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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기 Jul 09. 2022

학력과 학교 생활 적응, 선택의 문제일까?

  학년초, 초등학교 학부모 상담의 주제는 주로 ‘우리 아이가 학교 생활을 잘하고 있을까?’에 관한 것들이다. 이러한 얘기들을 나누는 까닭은 크게 두 가지 정도의 학부모 입장과 관련된다고 볼 수 있다. 먼저 굳이 학교에서 상담할 만큼의 고민이 없는 경우이다. 물론 자녀의 학교 생활에 대한 궁금증은 있겠지만, 그보다 상담에 대한 부담감이나 불편함이 더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학교로부터 학부모 상담 신청 안내장을 받긴 했는데, 크게 내키지는 않는 것이다. 하지만, 학년 초인만큼 담임 선생님께 인사는 드려야겠다고 생각한다. 자식 맡겨놓고 얼굴 한번 내비치지 않는 무관심한 학부모처럼 보여서는 안 되겠다고 여겼을 것이다. 우리 아이에게 설마 별일은 없겠지만, 혹시나 별일이 있는지 확인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아이에 대해 심각하게 파고들어 얘기를 나눌 생각까지는 없다. 설령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고 해도 학교에 뾰족한 해결책이 있을 것이라 크게 기대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사실 그 문제라는 게 있다 해도 심각하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기도 하다. 물론 심각함의 정도는 주관적이고 상대적인 것이겠지만, 사실상 관심과 이해의 영역에서 살펴야 하는 정도의 문제라는 의미이다. 정작 심각한 문제가 있는 아이의 학부모는 상담에 잘 참여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 결국 암묵적인 상호 합의의 선에서 대화할 수 있는 주제가 아이의 전반적인 학교 생활인 것이다.


  또 다른 입장은 아이러니하게도 학부모에게 가장 궁금한 주제이기 때문이다. 자녀에게 초등학교는 실질적이고 공식적인 첫 사회이다. 부모의 눈에는 아직 아기 같기만 한데, 어느새 사회의 일원이 되었으니 걱정과 우려가 앞서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우리 아이가 학교에서 잘 적응할까? 이는 초등학생 자녀를 둔 학부모의 가장 일반적인 궁금증일 수밖에 없다. 학부모 상담의 80% 이상은 이 주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나머지는 매우 다양하고 개별적인 주제이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범주화할 수 있는 주제가 있다. 바로 자녀의 ‘학력’에 관한 이야기이다. 주로 우리 아이가 공부를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우리 아이의 학력 수준이 어떠한지, 현재 상태가 괜찮은 것인지 궁금해한다. 대개 이러한 궁금증의 바탕에는 걱정과 불안이 자리 잡고 있다. ‘스마트폰을 자주 한다, 게임 시간이 많다, 유튜브만 보고 있다,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많다’등의 고민들은 결국 학력에 대한 걱정과 불안으로 연결된다. 즉, 학교 생활 적응에 대한 얘기를 조금 더 진지하게 들어가면 학력 얘기로 이어지며, 학력 얘기를 하다 보면 자녀의 학교 밖 일상생활까지 범위가 확장되기 마련이다. 


  결국 위에서 거론한 두 가지 상담 주제는 서로 연결된 이야기이다. 동일한 맥락의 주제라는 뜻이다. ‘우리 아이가 학교 생활을 잘하는가?’에 대해 심층적으로 얘기하다 보면 ‘학력’에 대한 얘기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면, 자녀의 학교 생활 적응과 학력, 더 나아가 자녀의 일상생활과 학력은 모두 같은 주제의 이야기이다.




  예전에 겪었던 학부모 상담 사례이다.

  초등학교 5학년 별이(가명)의 어머니와 전화 상담을 하였다. 별이 어머니는 몸이 불편하여 직접 학교에 오기 힘든 상황이라고 하였다. 가정의 경제적 상황도 무척 어려운 듯했다. 어머니는 별이의 학교 생활을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몇몇 아이들이 별이를 괴롭힐 것이라고 예상하였다. 아이들의 구체적인 실명이 거론되었다. 순간, 범죄 예측 시스템을 다룬 SF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가 떠올랐다. 별이 어머니는 현재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대해 미리 걱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별이에 대한 괴롭힘이 줄곧 있었거나 특정 사건으로 인한 트라우마가 피해의식으로 남았을 것이다. 별이 어머니에겐 이미 잠재적 학교폭력 가해자들이 있었던 셈이다. 별이 어머니는 말했다. 

