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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라인 공감 Jul 10. 2023

아무튼, 중국

2지망 인생이 프로 '자기돌봄러'가 되어 타지에서 살아가는 이야기

<2014년 10월 국경절의 인파>


그때는 그랬다.


1991년 가을, 고3 수험생인 나는 대학에 들어가 뭘 배울 것이고, 졸업을 하고 뭘 할 것인가에 대해 뚜렷이 아는 바도 없었고 그렇다고 그 길을 제대로 안내해 주는 선생님도 없었다.


"다음 55번!"

호명소리가 들리자 나는 교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교실에는 두꺼운 나무합판과 플라스틱 수납함이 연결된 책상이 60여장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바글바글했던 학생들은 사라진 텅 빈 교실에 나와 선생님, 단 둘이 책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대학 진학률도 중요하니까 학교는 XX대학으로 좀 낮추고, 전공은 경영학과라... 이거면 되는 것 같네. 그런데 2지망은 무엇으로 할지 정한건가?"

선생님의 물음에 선뜻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서울의 8학군 고등학교를 거의 1등으로 들어왔지만, 친구들과 유희를 선택한 댓가로 하락하는 성적을 붙잡을 수 없었던 나는 자신감도 떨어져있는 상태였고 대학은 가야겠지만 굳이 스스로의 진학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했을 때다.


"2지망이 뭔데요?"

"여기 떨어지면 다른 과라도 가야하자나, 아무거나 쓰면 돼."


짧고 명쾌했던 담임선생님의 말에 한 숨 돌리면서 물었다.


"54번은 뭐 썼어요?"

"중문과."

"그럼 저도 그걸로 써주세요."


그렇게 내 인생은 한 순간에 결정이 났다.

내 생각도 아니고, 선생님 추천도 아니고, 생각지도 못했던 54번 친구의 2지망 선택이 나에겐 그 이후 25년을 이렇게 살게 했다.


그 날 저녁 집에서 저녁을 먹던 나는 부모님께 학교에서 있었던 사실을 말씀 드렸고, 부모님께서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으시는 모양이었다. 왜냐면 학교를 낮춰서 지망을 했고, 당연히 합격을 할 것으로 믿으셨었으니까 말이다.


돌이켜보면 1991년의 가을의 그날은 내 인생을 그런 식으로 정한 하루였고, 100일주라는 것을 친구들과 마시고 일장춘몽에서 깨어난 나는 한 순간에 무언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참고: 당시에는 선지원 후시험 제도였고 그것을 대입학력고사라고 불렀다. 전기와 후기로 나뉘어 전기에서 불합격하면 후기를 다시 지원하는 방식인데, 지원에는 1지망, 2지망으로 나뉜다. 선지원 제도이기 때문에 지원한 대학교에 미리 가서 교수님들과 면접을 하는 시간이 있고, 선배들도 만나서 학교 및 전공에 대하여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눌 기회를 가진다. 그리고 그 해당 대학교의 정해진 강의실에서 지금의 수능과 같은 학력고사가 치러진다)


오지말기를 바랬던 1991년의 겨울과 학력고사는 무참히 나에게 찾아왔다. 시험공부도 중요하지만 미리 면접을 봐야 했기 때문에 나는 23번 좌석버스를 타고 신청한 대학교를 향했다.


"유엽아, 지금 온거냐? 얼른 가자 늦었네."


54번 친구가 버스에서 내리자 내 앞에 갑자기 나타나 말을 걸었다.

그랬다. 그 친구도 같은 학교에 원서를 냈고, 나와 같은 1지망 경영학과에 지원을 했다.

3학년 1학기에는 나보다 공부를 못했던 아이인데 방학 이후 급격히 성적이 올라서 결국엔 나와 같은 학교에 지원을 했던 것이다.


"면접이란게 뭐 있냐?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대... 이거 끝나고 떡볶이나 먹고 가자. 여기 진짜 많더라."


여유로운 친구의 목소리를 들으며 난 속으로는 수학공식과 영어단어를 외우고 있었다.


"너 2지망 중문과 썼다며?" 내가 넌지시 물었다.

"굳이 쓸 것도 없고, 경영학과 떨어지면 그냥 재수나 해야지. 누가 중국어를 배우겠냐? 쓸모도 없고."


아이러니해 질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나도 경영학과 떨어지면 그냥 재수나 할 생각이었고, 쓸모도 없는 중국어를 뭐 하러 배우겠냐... 이러면서.


면접일 다음날, 뜨겁게 달궈진 그 해의 입시 전쟁은 12월 강추위 속에서 흰 눈과 함께 끝났다.

그리고 나와 중국과의 인연은 1991년 12월 대입학력고사 시험일에 확실히 연결되었다.


1991년은 중국에게 새로운 변화의 시작이 있었던 해다.


내가 아무것도 모른 채 중국이라는 나라와의 인연을 나도 모르게 선택하고 있었을 무렵 중국은 1991년 개혁이라는 두 글자를 앞세워 경제팽창정책을 펼치기 시작했다. 1988년 시작한 치리정돈(治理整顿) - (개혁조정제도의 총칭으로 공산당정부 주도하에 경제에 간섭하면서 개혁의 기초를 만든다)을 통해 변화와 발전을 시키고 있었다.

1989년 천안문 사태 이후 경제성장률은 4.2%로 떨어졌었고 고도성장을 준비한 1991년에는 9.1%로 급상승 했으니 말이다.

한국의 1991년 인당 GDP는 7,523불(40위)로 국민소득 1만불 시대를 열기 위해 열심히 달려가고 있었고 앞에 뛰고 있는 일본만 볼 수 밖에 없었을 때였다. (참고로 1978년의 일본 인당 GDP가 8,547불이다) 1991년 당시 중국의 인당GDP는 355불(125위)로 작은 나라 부탄보다 낮은 순위에 올라 있었다.


그랬다. 우리에게 중국은 잘 알지도 못하는 부탄보다 못사는 나라, 우리나라와 멀고 먼 공산주의 나라, 노란 별 달린 빨간 국기와 녹색의 군복이 큰 땅을 덮고 있는 나라였다.

그러나 세계역사 중에서 중국이 전세계에서 가장 약했던 순간은 바로 어제까지였고 오늘부터의 중국은 매일 다르다. 거대하면서 두렵기까지 한 중국이라는 이 땅은 역사가 쓰여진 이후부터 한번도 약한 적이 없던 나라다. 단, 우리 경제가 성장했던 80년대 즈음의 중국은 잠깐 감기에 걸린 마라톤 선수였었을 뿐, 그 감기가 모두 나은 지금은 아직까지 쉬지 않고 뛰고 있는 것이다.


1992년 대만과의 수교를 끊고 중공이라고 부르던 중국과 수교를 맺었던 그 순간, 30여 년 전 그 해의 8월, 우리는 이미 더 이상 과거의 중국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1992년부터 이어진 나와 중국과의 인연을, 내가 겪은 일들을, 내가 느낀 감정을 글로 남겨보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지금도 중국은 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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