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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혁기 Jan 17. 2023

법대로 합시다! _ 1

학교폭력 심의센터 이야기

  “어차피 여기서 제일 센 처분해 봐야 전학 정도 아닙니까!”

  피해 관련 학생의 보호자로부터 이러한 말을 종종 듣습니다. 그렇다면, 전학 조치가 약한 처분일까요? 전학 조치는 가해학생에 대한 선도‧교육 조치 중 8호에 해당합니다. 가해학생 조치는 1호부터 9호까지 있는데, 그중 9호 조치는 퇴학 처분입니다. 퇴학은 고등학생인 경우에만 가능하고, 실제로 결정되는 사례도 거의 없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의 취지가 학생의 인권 보호와 건전한 사회구성원 육성을 돕는 데 있으므로 학생의 신분을 박탈한다는 건 보기에 따라서 본질에서 벗어난 결정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심의위원회에서 퇴학 조치는 매우 어렵고 부담스러운 처분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하면 8호 전학은 상당히 중重한 처분이면서 사실상 가장 높은 조치라고 볼 수 있겠죠. 그래서 심의위원회에서는 8호 조치를 내리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까 앞에서 소개한 보호자의 말은 심의위원회에서 할 수 있는 조치라는 게 가장 높은 수위라 봐야 전학이고, 실제로는 그보다 약한 조치일 뿐이라는 답답함과 서운함을 나타낸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심의위원회의 조치가 사안에 비해 현실적이지 않고, 실효성이 적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이러한 말을 하는 보호자는 과연 어느 정도의 가해 조치를 바라는 것일까요? 가해 관련 학생에게 얼마큼의 처분이 내려져야 현실적이고 실효성 있다고 받아들일까요?




  심의위원회에 참석한 피해 관련 학생이나 보호자에게 바라는 점이나 요구 사항을 물어보면 대개 다음과 같이 답변합니다. “더 이상 그 애와 학교에서 마주치고 싶지 않아요. 앞으로 그냥 안 봤으면 좋겠어요. 그 학생을 전학 조치해 주면 좋겠습니다.” 이러한 요구대로 조치한다면 학교폭력 가해학생은 대부분 전학을 가야 할 지경입니다. 피해 관련 학생, 특히 보호자들은 상대 학생에 대한 전학 조치를 결코 높은 처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전학은 상대에게 취해야 할 기본적인 조치정도로 여기는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예방법에 더 높은 수위의 조치가 있다면 얼마든지 그러한 조치를 함께 요구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상대방에 대한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가해학생이 심의위원회라는 과정을 거치면서 학교폭력에 대한 경각심을 갖고 반성하기를 바란다고 말합니다. 그저 가해학생에게 사안을 돌아볼 기회를 주기 위해 심의위원회를 요청했다고 합니다. 충분히 수긍할 만한 이야기이고, 기꺼이 공감할 만한 의도라 여겨집니다. 그야말로 경각심을 가지거나 반성해야 할 사안이라면 심의위원회가 이러한 역할을 갖는 것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사안의 경중을 누가 판단하고 어떻게 결정할 수 있을까요? 모든 사안은 당사자에게 중차대한 일입니다. 심의위원회가 당사자의 기준과 입장에 의해서만 요청되고, 그저 가해학생에게 경각심과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 열려야 한다면 상당한 행정력을 소모해야 하는 비효율적인 방식일 수밖에 없습니다. 의미 있는 사회적 비용이라면 부담해야겠지만, 과연 그만큼 의미 있는 일인지 따져봐야 할 일입니다. 더군다나 심의위원회에서 상대 학생의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고 말하던 분들도 막상 조치 결정이 이뤄지면 다른 태도를 취하기도 합니다. 피해학생 측은 상대 학생의 조치 결과에 수긍하지 못하고, 가해학생은 본인의 처분에 억울해하거나 반발하기도 합니다. 이러한 모든 경우들을 감안한다면 피‧가해학생에 대한 조치의 정도나 추가를 적극적으로 논의하고 모색해야 하겠죠. 그러면 다시 같은 질문과 마주하게 됩니다. 과연 얼마큼의 조치를 하면 많은 이들이 동의하고 수용할까요? 또 다른 질문도 생깁니다. 그나마 절충안을 마련하더라도 그 조치가 안정적으로 지속될 수 있을까요? 과연 완벽한 조치라는 게 있을까요? 질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추가된 조치가 이루어질수록 또 다른 단점을 발견하거나 새로운 부작용이 일어나진 않을까요? 그리고 가해 조치가 사람들에게 익숙해질수록 처분의 권위나 효과는 약해지지 않을까요? 마치 내성이 생기듯 말이죠. 그때는 더 강한 가해 조치를 고민해야 할까요? 