  “별이는 무척 머리가 좋은 아이예요. 1학년 담임선생님이 그렇게 이야기했어요. 별이는 무척 똑똑하다고. 그런데, 주위 애들이 별이를 시기했는지 2학년 때부터 별이를 괴롭히는 애들이 있었어요. 그때부터 학교 공부가 부족해졌어요. 사실 전 초등학교 때 공부하는 건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해요. 별이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잘할 거니까요. 그냥 학교 생활만 잘하면 돼요. 아이들이 별이 괴롭히지 않도록 신경 써 주세요. 초등학교 때는 실컷 놀고 즐겁게 생활하는 게 가장 중요하잖아요. 전 다른 사람들처럼 공부 때문에 아이에게 스트레스 주고 싶지 않아요. 안 그래도 여러 가지로 많이 힘들어하는 아이라서.”


  전화상으로 한 이야기만 본다면, 어머니는 별이의 학력보다 학교 생활 적응에 더 관심이 많다고 할 수 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별이의 원만한 교우관계가 가장 중요해 보인다. 초등학교 때는 학력보다 학교 생활이 더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공부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려 노는 것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내 아이가 그저 즐겁게 생활했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별이의 경우는 당장 공부보다는 아이들과의 관계 개선이 더 시급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별이 어머니뿐만 아니라 학부모 상담에서 이러한 얘기를 하는 학부모는 의외로 많다. 아이의 학교 생활에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경우에도 이와 유사한 얘기를 하는 학부모들이 꽤 있다. 대개 이러한 학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대해 나름의 확신과 소신이 있다. 그리고 그들의 논리에는 학력과 학교 생활은 분리된 개념처럼 보인다. 


  별이의 학력 수준은 매우 낮은 상황이었다. 5학년 교육과정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물론 여러 원인들이 있을 것이다. 별이 어머니는 중요한 원인을 이미 알고 있었다. 별이 어머니의 말을 다시 살펴보면, 그 원인이 담겨있다. 2학년 때부터 별이를 괴롭히는 아이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별이의 학력이 부족해졌다고 이야기했다. 교우관계가 학력 저하의 원인 중 하나였던 셈이다. 별이의 교우관계 문제는 2학년 때부터 생겼다고 한다. 이러한 문제가 생겨난 까닭에 대해 별이 어머니는 주위 친구들의 시기猜忌라고 판단했다. 그 시기심은 별이의 똑똑함 때문에 생겼다고 한다. 친구들이 시기할 정도의 똑똑함은 어떤 것일까? 초등학교 시절에 친구가 똑똑하다고 해서 괴롭힌 적이 있거나 그런 상황을 목격한 적이 있는가? 물론 모든 경우에 예외적 상황은 있겠지만, 대개 똑똑한 친구들은 괴롭힘을 받기보다 친구들로부터 호감의 대상이 된다. 자의든 타의든 친구들 사이에서 리더 같은 역할을 맡기도 한다. 똑똑한데 비호감이라면, 똑똑함이 문제가 아니라 성격이나 태도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그런데, 사실 똑똑한 친구들은 자신의 성격이나 태도로 인해 괴롭힘까지 받는 상황에 처하지 않는다. 주로 괴롭힘을 받는다면, 똑똑함과는 거리가 먼 경우일 가능성이 높다. 물론 괴롭힘의 문제는 분명 잘못이고, 심각한 경우는 범죄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가해 행동을 옹호하거나 합리화할 의도는 없다. 괴롭힘의 문제를 섣불리 피해자의 능력 탓으로 책임 전가를 하려는 것도 아니다. 맥락의 핵심은 별이 어머니의 문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함이다.




