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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압축된 삶

살 빼셔도 되겠습니다

잘 들을게요.

by 위엔디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혈압약을 타러 병원에 가야 한다. 10여 년 전 어머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줄곧 약을 먹고 있다. 추석 연휴가 시작되기 전날이라 일찍 퇴근했는데, 하마터면 또 깜빡하고 그냥 집으로 갈 뻔했다. 추석연휴, 열흘 가까이 약 없이 지낸다는 건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다. 다행히 어제는 단축 근무 덕분에 진료 시간에 맞춰 병원에 도착했다. 혈압도 안정적이고 몸에 특별한 이상이 없어서 진료를 마치고 한 달치 처방전을 받았다. 주사 맞는 건 어른이나 아이나 다 싫은 법이다. 그런데 의사가 온 김에 독감 주사를 맞으라고 권유한다. 할 수 없이 팔을 걷어붙이고 간호사 앞에 앉는다. "따끔할 수 있어요. 오늘 하루는 샤워하지 마세요."


마치 숙제를 끝낸 기분으로 약국으로 향한다. 반갑게 맞이하는 약사에게 처방전을 내밀자, "지난달과 같은 약입니다. 불편한 점 없으시죠?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늘 친절한 젊은 약사다. 약이 금방 준비되었다. 약봉지를 건네며 웬일로 농담을 던진다. 반듯하긴 하지만 정해진 말만 하는 약사이기 때문이다. "복용은 동일하게 하시면 되고요, 살 빼셔도 되겠습니다."


'혈압이 비만에 안 좋긴 하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겸연쩍게 풋 웃으며 "네"라고 답했다. 그런데 약사가 순간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곧 카드 단말기를 가리킨다. '아! 카드 빼셔도 되겠습니다'라고 했구나! 내가 잘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내 웃음이 애매하긴 해서 잘못 알아들은걸 눈치는 못 챘을성싶다.


다이어트는 탄수화물 섭취를 줄여야지요. '빵'의 유혹


어느 예능프로그램에서 "고급 휘발유 넣어봤어?"라고 하니 "고도비만 되어 봤냐구요?"라고 되묻는 바람에 폭소를 자아낸적이 있다. 예전에는 '사오정 시리즈'라고 해서 말귀를 못알아들으면서 생기는 우스개를 개그소재로 사용하기도 했다.


군대 가기 전에 사실 걱정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명령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 어쩌지…'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초등학교 생활기록부에 얄궂게도 '이해력 부족'이라는 말이 자주 쓰여 있던 터라, 무의식적으로 '나는 남의 말을 잘 못 알아듣는다'는 강박관념이 생긴 듯싶다. 막상 입대하고 나니 '복명복창(復命復唱)'이란 것이 있어서 명령이 오해곡해(誤解曲解)되는 경우가 없으니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사소한 오해라 웃고 넘길 수도 있지만, 요즘은 조금만 잘못 받아들여도 금세 커뮤니티 속에서 확대 재생산된다. '고도비만 되어 봤냐고?'라는 웃음 속에도 우리가 얼마나 쉽게 말을 오해하고 단정하는지, 얼마나 작은 순간에도 감정과 판단이 왜곡될 수 있는지가 담겨 있다.

소셜미디어 속에서는 서로의 말이 조금만 삐끗해도, 확인 없이 퍼지고, 과장되고, 때로는 공격의 도구가 된다. 약국에서 '살 빼셔도 되겠다'라고 잘못 들은 것처럼, 우리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잘못 받아들이는 순간'을 만들어낸다. 조금만 귀를 기울이고, 확인하고, 맥락을 살핀다면, 소셜미디어 속에서도 커뮤니티를 부정적인 오해와 갈등이 아닌 이해와 공감의 공간으로 조금씩 바꿔갈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가오는 추석명절에는 가족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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