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늙어도 자란다
건강검진 혜택 같은 걸 주는 정규직 같은 걸 가져본 적이 없다가 30대 중반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건강검진을 받게 됐다. 야채 극혐에 밀가루 닭고기 러브. 낮에는 커피를 밤에는 맥주를 들이부으며 마감할 때는 담배도 꽤 많이 피우는 나. 운동은 당연히 제로. 마침내 오르게 되었구나. 이 쓰레기 같은 삶을 조명하는 심판대에.
호달달 떨며 각종 초음파 및 위 수면내시경까지 마쳤다. 간호사가 수면마취에서 날 깨우자마자 침상에서 벌떡 일어나 물은 것은 "저 코 골았나요?!" 내가 아닌 옆옆 침상의 아저씨의 코 고는 소리만이 메아리치고 있었다.
마취의 여운으로 비틀거리며 키와 몸무게를 재는 기계로 향했다. 내 초미의 관심사는 당연히 몸무게였다. 대체 몇 키로나 쪘을까... 예상만큼 찌진 않았다. 왜냐면 충격을 줄이기 위해 예상치를 아주 높게 잡았기 때문이다. 키야 뭐. 하면서 계기판을 마저 대충 흘려보고 내려오다가 순간, 음??
"기계가 좀 이상한데요."
"네? 뭐가요?"
"키가 잘못 나왔어요."
"그럴리가요...?"
"다시 재봐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다시 재봄)
"... 이 기계, 오류가 자주 발생하나요?"
"..... 아닐껄요...?"
성장기 이후 쭉 164cm였던 키가, 갑자기 2cm나 자라있었던 것이다!
얼떨떨한 기분에 휩싸인 채 모든 검진을 마치고 무료죽 쿠폰을 받아 구내식당으로 향했다(죽이 맛있다고 소문난 센터라 계속 기대하고 있었다). 창가를 바라보는 자리에 앉아 빌딩숲 풍경을 멍하게 바라보며 죽을 한술 두술 뜨는 내내 '30대 중반에 뜬금없이 키가 2센치나 자란 건에 관하여' 한참 생각했다. 살이 많이 쪘지. 그래서 발바닥에도 살이 찐 걸까? 아니지. 2mm 정도는 분명 쪘겠지만 2cm까지는.
며칠 후 만난 나의 파트너 J가 말했다. 늘 총명하며 잡학다식한 그녀는 그 소식을 듣자마자 명쾌하게 말했다.
아~ 그럴 수 있어요.
나이 먹으면 굽었던 허리가 펴져서 키가 크기도 한대요.
그렇구나. 나의 뜬금없는 신장증가의 비결은 바로 노화였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J와 나는 키가 같았는데, 어느새 내가 그녀의 정수리를 사알짝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 키가 큰 게 맞구나. 늙어서 키가 큰 거구나. 왠지 뿌듯해진 나는 그 소식을 SNS에도 자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카톡으로도 알리며 자랑했다.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은가 싶어서 인터넷을 검색해보다가 이런 글을 찾았다. 어떤 중년여성이 어금니가 너무 아파서 치과를 찾았는데 뜻밖에도 '사랑니'가 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간호사는 호호 웃으며
아직도 성장호르몬이 나오시나 봐요.
라고 농담을 했다고 한다.
나는 어른의 성장이란 '반추' 그리고 '반성'이라고 생각한다. 어른 대 어른으로서 저 인간이랑은 더 이상 상대 못하겠다 싶은 사람에게는 반드시 저 두 가지가 결여되어 있다. 본인의 실수를 돌아보지 않으며 그에 대한 성찰이 없기 때문에 머잖아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
어른이 되는 동안에 염증이나 혹, 지방처럼 몸 곳곳에 끼여버린 것들, 이미 내가 가지고 있게 돼버린 것들을 정제하고 쳐내고 근육으로 만드는 것이, 괜찮은 중년으로 늙는 것에 가장 중요한 미션이라고 생각한다.
훗날 노년에는 제법 괜찮고 귀여운 할머니가 되는 것이 꿈이기도 하고.
어쨌든 그래서 나는 매일매일 반성과 반추하는 것을 잊지 않으려 노력하고, 가끔은 그 과도한 내적 자아검열에 혼자 지쳐 나가떨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냥 그러고 산다. 당근마켓에 안 입는 원피스를 올리면서 꼭 '키 166센치!인 여성의 발목까지 오는 길이입니다' 라 자랑하곤 한다. 아마 더 이상 키가 자라거나 사랑니가 나는 일은 없겠지만 매일 조금씩 배운다. 어제는 유튜브를 통해 독일 합스부르크 가문의 멸망 이유에 대해 배웠고 지난주에는 셀러리를 볶으면 무엇에 곁들여도 맛있다는 걸 배우며 셀러리와 바질페스토를 넣은 김밥을 먹었다.
인간은 늙어도 자란다. 각자의 방식으로. 그것은 꽤 멋진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