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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고영철 Dec 20. 2021

21세기 귀족(31)

원시 게르만의 토지사상(i)

당신은 신분제가 폐지되었다고 믿는가? 


사람이 다른 사람을 합법적으로 착취하는 제도가 완전히 사라졌다고 믿는가?

 

전혀 사라지지 않았다.

 

폭력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신분제도는 그 이름만 바뀌었을 뿐이다.

 

경제적으로 사람을 착취하는 '부동산제도'라는 이름으로.

 
  
  

- 프롤로그 -


지금까지의 카카오톡 브런치의 가장 큰 방향성과, 필자의 <21세기 귀족>의 방향성이 다소간 다를 것이다. 허나 브런치를 애독하는 독자들 중에 필시 깊은 학구열과 경제적 정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라 믿어 이 글을 올리는 바이다. 이 글 <21세기 귀족>은 필자가 지난 3년 간 개인적으로 연구해온 결과물이다. 


당신도 이 <21세기 귀족>을 통해, 오늘날의 부동산 기득권층이 꼭꼭 숨겨왔던 역사를 발견하길 바란다.



- 본문(31) : 원시 게르만의 토지사상(ii) - 


이제 눈을 돌려 유럽을 보자. 유럽인이 유럽인이기 이전에는 야만적인 원시 게르만인들이었다.


원시 게르만인들은 종교적으로 쓰이는 불완전한 문자인 ‘룬문자’외에는 체계가 잡혀있는 문자가 없었다. 후에 서로마를 멸망시키고 그들의 라틴문자를 배우면서 문자를 획득하였다. 따라서 약 5세기까지 특정한 법 제정 활동 등을 필요로 하는 성문법이 없었고, 그마저도 마치 그리스처럼 불문법의 법적 효력은 오랫동안 유효하고 인정되어 약 15세기가 넘어 근세에까지 유효했기에 성문법이 제정된 이후에도 거의 관습법에 뿌리 내린 민족이라고 볼 수 있다. 


2세기경 만들어진 '게르만인' 동상. 로마 등 동시대 문명국가의 복장과 비교해보면 매우 원시적이라는 것이 눈에 띈다.(photo : Bullenwächter.)



즉 기원전부터 이어져온 자신들의 전통, 정의관, 사고방식으로 아주 오랫동안 법률 생활을 영위해가던 사람들이었고 그만큼 그들의 본래적 토지사상을 오랫동안 존속시켰다. 이는 로마의 상속자가 되었음에도 옛 조상들의 법사상과 관습을 순식간에 모조리 갈아치우진 않았던 요인으로 크게 작용하였다. 이 덕분에 우린 그 토지사상의 점진적 변화 과정과 그 결과를 시대에 따라 세세히 포착할 수 있다.


약 300년간 이뤄진 게르만 대이동기에, 오랫동안 이동과 정착을 하는 그들의 생활은 단체적인 활동과 협력이 아니면 헤쳐나가기 매우 어려웠고, 때에 따라 정착하게 되면 황무지 개간에 필요한 노동력은 개인의 힘으로는 거의 불가능하기에 오랫동안 씨족(sippe, 집뻬) 단위로 단체 활동을 하였다.[1] 당연히 경작도 공동, 생산물의 분배도 공동의 차원에서 이뤄졌다.[2] 


이런 배경이 토지를 포함한 소유권사상의 전체적 배경이었다. 대부분의 물건이나 재산은 개인 혼자의 노력을 통해서 취득 될 수가 없어 소유권사상은 사회성을 매우 강하게 띄었다. 따라서 그들의 소유권사상은 “사회법적 관념(Sozialrechtliche Auffassung)”에 기반하고 있어서 소유권의 획득 및 행사에 절대성이 없었고 오히려 사회적 제약과 의무성이 있었다.[3] 


