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함이라면 다시 한번 더 생각하고 말하라.
살다가 불합리한 일을 보게 되는 일은 너무너무너무 많다.
사람에 따라 그 불합리한 일에 대해 억울해하거나 분노하거나 직접 응징하겠다고 나서거나 법적인 방법을 동원하거나 다양한 리액션을 취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일견(?) 성격이 까칠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나 같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일단 내가 본 불합리를 그저 스쳐 지나가는 짓, 이른바 내 일이 아니니 못 본 척 그냥 지나가겠다고 하는 짓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것이 잘못이라는 것을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일에 아무렇지도 않게 외면하고 산다.
자신의 목에 칼이 들어오고, 자신이 그 억울한 일로 피해를 입고 가족이 위기에 처해서야 발을 동동 구르며 도움을 청하지만, 그 곁을 지나는 이들은 이미 과거에 그가 했던 마음가짐과 행태를 고스란히 비춰주는 거울처럼 굴뿐임을 뒤늦게 깨닫게 된다.
다소 무거운 이야기일 수도 있지만, 최근 효과적인 말하기에 대한 기술과 관련된 전문서적을 읽는 아들 녀석을 보면서 한 번쯤은 이런 글을 남기는 것도 필요하겠다 싶어 펜을 들었다.
말하기, 다시 말해 설득의 기술은 자신의 의향을 효과적으로 관철시키는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필수불가결한 수단 중 하나이다.
예컨대, 아주 사소한 것에서는 엄마가 밥을 먹지 않겠다는 아이에게 밥을 먹이는 것이 그러할 것이고, 그 아이가 좀 커서는 공부를 하지 않겠다는 아이를 공부에 마음을 두게 하는 것이 그러할 것이며, 어렵다고 돈을 꾸어가 놓고서는 오히려 배 째라 돈을 갚지 않는 자에게 내 돈을 받아내는 것이 그러하며,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경우에 상대를 설득하는 경우가 그럴 것이고, 나는 아직 사랑하지만 나를 사랑하지 않겠다고 그만 떠나가겠다는 사람을 설득하는 데에도 효과적인 말하기는 매우 주요한, 어쩌면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 것이다.
길을 지나가는데, 내 앞을 떡하니 가로막고 있는 이에게 지나갈 수 있게 비켜달라고 하는 발화행위가, 일반적으로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생각될 수 있지만, 상대가 꼴통이거나 시비충이거나 상대가 바로 앞에서 다른 어떤 특수한 상황에 맞닥뜨려 내 말을 듣지 않는 상황 등이 펼쳐진다면 그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발화조차도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은 지극히 농후하다.
최근 들어, 잘못된 일들을 바로잡으려고 꾸짖는 정도를 넘어서 언성이 매우 높아지는 것이 습관화되었는지 나도 모르게 조금만 잘못되었다 싶은 것을 보게 되면 언성이 쉽사리 높아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곤 씁쓸하게 웃는 게 웃는 표정이 아니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물론 누구에게나 화를 쉽게 내고 맞짱을 뜨겠다며 날뛰려는 성향이 아닌 이상 이러한 행위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기 쉽고, 무엇보다 결과적으로 자신의 정신건강을 해치는데 아주 효과적(?)이라 경계해야만 한다.
공자가 말하길, '군자는 화를 옮기지 않는다.'라 하였다.
다른 일 때문에 화가 났다고 해서,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해서, 아무 상관없는 이에게 그 화를 옮기는 것은 군자로서, 아니 군자가 아니라 하더라도 군자를 지향하고나 하는 '사람'으로서 취해야 할 스텐스가 아니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 싶은 부분은 그것이 도덕적인 부분만을 강조한다고 당신이 이제까지 착각했던 이른바 '공자왈'에 기초한 뜻이 전혀 아니라는 점이다.
2년여간 브런치에서 <논어 풀어 읽기>를 강독하면서 누차 설명했지만, 공자는 뜬구름 잡는 식의 이야기를 싫어한 지극히 현실주의자였다. 다만, 머리가 그가 늦춰준 속도에도 따르지 못하는 찐따들이 그의 말귀를 이해하지 못하고 제멋대로 규정지었을 뿐이다.
발화를 하는 목적은 분명하다.
내가 원하는 바가 분명하다면,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임을 알면서, 오히려 상대방에게 반감을 부추길 것이라는 점을 알면서 그렇게 말할 사람이 있을까?
대개 어리석은 자들이 감정에 휩싸여 그저 상대의 감정에 생채기를 주겠다고 내뱉는 말들이 그러할지는 모르겠으나 감정적으로 화가 치밀어도 냉정하게 볼 때, 상대에게 발화를 통해 내가 원하는 바를 관철하려면 내 감정이 흐르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움직일 수 있도록 발화하는 것이 맞다.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한 아이가 밥이 아니라 맛있는 군것질을 먹겠다고 드러눕고 난리를 친다고 해서 그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때리거나 하는 것이 그 아이가 군것질을 포기하고 밥을 먹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 생각한다면 소리 지르고 때리면 된다.
내가 비리 경찰이나 썩은 공무원들, 혹은 매너리즘에 빠져 자신이 마치 그 회사를 대표한다고 착각하며 거들먹거리는 CS팀의 전화상담원들을 혼내는 이유는 내가 그들보다 훨씬 상위에 있음을 그들에게 자각시켜 그들을 밟는 것으로 내 쾌락을 극대화시키고자 함이 아니다.
결국 그들이 자신의 입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그들이 인정하지 못하겠다면 그들의 상관이나 상위 기관을 통해 그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인지하고 다시는 그따위 짓거리를 하지 못하도록 그들의 존재하지도 않는 양심이라는 곳에 각인을 하고자 함이다.
