘어가서. "이것을 먹으면 하나님처럼 눈이 밝아진다." 즉, 신과 같이 될 수 있다는 꼬임에 넘어가서 열매를 먹은 것이다. 신만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그것은 선과 악을 가리는 일이다. 인간은 그러나 그 기준을 자신이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따먹었고, 멋대로 '벗은 것은 악하다'는 기준을 세워서 스스로의 알몸을 가렸다. 그리고 숨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악한 벗은 몸을 가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은 정말 그게 악하다고 생각했을까? 그랬다면 에덴동산에서 인간을 창조할 때 애초에 옷을 입힌 채로 창조하지 않았겠는가? 이건 인간이 생각하기에 악하다는 기준이고 인간이 생각하기에 악한 행위이므로 신이 아니라 인간이 기준이 된 선악의 구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따먹은 것은 단순한 열매 하나가 아니라 '신과 같이 선과 악의 기준을 정할 수 있다는 오만함'이다. 그렇다, 오만함이다. 내가 신이 될 수 있다는 오만함. 그것이 인간이 지은 원죄인 것이다.


곡성(2015)

그러나 악마는 그 틈을 파고든다. 인간이 스스로 모든 것의 옳고 그름을 정할 수 있다는 판단 말이다. 이 영화에서 신의 역할로 나오는 천우희는 모든 것에 분명하게 대답해준다. 내가 그 모든 것을 보았노라고. 하지만 악마 역할로 나오는 니시무라 준은 하나도 분명하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끝의 장면에 가서는 오히려 인간의 선택과 대답을 유도해내기까지 한다. 너는 이미 내가 악마인줄로 생각하고 왔지 않느냐? 그런 의미에서 신은 명확하고 악마는 모호하다. 하지만 인간은 모호함을 선호한다. 왜냐하면 모든 것이 모호할 때에 인간의 선택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스스로 선택하고 싶어하고, 그렇게 선악을 스스로 가리며 선택하는 것이 인간의 원죄다. 이제 좀 이해가 되는가? 그렇다 이것은 내 미국인 친구의 말에 따르면 하드한 크리스천 시각이다. 인간에게 신은 선택권을 주었으나 인간은 그 선택권으로 죄악밖에 선택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오만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홍진 감독도 말했다. 만약에 천우희가 닭이 세 번 울기 전에 가지 말라는 말에 곽도원이 가지 않았다면 이 모든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까? 라는 질문에 그런 경우는 없으며 곽도원은 결국 갔을 것이라고.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이 무엇이라도 되는 줄 안다. 하지만 신의, 하늘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은 뭣도 아니다. 그저 지상 위를 꾸물대며 살아가는 개미에 불과하다. 여기 그 시각을 더 극명하게 나타내는 영화가 있다.


짐승의 끝(2010)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말이다. 이 영화는 이 말을 정말 무서울정도로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천지는 어질지 않다는 것은 인간의 판단이다. 노자의 생각에 따르면 천지는 생각이 없다. 그냥 존재할 뿐이다. 벼락이 쳐서 누군가의 집이 불타도, 산이 무너져서 누군가가 깔려 죽어도 그건 천지는 아무 생각이 없다. 일어났기 때문이 일어난 일일 뿐이다. 그런 천지에게 소중한 중요한 누군가가 있을까? 이건 미국인 친구가 말한 하드한 크리스천 시각보다 더 하드한 동양적 시각이다. 기독교의 그런 니힐리즘적 시각--그러니까 인간은 어차피 뭘 해도 원죄를 저지르게 되어 있으나 자신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결국 인간은 이유도 모른 채 죽게 되리라는 시각--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목적론이 어느 정도 상쇄해 준 반면--인간은 모두 소명을 지니고 태어난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노장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천자는 어질지 않아 만물을 짚으로 만든 개처럼 여긴다는 말은 하나도 상쇄되지 않고서 그 말 그대로 생생히 남아있다.


영화에서 신, 혹은 그야말로 천지 그 자체를 연기한 박해일은 (이 시점에서 박해일에게 박수를 쳐줄 수 밖에 없다, 누가 인간의 시점에서 이해가 하나도 되지 않는 존재를 그처럼 능청스럽게 연기할 수 있겠나 말이다.) 주인공 순영의 역할을 맡은 이민지에게 아이를 잉태하게 하고, 받아간다. 인간에게 삶이란, 천지란 이해되지 않는 느닷없는 과정이고 여성에게 예상치 못한 잉태와 임신, 그리고 출산이란 역시 그렇다. 그리고 이 영화의 분위기 또한 그렇다. 이민지가 주인공이 된 이유는 별 것 없다. 한 식당에서 신이 한 사다리타기에 걸렸기 때문이다. 사다리타기, 그것은 무질서한 천지의 무심함을 그대로 상징하는 도구이다. 그것은 영화 전체의 기이한 시공간적 배경으로 확장되었다가, 이민지의 예상치 못한 임신과 출산이라는 상징으로 집결된다. 그것은 마치 곡성에서 곽도원의 딸과 가족, 그리고 곽도원이 그 고난을 겪어야 했던 무질서한 천지의 무심함과도 같다. 두 영화의 다른 점이 있다면 곡성은 마지막 30분에서만 그 불쾌감, 혹은 몰이해성을 겪게 하는 반면 짐승의 끝은 영화 전체에서 그 불쾌감과 몰이해성을 겪게 한다는 것이다.


