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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씰리 Apr 29. 2022

유정란이 되고 싶어

아직 무언가가 되지 못한 작가의 삶에 관하여


계란을 몹시 좋아한다. 하지만 한번 폭등한 계란값은 도무지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기에, 편의점이나 슈퍼에서 한 판에 오천원쯤 세일하는 걸 득템하면 그것이 그날의 대확행이다.


저녁도 많이 먹었는데 밤 11시가 되니 또 허기가 져서 에그스크램블을 만들기로 했다. 근데 계란을 까려다가 그만 손에서 놓쳐 바닥에 꽈당 깨지고 말았다! 안 돼 내 소중한 계란!! 세계인의 국룰대로 3초 안에 냉큼 국자로 주워 그릇에 담았는데, 다행히도 노른자가 무사히 살아있었다.

안도의 한숨을 쉬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것은 무정란일까, 유정란일까?     


나는 드라마 대본을 쓰는 일을 한다. 나에게는 서른두엇 페이지짜리 대본 한 편을 완성하는 것이 마감이고 퇴근이다. 어떤 날도 여느 때처럼 마감기한에 쫓기며 3일 안 씻은 몰골로 10시간째 노트북 앞에 앉아있다가 불현듯 이런 소회가 들었다.

‘아, 이것은... 뭐랄까, 콧구멍으로 알을 낳는 기분이다.’

이보다 적확한 표현은 없다.     

근데 문제는 이렇게 힘겹게 낳은 알이 무정란인지 유정란인지 까기 전엔 알 수 없다는 거다.


제작사와 집필 계약을 한지 5년이 지났다. 원래 작가계약은 3년이다. 그 사이에 1년 연장계약을 두 번 했다. 그동안 내가 낳은 알... 아니 내가 쓴 대본은 아무 연출자와 배우들에게 선택 받지 못하고 표류하는 중이다.

이 알을 까든 부화하든, 그것은 남의 손에 달린 셈이다.     


바닥에서 빛의 속도로 무사히 건져 올린 노른자는 따뜻하고 포실포실한 에그스크램블으로 완성되어 내 입속으로 들어왔다. 새해가 밝은지 며칠 안됐을 때여서, 어떤 새로운 결심의 캐치프레이즈가 필요했다.


‘올해도 자빠지되, 뭉개지지는 말자. 이 노른자처럼.’


계란 하나에 이렇게 많은 투사를 하다니 싶지만, 5년 동안 그렇게 살면서 버텨온 것 같았다. 숱하게 거절당하며 자빠졌으나 아직 완전히 뭉개지진 않았다. 내 멘탈도, 내 인생도.  

   

몇 년 동안 세상 누구도 보지 않은(관계자들은 논외로 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글을 쓰고 있다. 드라마 대본은 영상으로 만들어져야만 완성이니까.


이제 막 습작을 시작한 반짝반짝한 작가꿈나무들은 대부분 당선만 되면, 보조작가로 몇 작품 하고 나면, 괜찮은 기획안을 써서 관계자의 연락만 받으면 그때부턴 모든 일이 쉽게 풀릴 거라는 행복회로를 돌린다.

5년 전의 나처럼. 지금 내 주변에서 각자 개고생하고 있는 작가 동지들처럼.     


어쨌든 올해는 건강한 유정란으로 인증 받아 무사히 부화에 성공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을 담아, 오늘 저녁에는 라면에 계란을 두 개 넣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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