로마적 소유권은 단독적⋅절대적 소유권이었으나, 이에 비교하면 ‘게베레(Gewere)’라고 불리운 게르만 소유권개념은 제 3자를 배제하지 않는 높은 사회성을 띈 소유권이었던 것이다.[4] 게르만인은 토지를 완전히 자신의 소유라고 생각하지 않으니, 여러 재산 중에 토지를 가장 선호했던 로마인들과는 달리 가축을 가장 선호했다.[5] 간단히 말하자면 토지를 통해 얻는 재산적 이익은 로마와 비교하여 낮았던 것이다. 허면 게르만적 소유권사상 위에 토지사상은 구체적으로 어떠했을까. 자연스럽게 토지사상 또한 타인을 배제할 수 없는 공개념 위에 있었다.[6] 


로마에 비교하면 월등히 공개념의 색채가 아주 뚜렷하였기에, 절대적⋅배타적⋅개인적 토지소유권을 행사는 거의 없었다. 아주 대부분의 경우 씨족 단위로 토지를 점유하고 수익할 수 있는 권리만이 인정되었다. 그들의 고유법상 압류물은 동산에만 한정하며 무주물의 소유권은 선점자가 취득함에도 토지만큼은 씨족 등 단체에게 귀속시켰을 정도다.[7] 토지의 사유는 기원전에는 부분적으로만 확인될 뿐이다. 사유부동산일지라도 처분은 가족 단위에 구속 아래에 있었다.[8] 게다가 단체 경작과 공동 수익을 영위했기에 씨족장조차 토지의 처분을 함부로 할 수 없었다. 다만 생계가 매우 어려운 경우에만 토지 처분이 허용되었다.[9] 그리스처럼 말이다.


단편적인 예시를 들어 로마적 토지사상과 게르만적 토지사상을 비교해보자. 우리가 앞서 살펴보았던 2세기 로마의 법학제요 제 2권의 73 즉 ‘⋯지상물(地上物)은 토지에 따르기 때문이다’라는 조항과, 그들의 순수한 게르만적 토지사상과 그 생활상을 생생히 목도했던 로마 역사학자 타키투스(Publius Cornelius Tacitus, 56?~117)가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Germania)』에서 진술한 부분이 적절한 비교가 될 듯하다. 


오스트리아 빈 의회 앞의 '타키투스 조각상'(Jozef Sedmak/Shutterstock.com.)


건물과 택지(Haus und Hof)는 개별 소유의 목적이 되었으나 농경지는 촌락공동체의 소유로서 촌락단체가 농지를 단체성원의 지위에 따라 매년 분배하였다[10]


카이사르가 『갈리아전기(De bello Gallico, Der Gallische Krieg)』에서 게르만족 일파인 수에벤족에 관하여 기록한 바는 토지법제사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그들은 사유토지가 없고, 아무도 특정한 농지나 자신의 토지를 가지지 않는다(neque quisqaum agri modum certum aut fines habet proprios)”고 하였으며, 같은 맥락에서 당국이 인민들에게 농지를 매 1년간만 할당하였다고 관측했다.[11] 고로 원시 게르만인들에게 로마적인 토지와 그 소유권의 절대적 행사는 결코 있을 수가 없었다.


허나, 앞으로 확인하겠지만 로마 제국의 땅으로 이동해오면서 문화⋅교역⋅사회⋅제도⋅사상 등의 전면적인 교류와 도입이 이뤄져 명백하게 부동산제도의 ‘로마화’가 상당히 진행되었다. 끝내 로마화 되지 않은 부분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인데, 부동산 등기제도, 동산과 부동산의 구별 등 몇 가지만이 그에 해당했다. 대토지사유제와 토지양극화의 급속한 발달도 로마의 침공 이후에 시작되었다.[12]


 약 2백 년 전에 로마가 카르타고와의 충돌과 전쟁 중에 그들로부터 대토지농장제를 배웠듯이, 게르만인들도 로마와의 접촉 중에 그들로부터 이를 배웠다. 그 시작점은 오늘날의 프랑스인 갈리아 지역이었다. 반대로 로마 법제의 영향권에서 물리적으로 먼, 오늘날의 유럽 북부인 스칸디나비아 반도와 독일이 게르만적 법제의 흔적을 비교적 많이 살펴볼 수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도록 한다.