  별이 어머니의 말을 다시 살펴보면, 별이의 머리가 좋아서 똑똑하다는 논리이다. 그리고 ‘똑똑함’은 ‘학력’과 동일한 의미로 생각하고 있다. 정리하면, 별이의 머리가 좋기 때문에 공부를 잘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학력의 결정론이다. 공부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타고나는 것이며, ‘좋은 머리’가 ‘학력’의 전제 조건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과정은 크게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어차피 ‘좋은 머리’는 과정이 크게 뒷받침되지 않아도 ‘학력’의 성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별이 어머니는 초등학교 때 공부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한다. ‘별이는 언제든지 마음만 먹으면 잘할 거니까요.’라고 말하고 있다. 머리가 좋아서 공부를 잘하니까 다른 친구들의 시기를 받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공부의 과정을 거치는 사람들에게 과정과 무관하게 결과가 나오는 경우는 시기심뿐만 아니라 열등감과 무력감을 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공부’의 ‘결과’는 과연 무엇일까? 도대체 어떤 ‘성과’들이 친구들 간에 차이를 만들고 시기의 대상을 만들어냈을까? 별이가 학교에서 ‘똑똑했다’는 때를 살펴보면,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별이 어머니는 별이의 똑똑함을 어떻게 알았고, 확신하였을까? 초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의 말을 통해서였다. 별이 어머니는 담임 선생님의 말을 듣고 별이의 똑똑함을 알게 되었다. 사실 ‘알게 되었다’기 보다는 ‘확인받았다’라고 하는 게 더 정확할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녀에 대해 ‘똑똑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유아 때부터 확연한 지체를 보이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는 자녀의 현재 능력이나 가능성에 대해 과대평가하기 마련이다. 누군가 이 부분을 지적하거나 냉정하게 판단하려 한다면 부모는 대개 서운해하거나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내 아이의 상태나 능력에 대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부모라도 막상 기대와 다른 얘기를 듣게 되면, 담담하고 겸허하게 수긍하기 어려워한다.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평가의 진위를 다시 살피거나 판단의 신빙성에 의문을 가지는 등의 방어적 태도를 드러낸다. 이는 자녀의 연령이 낮을수록 보다 뚜렷해지는 반응이다.


  자녀에 대한 객관적 평가를 맡은 이들은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렇다면, 자녀에 대한 평가를 처음 맡는 곳은 어디일까? 바로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다. 물론 다른 교육기관이 있었을 수도 있다. 개인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을 것이다. 그 차이가 무엇이었든 간에 미취학 자녀를 교육했던 곳들의 공통점이 있다. 이러한 곳에서의 교육은 의무가 아니라는 점이다. 앞으로 달라질 수는 있겠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의무교육은 초등학교 때부터이다. 부모가 자녀를 유치원에 보낸 것은 어디까지나 부모의 선택이다. 이 지점에서 오해나 착각이 발생한다. 이 오해나 착각은 대수롭지 않게 다루어지거나 아예 인식조차 못한 채 사라지기도 한다. 당장 내게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장의 피해는 없더라도 부지불식간에 문제를 키워갈 수 있다. 그렇더라도 이 오해나 착각을 주목하는 이는 거의 없다. 이것이 자신에게 닥친 문제의 원인인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설령 깨닫더라도 그 책임에 대해 부인하거나 회피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그 오해나 착각은 무엇일까?




  여러분의 아이는 부모의 품을 떠나 외부의 교육을 받는다. 그곳은 피아노 학원이나 미술 학원일 수도 있고, 문화센터의 유아 대상 수업일 수도 있다. 또한 종교단체의 유아 모임일 수도 있고, 집 근처 유치원일 수도 있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함께 특정 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부모의 마음은 벅차오르기 마련이다. 내 아이가 있는 공간을 창 너머로 하염없이 바라볼 것이다. 아이는 배움 속에서 변화하고 성장한다. 부모는 아이의 변화를 지켜보며 놀라고 감격한다. 이 과정에서 아이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다. 부모의 입장도 달라진다. 내 아이가 외부의 교육을 받는 순간, 부모는 학부모가 된다.