그들은 나 같은 캐릭터를 처음보고 처음 당하는 일이겠으나 나는 그런 캐릭터들과 그런 행태와 그들의 워딩이 매번 반복된다. 그러니 얼마나 더 짜증스럽고 그 동일한 루틴을 반복해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얼마나 크겠는가?
그래서 언제나처럼이긴 하지만, 나는 처음엔 아주 정중하고 낮은 자세로 그들에게 묻는다.
"나는 이런 일이 처음이 아니에요. 그리고 당신이 이러이러한 이유로 잘못한 거예요.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나는 일이 커지길 바라지 않아요. 지금이라도 당신이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원만하고 기분 좋게 문제를 해결했으면 좋겠어요. 만약 당신의 재량권 밖이라면 수순을 따라서 내가 협조할게요."
이런 나의 태도에 그들이 어떻게 반응했을 거라 생각하나?
거의 100% 그들은 콧방귀를 뀌고 비웃으며 자신도 이런 진상이 처음이 아니라고 행간에 대고 소리친다.
결국 중간 관리자급 이상으로 올라가거나 서장실에 불려 오거나 감사실에 정식 감사가 시작된다는 통지를 받게 되거나 조금 더 심해서 소장을 받게 되면 그제야 그들은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렇게까지 하실 건 없잖아요."
아니.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 제발 나에게 이 짓을 반복하지 않게 해달라고.
물론 경찰, 공무원, 공기업 등 자신들이 한 번도 잘못이 지적당해 무릎을 꿇어보지 않은 자들의 반항을 거세고 질기다. 그런 자들과의 싸움은 에너지는 물론이거니와 시간과 비용이라는 대가를 감수해야만 한다.
얘기가 삼천포로 흐르기 전에 다시 본래의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내가 상대에게 원하는 바가 있을 때, 상대의 마음을 움직여 내가 원하는 바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를 굴복시킬 엄청난 권력이나 경제력보다는 그에게 공감을 얻어내는 편이 더 상위의 해결책에 속한다.
여기서 '상위'라는 표현은 그들을 억누를 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지고 밟으면 상당히 빠르고 편하게 일처리를 할 수 있겠으나 언제나 뒤끝이 남거나 뭔가 대가를 치르고 얻어냈다는 찜찜함이 남는다. 그래서 상대가 '기꺼이' 혹은 '내키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정도로 상대를 행동하게 만들려면 상당한 수 읽기와 노력이 필요하다.
중요한 것은, 거기에 감정은 그 어떤 의미에서도 좋은 시너지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괘씸하지. 꼴 보기 싫지. 그냥 한번 버르장머리를 이참에 고쳐줘야지 싶디.
그렇지만 그런 감정들이 앞서는 순간, 아무리 머리가 나쁜 짐승 수준의 것들도 그것을 본능적으로 눈치챈다. 내가 반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들에게 욕을 한 것도 아닌데, 나와 5분도 이야기를 하지 않은 이들이 자칭 그 바닥에서 눈치가 빠르다는 것들일수록 뭔가 불쾌하고 자신을 밟고 올라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는 피드백을 듣게 되는 경우는 내가 그들에 대한 감정을 모두 갈무리하지 못한 경우에 해당한다.(물론 그것도 거의 고의성이 다분한 탓이긴 하지만)
전에 한번 변호사 친구의 말을 인용한 바 있듯이 그것은 양날의 검이다.
"아니. 경찰에게 고소하고 경찰이 수사권을 검찰에게서 빼앗아 와서 지들이 득의양양해하는데, 걔네를 혼쭐 내고 후려쳐서 반감을 조성하면 교수님이 원하는 바를 이루실 수가 없잖아요. 안 그래요?"
맞는 말이다.(이렇게 말하지만 할많하않.)
내 기분이 편하자고 하는 발화라고 하더라도 결국 내 발화가 혼잣말이 아니라 상대가 있는 '대화'라면 당연히 발화의 목적성이 있기 마련이다.
상대가 반감을 갖지 않고 내 말에 따르게 하거나 조금 더 깊이 들어가 상대에게 내 진정성이 전달되지 못해서 내 진심이 그것이 아닌데 상대에게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자꾸만 일이 꼬이게 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발화자의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말하기 훈련으로만 극복될 문제가 아니다.
테크닉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가짐의 수양의 문제라는 의미이다.
내가 원하는 바가 무엇이고 상대가 반발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한 번도 훑어보지 않고서 내 감정의 흐름대로 분출해 버리게 되면 일단 그 '대화'는 의미가 없어진다.
최대의 효율을 누리기 위해서는 무조건 적게 말한다거나 용건만 말한다거나 하는 저급한 수준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다.
말을 내뱉기 이전에 내가 왜 그 말을 하려는지 생각하고 구상하고 계획해야 한다.
어찌 보면 이 간단해 보이는 과정은 모든 협상가와 탁월한 역사적 정치가들에게 수십 년에 걸친 경륜으로 완성된 발화형태로 확인된다. 그리고 그들의 연설에서 묻어나는 증거로 증명된다.
알지도 못하면 실행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머리로 알고 있다 하면서도 제대로 실행하지 못하면 그것은 수행이 부족한 탓이다.
한번 실수하면 실수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사람들은, 사회는 그것을 실수라 말하지 않는다.
당신이 지금 무엇을 위해 말하고자 하는지 생각하고 나서 말하는지 자문해 보라.
그리고 끊임없이 수정해 나가라.
감정에 휘둘려 목적을 그르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늘 경계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