언급했듯 로마는 애당초 동산과 부동산을 같은 범주로 두었고 그리스는 후기로 갈수록 부동산을 동산과 같이 취급하는 경향이 생겼지만, 대륙의 게르만족은 오랜 시간이 흘러도 그 둘의 구분이 엄격했다.[13] 또 로마는 지상물 및 정착물은 토지에 따른다는 법리가 있는 반면에 게르만족은 로마법의 계승 전까지 두 물건의 접합 등으로 인해서 권리 상태가 변하거나 종속된다는 로마적 법리를 아주 오랫동안 받아들이지 않았다.[14]


로마적 토지사상과 토지제도를 이식 받기 이전에 그들의 본래적인 토지사상이 투영된 생활은 어땠을까? 이어지는 글에서 계속 확인하도록 한다.






이번 글에서는, 로마의 부동산제도를 상속받기 이전의 원시 게르만인들과 그들의 소유권사상과 토지사상을 일부 살펴보았다.


(1) 모든 재산에 대하여 그들에게 절대적/배타적/개인적 소유권 행사는 거의 있을 수 없었다. 가족 단위로, 부족 단위로 함께 평등하게 누리고 관리해야 한다는 사고방식이 지극히 정상이었다. 


(2) 특히 그와 같은 사회적 소유권은, 부동산에 대하여는 '강력한 토지공개념'으로 드러났다. 극단적이긴 하나 '매년 평등히 재분배'할 정도였다. 평등히 부동산을 누려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손가락질 당할 만한 것이 아니라 되려 법으로 강제해야 할 만큼 마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시 게르만인들의 토지공개념은 <21세기 귀족> 연재 대부분을 읽어온 독자들에게 매우 놀랄 정도는 아니다. 우린 앞서 고대 메소포타인, 고대 크레타/미케네 문명인, 고대 그리스인, 고대 로마인들도 상당한 수준의 토지공개념과 공평한 토지사상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허나 그들이 토지공개념을 점차 잃어버리고 부동산양극화가 극심해졌듯이, 원시 게르만인들도 로마의 부동산제도를 상속받음에 따라 토지공개념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다. 



References


[1] 현승종, 『게르만법』(박영사, 2001). 반면 손호은은 “게르만족의 민족대이동기의 생활상 고찰”(2009)에서 대가족 단위로 살지 않고 소가족 단위로 살았다는 이유로 씨족 단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2] 현승종, 전게서, 24쪽.

[3] Karl Kroeschell/양창수 옮김, “게르만적 소유권개념의 이론에 대하여”, 「서울대학교 法學」(1990), 205~207쪽.

[4] 김상용, 『토지소유권 법사상』(민음사, 1995), 35쪽.

[5] 박성순,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번역”, 「사학지」(1990.7), 210쪽.

[6] 김상용, 『토지소유권 법사상』(민음사, 1995), 35쪽.

[7] 김상용, 『법사와 법정책 게르만법사, 교육법사, 독일민법학사 중심』(한국법제연구원, 2005), 31쪽; 현승종, 전게서, 264쪽, 271쪽, 527쪽.

[8] 최종고, 『서양법제사』(박영사, 2011), 77쪽.

[9] 현승종, 전게서, 11쪽.

[10] Tacitus, Germania; 현승종, 전게서, 46쪽에서 재인용.

[11] Wolfgang Sellert/최병조 옮김, “독일법상 소유와 자유의 역사에 관하여”, 「법사학연구」(1993.12). 91쪽.

[12] E. Stevens, “Agriculture and rural life in the later Roman Empire”, pp. 118~119; 이기영, 『고전장원제와 봉건적 부역노동제도의 형성』(사회평론아카데미, 2015), 38쪽에서 재인용.

[13] 현승종, 전게서, 281쪽.

[14] 상게서, 3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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