  학부모가 된다는 것이 특별한 수여식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누군가 학부모 인증서를 주는 것도 아니므로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각자 스스로 학부모임을 느끼고 깨닫는다. 그래서 학부모에 대한 자각은 지극히 개인적이고 개별적이다. 그 반면에 아이는 구체적인 집단에 소속되고, 교사 또는 강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전달받으며 학생으로 변화한다. 학생과 학부모는 동일한 교육 공동체이지만, 매우 상이한 과정을 겪는다. 특히, 아이의 입장에서는 초등학교 입학 전에 소속되었던 교육시설의 경험과 초등학교라는 공교육 기관에서의 역할을 상당 부분 유사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모는 다르다. 사교육기관에서 학생의 부모는 고객이지만, 공교육 기관에서 학생의 부모는 학부모이다. 학부모는 교사와 더불어 학생을 성장시키는 교육 동반자이다. 그리고 초등학교는 선택이 아닌 의무의 영역이다. 부모의 선택에 의해 자녀를 보내는 교육기관과 다를 수밖에 없다. 


  대부분의 부모는 미취학 자녀의 사교육기관에서 학부모로서의 의미와 역할을 (개인적이고 개별적으로) 형성한다. 이는 주변 학부모의 의견과 조언을 통해 구체화되는 과정을 거친다. 물론 이때의 부모들도 학부모이다. 하지만, 이때의 ‘학부모’는 대상을 지칭하는 인칭대명사이다. 역할로서의 ‘학부모’와 다른 의미로 봐야 한다. 이러한 용어의 ‘혼용’은 결국 ‘남용’의 결과를 낳는다. 바로 오해나 착각이 생기는 것이다. 


  ‘내 아이가 어느새 학원에 다니는 학생이 되었구나. 나는 아이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학원에 수강료를 지불하겠어. 이 학원은 내 아이의 성장에 도움이 되어야 해. 학원은 내 아이에게 가장 적합한 교육 서비스를 당연히 제공해야지. 나는 학원의 교육 서비스에 대해 일방적으로 요구할 권리가 있어. 만약 우리 아이가 불편하거나 어려움을 겪는다면, 나는 학원에 필요한 조치를 취하도록 요구할 거야. 적절한 시기에 내 아이에게 필요한 내용을 제대로 요구하는 것이 현명하고 슬기로운 부모의 능력이지. 나는 이제 학부모이니까 그 역할에 충실해야지. 학원은 내 아이의 잠재력과 가능성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어야 해. 그게 학원의 실력이고 역할이지. 내 아이의 능력을 발견하고 발굴하며 그걸 꺼내서 나에게 보여줄 수 있어야 해. 내 아이는 기본적으로 똑똑하고 무궁무진한 능력을 가지고 있으니까. 만약 내 아이에게 문제가 있다면, 우선 학원의 실력을 의심해봐야 해. 도대체 어떻게 지도했길래 내 아이의 능력이 제대로 발휘되지 않는단 말인가. 생각할수록 화가 나네. 이 부분에 대해 항의를 해야겠어. 그동안 학원에 지불한 돈이 얼만데. 이 학원은 우리 아이랑 맞지 않아. 다른 곳으로 옮겨야겠어. 주변 학부모들에게 정보를 얻어야겠는데. 정말 학부모 역할하기 힘들다.’


