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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압축된 삶

시계

소장하고픈 사랑

by 위엔디
2015년 딸아이의 생일선물

운동회 날이었다. 아빠를 닮아 달리기를 잘했던 나는 매번 이어달리기에서 마지막 주자였고, 그날도 역시나 제 몫을 다 해냈다. 선생님들과 친구들의 감탄 어린 소리, 그리고 엄마, 아빠의 뿌듯한 미소. 들뜨지 않으래야 들뜨지 않을 수 없었던 운동회 날이었다.


"아빠! 이제는 내가 아빠보다 잘 뛸걸?"

"그래? 한번 시합해 볼까?"

"아 이제 아빠 정도는 가뿐히 이기지~"


그렇게 시작된 둘만의 달리기 시합. 아빠를 이기겠다는 일념 하나로 달렸지만 마음이 앞서서인지 다리가 따라가지 못해 그대로 넘어져 버렸다. 양쪽 팔이 다 쓸려나갔고 한쪽 무릎의 살점은 뭉텅 들려나갔다. 아빠는 어쩔 줄 몰라했고, 엄마는 그런 아빠에게 왜 괜히 달리기 시합을 해 애를 다치게 만드냐며 잔소리를 해댔다. 아빠는 내가 상처를 소독하는 내내 주위를 연신 맴돌며 멋쩍은 미소를 지었고, 나는 또 그런 아빠가 웃겨서 마냥 헤실거렸다. 흉터는 남았지만, 행복한 기억도 같이 담겼다.


사람은 행복한 기억보다 아픈 기억을 오래 가지고 간다고 했던가, 이날의 기억은 아픔에 담긴 기억이어서 오래 남았나 보다 생각했다. 이십 대가 가장 찬란한 시절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그래서일 수도 있겠다. 가장 아프면서, 가장 행복한 기억이라서.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에 가장 행복해서. 아픔에 행복이 같이 담겨있어서. 생각해 보면 아픔은 언제나 행복과 함께였던 것 같다. 행복했으니까 아팠고 아픔을 알기에 행복을 알았다. 그러니까 지금의 아픔도, 다가올 아픔도 행복하기 위한 아픔이라고 생각하자. 무릎에 남은 흉터를 보고 웃음 지었던 오늘 아침의 나처럼. 그렇게 또 오늘을 살아가자. [나와 꼭 30년 차이가 나는 큰딸의 최근 독백]



시계

아이폰 마니아인 나는 당연히 아이워치를 착용한다. 벨소리를 켜 두면 다른 사람에게 방해가 될 것 같아 휴대폰은 주로 무음이나 진동으로 설정해 놓는다. 그래서 중요한 전화나 문자를 놓치지 않으려면 휴대폰과 연동되는 워치가 필수적이다. 나는 몸에 장신구 걸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내게 있어 시계는 최소한의 치장이다. 2015년, 딸아이가 내 생일에 시계를 선물해 주었다. 고등학생이 무슨 돈이 있었겠는가. 값비싼 것도 아니었다. 3만 원 남짓한 저렴한 시계다. 그로부터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내가 아끼는 애장품 중 하나이다. 배터리가 다 소진되어 시침과 분침도 이젠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다. 그래도 가끔 눈에 띌 때마다 손목에 차 보곤 한다.


사랑스러운 이유

딸아이 어렸을 때, 두란노에서 하는 '아버지학교'를 수료했다. 매주 과제가 있었다. '아내가 사랑스러운 이유 20가지, 자녀가 사랑스러운 이유 20가지'를 적어내야 했다. '우리 딸이 사랑스러운 이유 20가지'를 이렇게 적었다.


1. 함께 놀이공원 가는 행복을 준다.

2. 현관에 들어서면 2미터를 날아올라 안긴다.

3. 아빠가 힘들어할 때면 아빠 손을 잡고 위로해 준다.

4.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문안전화를 드린다.

5. 용돈을 절약해서 엄마 선물을 사 온다(딱 1번)

6. 엄마, 아빠에게 감동적인 편지를 써준다.

7. 엄마, 아빠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8. 야단쳐도 금방 화가 풀리고 아빠 목을 끌어안는다.

9. 책 읽기를 좋아한다.

10. 동생을 잘 돌봐준다(백번중에 두 번)

11. 결혼 후의 아름다운 추억이 함께 담겨 있다.

12. 동네 어르신께 인사를 잘한다.

13. 맑은 웃음을 갖고 있다.

14. 아기를 좋아하고 잘 놀아 준다.

15. 아내의 모습이 아이에게 투영되어 있다.

16. 정직하고 순수하다.

17. 애교만점

18. '보물상자'를 숨겨두고 아무도 못 보게 한다.

19. 도화지에 엄마 아빠 동생 그림을 그린다.

20. 교회가기를 좋아한다.


우리 딸이 사라졌다.

그렇게 사랑스러웠던 우리 딸이 중학교 2학년 경(북한에서도 제일 무서워한다는 중2 사춘기), 한 순간에 사라졌다.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느껴졌다. 어떤 대화도, 어떤 교감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내에게 자주 이렇게 이야기했다. "우리 딸 어디 간 거야? 우리 딸이 없어진 거 같아" 갑짝스럽게 다가 온 변화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수년간 지속되었다. 이용규 저 '내려놓음'처럼, 딸이 '내 소유'가 아님을 내려놓아야 했다. 내려놓고, 내려놓고..... 이용규 씨가 두 번째 책이 나왔다. '더 내려놓음'.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내게는 '더 내려놓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딸아이의 시계선물은 내게 큰 의미가 있었다. 사라졌던(?) 우리 딸이 5%(?) 돌아와서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시계는 내게 '회복'이었고, 예전의 귀여운 우리 딸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일종의 사인(Sign)이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많은 시간이 흐르고, 어느덧 가정을 꾸릴 나이까지 되었다. 얼마 전 가족모임을 마치고 어스름한 골목길에서 딸아이와 헤어지면서 '우리 딸~'하면서 안아주었다. 이제 딸이 '사랑스러운 특별한 이유'는 없다. 그냥 사랑스럽다. 그리고 격려하고 안아주고 싶다.


가끔 또 다른 꿈을 꾼다. 우리 딸하고 똑같이 생긴 손주(손녀)와 손잡고 놀이공원 가는 것, 현관에서 2미터 날아올라 할아버지 품에 안기는 그 아이를 상상해 본다. 사랑하는 데에 무슨 이유가 있을까? 나그네와 같은 인생길에서 우리 모두가 격려하고 위로하며,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함께 걷는 동행자인 것을. 그 길 위에 함께 손잡고 걷는 아내가 있고 자녀가 있어서 오늘도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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