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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씰리 May 29. 2023

'건축학개론'의 서연은 정녕 X년인가

서연을 향한 남성들의 시선이 불편해



2012년.

영화가 끝나고 어두운 영화관을 빠져나와 밝은 조명 아래 목도한 당시 남자친구의 표정은 가히 볼만했다.

'아... 히야아...' 이전까지 본 적 없는 깊은 탄성과 왠지 모르게 우수에 찬 눈빛의 연유를 물으니

'... 아니 그냥 <기억의 습작>이 나온 타이밍이 너무 절묘했어.' 라고 답했다.


2022년.

TV를 돌리다 건축학개론이 나오자 불현듯 내 옆에 앉아있는 지금 남자친구를 돌아봤다.

'자기, 저 영화 어땠어요?'

'..... (그답지 않게 한참 혼자 말을 고르다) 음 그냥, <기억의 습작>이 나오던 타이밍이 참 절묘했어요.'


소름돋는 평행이론!

더불어 나는 이 두 남자가 김동률의 명곡 뒤에 애써 몸을 숨긴, 그들의 진짜 <기억의 습작>이 무엇인지 안다.

승민이었던 본인이 서연을 선망하며 좋아했고 처절하게 상처 받았던 시절.

그때의 뼈저린 기억을 처음이라 서툰, 그저 아름다운 '습작'으로 포장해준 이 영화에 대한 눈물겨운 고마움.

이 와중에 심지어 지금 남자친구는 건축학개론 속 배경과 같은 대학교를 다녔다.


나는 혼자 몰래 피식 썩소를 짓기는 했지만 거기에 질투까지 느끼기에는 겸연쩍었다.

그들에 상응할 정도의 가슴 아픈 풋사랑이 없었음이 조금 안타까웠고.

김동률 핑계 정도로 마무리하며 나를 위해 그만 입을 다물어주는 예의에 고마웠다.



몇 달 전 어떤 TV프로그램이었는지 유튜브채널이었는지, 몇 명의 남자연예인들이 나와 토크하던 중

건축학개론 이야기가 나왔다.

다들 평소 큰 말실수 없이 센스 있는 말재간을 선사하는 이들이어서 늘 좋아해왔다.

이 부분의 토크 역시 쾌활한 분위기 속에서 선을 넘지 않았고 산뜻하게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걸 보는 나는 왠지 덜컥 굉장히 불편해졌다.



토크주제는 건축학개론 중에서도 후반부, 승민이 서연에게 고백하기 위해 그녀의 집 앞에 찾아갔는데

만취해 몸도 못 가누는 서연을 압구정 안경선배가 겨우겨우 부축해 담벼락에 앉혔다가

그녀에게 덜컥 키스하고, 취한 중에도 미약하게 거부하는 그녀를 그래그래- 달래며 다시 일으켜

그녀의 집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장면.

승민은 그 모든 과정을 숨어서 보고만 있다가 문이 닫힌 뒤에야 현관문 앞에 소리없이 다가가

떨면서 문에다 귀를 기울여보는 장면.


그 이야기를 하며 남자연예인들은 '아... 히야아... ㅠㅠ' 탄성하며

'우리 다 이런 경험들 있잖아요? 첫사랑한테 상처 받았던 경험!' '그렇죠! 술을 얼마나 먹었는지'

당시 상처 입은 어린 초식늑대들의 공감대로 대동단결하며

곧바로 그 다음 비쥐엠 <이별택시>를 향한 찬사로 이어졌다.

또 역시나 '그니까- 다들 그랬잖아요! 상처 받아 만취해서 진상 부리다 택시기사님이 혼내고 달래고... 크!'


이것이 바로 건축학개론이 흥행의 성공한 이유였다.

나는 여성들의 서툰 좌충우돌 성장기를 다룬 이야기만큼이나 남자들의 이야기도 응원한다. 하지만,


저 극중 사건에 대하여 승민이에 이입한 남자들이 자신들을 마냥 사랑의 피해자로만 생각하며

그 시절의 본인만을 애틋해하는 것이 몹시 불편했다.


남자연예인들의 토크는 이 사건이 끝난 뒤 학교 캠퍼스에서 승민이 서연과 다시 만났을 때

머뭇하며 말을 거는 그녀에게 승민이 처음으로 모질게 '꺼져줄래?' 하던 장면과

이후 절친 납뜩이가 그녀를 'X년!'으로 명확히 정리해주던 순간의 카타르시스를 소회하며 마무리됐다.



근데 서연은 정말 'X년'인가?

이 영화 속에서 서연이 잘못한 것은 대체 무엇인가.