  미취학 자녀가 다니는 학원은 학생을 평가하는 곳이 아니다. 부모에 의해 이미 평가된 학생을 부모의 기대와 희망에 최대한 맞춰서 확인시켜주는 곳이다. 그래서 이러한 곳에서는 발표회나 대회의 상장과 같은 가시적인 성과가 필요하다. 부모는 이곳에서 겪었던 과정을 학부모의 역할로 인식한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면 부모는 이미 학부모의 경험을 가졌다는 오해나 착각 속에서 학부모의 첫 발을 뗀다. 초등학교 1학년 담임교사는 이러한 학부모를 대해야 한다. 물론 이를 일반화할 수는 없으나, 학급의 다수는 이러한 경우이다. 즉 1학년 담임교사는 다수의 경우에 대응할 수밖에 없다. 초등학교 1학년 학부모는 학교와 학급에 가장 많은 민원을 제기한다. 이들에게 학부모는 교육 동반자가 아니라 교육 서비스를 요구하는 고객과 같은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담임교사는 학생을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평가된 아이를 그저 확인하는 입장이 되어야 한다. 1학년 담임교사에게 우리 아이에 대해 묻는다면, 아마도 ‘똑똑하다’고 답할 것이다. ‘똑똑하다’는 가장 간명하게 대화를 마무리할 수 있는 편리한 말이다. 아이에 대해 긍정적인 피드백이면서 별다른 부연 설명이 없어도 구체적인 평가인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똑똑하다’는 학력이 낮거나 생활 태도가 좋지 않아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성적이 낮아도 ‘우리 아이가 머리는 좋은데……’라고 생각하고, 친구들과 다툼이 심해도 ‘우리 아이가 워낙 똑똑해서 다른 아이들과 의견 충돌이 많다’고 여길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아이에게 뛰어난 점이 있거나 심각한 문제가 있는 경우에는, 교사가 먼저 말을 건넬 것이고, 그 얘기는 결코 간명하지 않을 것이다.


  무엇보다 초등학교 1학년은 학력 평가가 없다. 사실 1학년뿐만 아니라 초등학교 전 학년을 대상으로 일제식 지필평가는 사라진 상태이다. 모든 학생이 주어진 시간 동안 함께 시험지를 푸는 방식의 평가를 공식적으로 하지 않는다. 물론 학교나 학급에 따라 수행평가의 한 형태나 자체적인 학력 점검의 의미로 할 수는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도 성적을 비교하거나 석차를 공개하는 등의 일은 없다. 특히, 초등학교 1학년 학생에게 ‘똑똑함’과 ‘학력’을 연결하는 것은 난센스이다. 그렇다면, 초등학교 학생에게 ‘학력’은 무엇일까? 예전과 같은 ‘시험’도 없고, ‘내신성적’도 없는 초등학교에서 ‘학력’은 무엇을 의미할까? 초등학교 때는 실컷 놀아야 한다는 얘기를 할 만큼 배제해야 할 ‘학력’은 대체 무엇일까? ‘학력’보다 더 중요한 것이 ‘학교 생활’이라는데, 그렇다면 ‘학력’이 낮은 학생이 더 ‘학교 생활’을 잘할까? 별이는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해서 ‘학력’이 낮아졌다는데, ‘학교 생활’ 이 힘들면 똑똑해도 ‘학력’이 낮아지는 것일까? ‘학교 생활’과 ‘학력’은 어떤 상관관계 또는 인과관계가 있는 것일까?




  초등학교는 학습에 있어 본질적인 역량을 기르는 시기이고, 우리나라 공교육 시스템 내에서 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기회이다.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고, 이러한 행동이 서로에게 민감하게 영향을 미치며, 학생 간 상호작용이 활발하게 일어나고, 이러한 활동 속에서 인간관계가 긴밀하게 형성되는 게 초등학교 수업이다. 학교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바 없는 물리적 조건이나 분위기, 행동이나 심리적 요인 등 학교 생활을 하는 동안 은연중에 갖게 되는 경험인 '잠재적 교육과정'이 가장 크게 영향력을 발휘하는 시기도 초등학교 때이다. 아이들은 학교 생활 속에서 서로를 탐색하고 이해하며 심리적 교류를 한다. 이러한 학교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관련된 모든 요소가 응축된 시간이 수업이다. 수업 태도는 각자의 학습 역량으로 이어질 뿐 아니라 각자의 성격과 특성을 규정하며, 학교(급) 내 관계의 결정적 요인이 된다.   


  초등학교 시기의 ‘학력’과 ‘학교 생활’은 어느 것에 보다 중점을 둘 것인지 고민해야 할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이 둘은 사실 같은 이야기이다. ‘학력’이 곧 ‘학교 생활’이며, ‘학교 생활’이 곧 ‘학력’이다. 비유적 표현도 아니고, 뜬구름 잡는 얘기는 더욱 아니다. ‘학교 생활’에 임하는 태도가 곧 ‘학력’의 수준이 된다. 이것은 학력에 대해 반드시 이해해야 할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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