짐승의 끝(2010)

이쯤에서 느닷없이, 마치 한 치 앞도 모르는 채 전개되는 이 영화의 줄거리처럼, 나는 여성의 잉태와 임신, 출산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싶어졌다. 어떤 글에서 짐승의 끝의 이민지를 '악마의 씨(1968)'에 나오는 로즈마리로 비유한 것을 보았는데, 나는 임신이란 계획을 하고 해도 안 하고 해도 여성에게 참 느닷없고 신체의 통제권을 빼앗기는 일이라는 점에서 두 주인공에게 비슷한 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악마의 씨를 보면서 나는 이 영화란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니라 여성이 임신을 했을 때 겪는 신체의 주권 빼앗김을 참 잘 나타내주는 영화라고 생각했다. 임신이란 낳은 아이에게 다른 사람의 성씨를 준다는 점에서 잘 드러나듯이 여성의 오롯한 주권적인 행위가 아니다. 나의 이런 생각에 반발을 하는 독자들도 있겠다. 간절히 원해서 잉태하고 기뻐하며 임신 10개월을 기다린 뒤 열심으로 아이를 출산하는 여성들도 분명히 있으니까. 하지만 좀 더 생물학적으로 들어가보자. 임신이란 여성과 여성의 아이가 한 몸을 나눠쓰는 행위고 더 정확히는 그 아이를 위해 여성 본인의 생물학적 주체성은 스러지고 아이가 여성의 몸을 '축내는' 일이 된다. 보부아르는 '제 2의 성' 1부에서 내내 이 이야기를 하고 있다. "종족의 번식과 여성의 주체성은 상충된다. 나는 나의 종족의 번식을 위하여 내 주체성을 포기하지 않겠다."


임신과 출산은 본래 여성의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사극에서 여성이 출산을 하는 방에 남자를 들어오지 못하게 '대모격' 되는 사람이 엄히 막는 그런 모습을 쉬이 볼 수 있다. 그런 사회에서는 '대모'가 존재하고, 그 대모는 산파 격 노릇을 한다. 왜냐하면 아무리 나오는 아이가 다른 이의 성씨를 따라가더라도, 어쨌거나 그 행위 자체는 여성에게 오롯이 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임신과 출산이란 고대 사회에서 여성에게 힘과 권력을 주는 행위였다. 평소에는 모르겠으나, 여성의 임신과 출산에 관하여 산파는 가부장보다 더 큰 권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근대로 접어들어오면서 그것은 변하게 되었다. 여성은 더이상 산파가 아니라 개업의에게 가게 되었고, 현재는 산부인과 여의사들이 많다지만 옛날에는 다 남자들이었다. 즉, 여성만의 일이었던 것이 여성을 소외시키는 남성의 일이 된 것이다. 이런 시스템에서 임신과 출산이란 여성에게 자신의 몸에 대한 소외를 의미한다. 자신의 몸에서 일어나는 일을 자신이 오롯이 처리할 수 없게 된 것이다. 내 몸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나는 모른다. 의사만이 알 뿐이다. 그것을 듣고 남편이 결정을 내린다. 그 과정을 영화 악마의 씨는 너무나도 잘 표현하고 있다.


이민지는 예상을 하지 못한 임신을 했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출산을 한다. 그리고 예상하지 못한 채 아이를 빼앗긴다. 결국 이민지에게 그 10개월이란 무엇이었을까? 내 몸이 나로부터 소외된 경험을 하는 천재지변이 아니었을까? 마치 영화의 도입부에서 "10초 뒤 전기가 나간다. 꽉 잡아. 자, 천사들이 내려옵니다!" 라고 박해일이 소리를 지른 후 잠깐 정신을 잃고 나서 눈을 떠보니 도달해 있었던 잔혹한 도덕경의 세상처럼 말이다. 그 어떤 것도 내 의지대로 흘러가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늑대 상태이고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나 또한 늑대가 되어야 하는 세상이다. 그리고 영화의 말미에서 아이를 몸 밖으로 배출해낸 후, 정신을 다시 잃고 눈을 떠보면 아이는 없고 영화는 끝나있다. 결국 이민지에게 그 10개월이란 무엇이었을까? 우리에게 이 영화의 러닝타임인 2시간은 무슨 의미일까? 우리에게 세상이란, 삶이란 무슨 의미일까? 당신은 대답을 할 수 있는가? 모든 것을 계획해 놓았고 사랑하려고 애썼지만 천지는 무심하여 천재지변처럼 우리의 삶의 지형과 구조를 바꿔놓고는 한다. 마치 이 영화의 줄거리처럼. 그것에 이유는 없다. 그 몰의미에서 나오는 불쾌감 혹은 당혹스러움은 인간으로 하여금 발버둥치게 한다. 의미를 부여하고자 말이다. 마치 어머니인 이민지가 뱃속의 아이에게 일기를 쓰면서 의미를 부여하려고 애썼던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세상은 나와 관계 없이 흘러간다. 기독교적 관점에 의하면, 신의 뜻대로. 노장자의 관점이라면, 신의 뜻도 없이. 그러니 우리는 모두 정신을 차려야 한다. 나 자신이라도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짐승의 끝의 이민지처럼 악마의 씨의 로즈마리처럼 나의 삶에서 내가 소외되어버리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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