  프랑스의 사상가 몽테스키외(1689~1755)는 그의 저서 「법의 정신」에서 ‘무거운 벌에도 익숙해져 버린다. 그리고 무거운 벌에 대한 두려움이 줄어들어 머지않아 더욱더 무거운 벌을 설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처벌이 강해진다고 하여 범죄를 감소시키지 못한다는 법학계 연구 결과도 있습니다. 한쪽 입장이 맞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이러한 측면도 분명히 고려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무엇보다 조치 유형이 많아지고 조치 대상자가 늘어날수록 공정성의 시비도 함께 급증하지 않을까요? 전문적인 법조인들이 판결하는 법원에 대해서도 사람들의 이해와 지지를 폭넓게 얻기 쉽지 않은데 학교폭력예방법에 따른 심의위원회의 판단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오죽할까요? 심의위원회의 전문성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에서 비롯된 현실적 문제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심의위원회에 대한 사람들의 신뢰도 점차 낮아지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심의위원회의 존재를 부정하면 학교폭력 예방과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학교폭력에 대해 그나마 마련한 법적 보루와 행정적 마지노선을 속절없이 폐기해야 할까요?




  심의위원회가 학교폭력의 유일하고 완벽한 해결책이라 말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심의위원회를 홀대하거나 불신하다 보면 기껏 쌓은 학교폭력의 성벽을 스스로 허물어버리는 셈일지도 모릅니다. 학교폭력으로부터 학생들을 보호하여 건강한 학교생활을 하도록 우리 사회가 쌓은 성벽 말입니다. 심의위원회는 학교폭력에 대한 우리 사회의 숙고로 만들어진 것이며, 지속적으로 보완해야 할지언정 함부로 내칠 수 없는 ‘현재’의 방책입니다. 그렇다면 심의위원회의 조치를 탓하는 사람들에게 다른 질문부터 먼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피‧가해학생 조치의 내용과 방식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조치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입니다. 더 정확하게 말한다면, 심의위원회에 대한 사람들의 인식은 어디에서 비롯되고 어떻게 형성되는가,라고 하겠습니다. 사안 관련 보호자들이 심의위원회 조치에 불만을 가지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심의위원회 조치에 대한 불신은 어디에서 비롯되는 것일까요? 더 나아가 심의위원회 자체에 대한 무용론無用論마저 생겨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심지어 가해학생에 대한 처벌을 바라지 않는다던 사람들조차도 결국 조치에 불복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가해 조치를 원하지 않음에도 애초 심의위원회 개최를 요청한 의도는 무엇일까요? 그저 가해학생에게 반성의 기회를 주기 위해 심의위원회를 요청했다는 이들은 당초 심의위원회에 대해 어떻게 이해하고 있었던 것일까요? 




  사람들 사이에 ‘법대로 합시다!’와 같은 인식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무슨 말이냐고요? 사람들 간의 갈등이 있을 때, 흔히 이런 말을 하거나 듣곤 하죠. “그래, 좋아. 법대로 합시다.” 보통 이런 말도 같이 합니다. “어디 끝까지 한번 가봅시다.” 또는 “갈 데까지 가봅시다!” 속된 말로 끝장을 보자는 것이죠. 사람들은 본격적으로 시비를 가리고 제대로 다툼을 할 때, 주로 법을 찾습니다. 법이 갈등을 공정하고 합리적으로 심판할 것이라는 사람들의 공감대와 믿음을 얻었기 때문이겠죠. 이러한 점은 법의 순기능이라 말할 수도 있겠네요. 그렇더라도 법으로 끝장을 보는 상황이 되지 않는 게 가장 좋을 겁니다. 사람들이 서로 화해나 합의 또는 조정을 하지 않고 굳이 법에 의지하려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소모적인 논쟁이나 분쟁을 지양하고 검증된 체계에 의해 처리하려는 목적이 있을 겁니다. 이에 우선한 일차적인 의도는 개인 간에 갈등을 해결할 수 없었기 때문이겠죠.


  물론 사람들이 해결을 위해 들인 시간과 노력의 정도는 저마다 달랐을 것입니다. 좀 더 솔직히 생각해 볼까요? 사람들 간의 일반적이고 일상적인 다툼에서 법을 이야기할 때, 사람들은 법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기대하는 것일까요? 그보다는 상대에 대한 분노와 적의敵意가 더 크게 작용하지 않았을까요? ‘누구의 잘못인지 확인해 보자, 난 분명히 당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한다.’라는 심리가 있을 겁니다. 단지 시비를 가리는 데서 그치지 않습니다. ‘내 생각대로 당신의 잘못이 맞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라는 심정도 함께 있을 겁니다. ‘경찰에 신고한다.’거나 ‘법원에 고소할 거야.’라는 말들은 이러한 당사자의 감정과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죠. 법은 사람들의 복수와 응징의 의사표현이자 가장 현실적인 실천 방법입니다. 자신의 울분을 법이라는 권위와 권력에 기대어 표출한다고 볼 수 있겠죠. 법이 공정하고 합리적일수록 그 권위와 권력은 더 커지고 공고해지겠지만, 설령 부족하더라도 당사자에게 크게 문제 될 건 없습니다. 상대에 대한 분노와 적의로 가득 찬 이들이 당장 법을 찾는 건 그 법의 공정성과 합리성을 떠올린 게 아니니까요. 앞선 이야기의 반복이지만, 일반적 다툼에서 사람들이 법을 이야기하는 건 복수와 응징을 위해 접근 가능한 가장 현실적인 권위와 권력이기 때문입니다. 


