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록스 신발
저녁 6시 회식시간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으니 잠시 종로산책을 좀 해야겠습니다. 강한 햇살이 한낮의 영광을 못 버리고 기세등등했지만, 오후 늦게 기울어져버린 빌딩의 그늘은 슬금슬금 인도를 잡아먹으며 우리 편이 되어 줍니다. 아들이 사준 크록스 신발을 걸치고 타박타박 걸으니 어느 한량(閑良) 부럽지 않습니다. '난 부럽지가 않아~ 한 개도 부럽지가 않아~'
버스에 안내양(차장)이 있던 '80년대를 추억하며 회식시간에 맞춰 15분 정도 대중교통을 이용할 셈입니다. 퇴근시간이다 보니 훨씬 효율적이다 싶습니다. 버스전용도로를 달리는 상쾌함이란.... ㅎㅎ. 자주 이용하지는 않지만 버스운행 시스템도 만만치 않게 잘 정비된 느낌입니다. 안내방송도 그렇고, 도착시간 알림도 그렇고, 착착 착착 빈틈이 없습니다.
얼마 전에 대만 남부지역 가오슝에 다녀왔습니다. 컨딩(墾丁) 국립공원 안에 있는 롱판공원(龍磐公園), 어롼비등대(鵝鑾鼻燈塔)를 배경을 사진도 남겼죠. 해안가 이름 모를 카페에서 마신 한 잔의 과일주스가 강한 오후의 태양에 목마름을 해소시켜 줍니다.
점심은 근처 해산물식당입니다. 걱정스러운 것은 일행의 기대감과는 달리 이 위기(?)를 어떻게 넘어갈 수 있을까 혼자 고민부터 하게 됩니다. 사실 저는 해산물을 못 먹기 때문이죠. 원만한 사회생활을 위해 입에 댈 수는 있으나 맛은 못 느낀다고 하는 것이 맞습니다. 저는 갑각류를 먹지 못합니다. 특히 새우는 냄새조차 맡기가 힘이 듭니다. 몸이 거부한다고 하는 표현이 더 정확합니다. 수년 전에 아들이 간장게장을 먹고 입술이 퉁퉁 붓는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것을 보면 분명 내 유전자에도 뭔가 거부하는 인자가 숨어있으리라 여겨집니다.
걱정과 우려를 끌어안고 식당에 도착하니, 우리나라의 해산물 식당과는 사뭇 다릅니다. 약간의 회를 시작으로 작은 접시에 올망졸망 담겨 나오는 음식에 비릿한 냄새가 없습니다. 향신료도 그다지 없을뿐더러 돼지고기 볶음이라던지 비 해산물로 만든 요리도 간간이 섞여 나옵니다. 일단 해산물식당에서 다른 사람 눈치 못 채게 식사하는 나만의 미션은 성공했습니다.
오늘 회식은 횟집입니다.
좋은 얘기를 할 것도 아니고, 재밌는 것도 아니고,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 먹고 싶은 거 먹을 거고, 내가 가고 싶을 때 갈 수도 없고.....
'유 퀴즈 온 더 블럭'에 출연한 어느 주류팀장의 말이 기억납니다. 회식문화에 대한 일갈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저도 ‘제가 가고 싶을 때 가려고’ 단단히 마음을 먹습니다. ㅎㅎ 와인과 위스키이야기, 못다 한 업무 뒷이야기, MBTI를 주제로 성격이야기를 하다가, 두고 온 차량의 주차시간을 핑계로 어쩔 수 없이(?) 회식 자리에서 먼저 일어났습니다. 미션 성공입니다.
대만에서는 타인의 즐거움을 해치지 않으려는 작은 배려의 미션이었지만, 어제의 회식에서는 오히려 나 자신을 위한 작은 자유, 삶의 균형을 지키려는 선택이었습니다. 이기심이 아니라, 나를 지켜내는 또 다른 방식의 배려였을지도 모릅니다. 삶은 배려와 자유 사이를 저울질하며 나만의 균형점을 찾아가는 여정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크록스 신발을 걸치고 '타박타박' 걷는 자유함도 제겐 필요합니다. 이제 나를 위한 배려도 해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