내가 본 영화 속 서연은 당시 스무살다운, 근데 얼굴이 좀 되게 예쁘고 그걸 본인도 어느 정도 알고 있어서

그 무기를 어느 정도 적재적소에 써먹지만 악의는 없고 그저 해맑은 보통의 여자애다.


교양수업 과제를 좀 편하게 하고 싶어서 개구지게 승민에게 다가갔고

그와 친해짐과는 별개로 안경선배를 짝사랑한다.

근데 그 짝사랑은 진심이라기보단 유행 같은 느낌이다. 잘생기고 잘나가는데다 압구정까지 살잖아?

나도 좀 좋아할 수 있잖아?


그런 한편으론 승민과 친구로서 점점 가까워지면서 함께 추억을 쌓고 첫눈 오면 만나자는 약속도 한다.

그런 걸 보면 서연 역시 점점 승민을 좋아하고 있다. 첫사랑이다. 본인의 감정을 아직 모를 뿐이다.

하지만 많은 게 처음이고 서툰 스무살, 당연히 그럴 수 있지 않나?

승민은 뭐 얼마나 다른가?

승민의 순애보적 직진의 비결은 단지 그녀 이외엔 다른 옵션이 딱히 없던 덕분인 것도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서연은 클라이막스, 그 문제의 종강파티 술자리 내내 승민에게 공중전화를 건다.

안경선배의 플러팅도 '아 예...' 하며 무시하려 애쓴다.

서연은 계속 승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놈의 집 모형 만들어 정식으로 고백한답시고 연락두절하고 그 자리에 안 온 승민이 잘못이다.

집 모형을 꼭 그날 완성해서 갖다 바쳤어야 했나?

그날 승민만 그 자리에 왔더라면 그런 참사도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


내가 가장 화가 났던 이유는 이것이다.

영화 개봉 무렵에 여자선배들과도 그 장면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었다.

'사실 대학 때 그런 식으로 첫경험하는 여자애들이 많잖아... (그게 참 별로였어)'

대학도 제대로 안 갔고 딱히 비인기녀라 그 비슷한 위기도 없이 이십대 초반을 안전히 보냈던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큰 충격을 받았다.


원치도 않았던데다 심지어 기억도 잘 안 나는, 다음날 눈 뜨고 나니 이미 치러져버린 첫경험.

이건, 범죄다.


이후 캠퍼스에서 승민과 다시 마주친 서연의 눈빛은 왠지 조금 달라져있다.

훅 가라앉은, 인생의 첫 쓴맛을 본 뒤 한 발짝 어른이 된 느낌이다.

그런 그녀에게 아직 덜 자란, 본인 상처에만 갇혀있는 승민은 꺼져 달라고 말한다.


참 좋아했던 영화였지만, 어떤 면에선 참 폭력적인 작품이다.



그니까, 첫사랑에 상처 받은 남자들이 승민을 보며 위안 받는 것은 좋지만

서연을 'X년'으로 치부하며 욕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서연도 그녀만의 사정이 있었다. 그 사정이 실은 어쩌면 아주 마음 아픈 일이었다.

서연 본인마저도 그냥 애써 가볍게 퉁치고 털어버렸을지라도.


-


동문수학했던 친구가 졸업 후 영화제작사로 취업하게 되었고

그 애는 건축학개론 제작팀의 막내로 일하게 되었다.

영화가 개봉된 뒤 그 애가 '내가 겪었던 에피소드를 전체회의 때 말했더니 그게 시나리오 수정고에 들어갔어'

라고 위풍당당히 전했다.


그때 그 애가 겪은 에피소드가 뭐냐 하면... 스물두 살때쯤 소개팅이 하나 들어왔다.

(앞서 나 역시 그 애의 '인성'을 높이 사서 소개팅을 한번 주선했다가 폭망한 바 있다)

그 애는 소개팅녀와 처음 만나기 전 자신의 전공을 살려 어필을 하고 싶다며

나 포함 친구들을 동원해 본인의 브이로그(당시 기준 UCC)를 제작했다.

나는 매일 아침 이렇게 조깅을 해! 그런 뒤에 나는 아침에 이걸 먹고, 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지! 블라블라-.


찍는 과정에 함께하면서도 너무나 대리부담을 느꼈고

그 소개팅은 (내 기억엔 아마도) 만나기도 전에 파토가 났다.

솔직히 영상 속 그 모습이 제법 멋졌다면 적어도 만남까지는 이어졌겠으나, 암튼 망했다.


암튼 현실은 그랬다.


암튼 나는 세상의 승민이들보다

세상의 서연이들이 스스로를 더 애틋해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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