  법의 권위와 권력은 기본적으로 자력구제 금지의 사회 원리에서 나올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고 있기 때문이죠. 개인 간 갈등 해결의 판단과 처분을 법에 위탁하고 있는 셈입니다. 이러한 역할을 하는 곳이 법원입니다. 법의 실체는 법원이라는 건물과 그 속의 구성원을 통해 보입니다. 법원 건물과 법조인이 법 그 자체일 수 없겠지만, 결국 사람들에게 직관적이고 직접적으로 법과 동일시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러한 법원을 일상적으로 접할 일은 별로 없죠. 말하자면 평소에 법원은 우리에게 별개의 존재입니다. 언뜻 사소해 보이는 이러한 특성은 법의 권위와 권력을 만드는 하나의 요인이기도 합니다. 재판을 받으러 법원에 간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면 수사를 받으러 경찰서나 검찰청에 갈 수도 있겠죠. 어떤 기분이 들까요? 대부분 긴장감이나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까요? 어색함이나 호기심이 들 수도 있겠죠. 이러한 기분이 드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일단 법원이 익숙하지 않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거리감은 적어도 권위와 권력의 인상印象을 만들어줄 수는 있죠. 모든 이들에게 친숙하지 않고 비일상적일수록 인상의 효과는 더 커지겠죠. 어쩌면 권위와 권력은 그 실체보다 인상에서 비롯되는 게 더 클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는 상대에 대항하거나 공격할 수단으로 쉽게 활용됩니다. 당장 경찰서 가자거나 법원 판결받아보자는 얘기가 나오는 것이죠. ‘법대로 합시다!’가 되는 겁니다. 다시 말하자면, 이때의 법은 화해나 해결의 제스처라기보다 분노와 응징의 표현에 가까운 것입니다. 누군가에게 사과를 하거나 누군가를 용서하고자 함이 아닌 겁니다.




  학교폭력에 있어서도 비슷한 양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학교폭력을 법으로 규정하면서 건조한 절차와 냉정한 조치만 남겨지고 있습니다. 그 실체와 본질과 상관없이 사람들에게 그렇게 인식되고 활용된다는 의미입니다. 학교폭력은 범죄나 처벌의 문제이기 이전에 생활교육과 관계개선의 영역입니다. 학교폭력이란 용어는 학교에서 일어난 폭력이기도 하지만 결국 학교에서 배워야 할 해결의 방법과 태도라는 정체성이기도 합니다. 모든 법의 취지와 정체성도 그러했겠죠. 하지만 ‘법’이 되는 순간, 현실은 달라지는 모양입니다. 학교폭력예방법 앞에서 사람들은 서로에게 손을 내밀기보다 더 빠르고 간단하게 등을 돌리곤 합니다. 화해보다는 서둘러 처벌하기를 바랍니다. 집단이나 사회 안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갈등에 대해 슬기롭게 해결할 역량이나 현명하게 마주할 태도를 갖추기보다 제거하거나 박멸해야 할 대상으로만 인식합니다. 그저 ‘본인’으로부터만 제거하면 되고, 강력한 처벌을 통해 박멸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학교는 지도하고 조력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처리해야 할 업무로서 학교폭력을 접근하게 됩니다. 인간적으로 바라보고 공감하며 함께해야 할 일이 행정 업무의 하나로 취급될 수밖에 없는 건 모두에게 불행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흐름과 결론을 알든 모르든 당사자에겐 법이 더 반갑고 다행스러울 것입니다. 자신의 어려움을 알릴 곳이 명확하고, 어쨌든 체계적으로 처리되며, 가시적이고 즉각적인 처분이 이루어지니까요. 과정과 결과에 대해 원망하고 항의할 공식적인 부서나 기관도 생기니까요. 그래서 사회는 자꾸만 법을 만들겠죠. 최소한의 기준과 방식에 조금이나마 안도하고 그렇게라도 일단락해두고 싶으니까요. 근시안적이라거나 어쩌면 이기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사자에겐 어쩔 수 없는 일일 것이고, 그 어쩔 수 없음에 대해 함부로 말할 수 없기도 합니다. 당장의 사안 해결도 마땅히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그렇다고 이대로 놔두는 게 맞을까요? 학교폭력의 ‘법대로 합시다!’ 현상은 점차 심해져 가는 것으로 보이거든요. 학교폭력예방법의 제정과 시행을 지나 보다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적용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갑자기 이상한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닙니다. 앞에서 설명했듯 학교폭력이 일반적인 법의 양상과 비슷해지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2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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