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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검무적 Sep 02. 2024

어느 아버지의 죽음

기레기들이 왜 이런 기사를 냈을지를 생각하고 읽는 이들이 꼬옥 있기를..

지난주에 아주 슬픈 기사를 하나 접했다.


https://www.dailian.co.kr/news/view/1401031


검색해 보면 알겠지만, 어느 이름 없는 인터넷 매체에 하나 딸랑 나온 게 아니라 조선일보까지 받아쓰기를 하며 온갖 매체에 도배를 기사였다.


왜 이런 기사를 기레기들이 냈을까?


25년이나 자기 딸 하나 찾자고 울며불며 모든 행복을 포기하고 일생을 바친 아버지의 절규를 그가 불의의 사고로 저 세상에 가고 나서야 뉴스로 내는 저의가 무얼까 먼저 화가 났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부아는 나중에 치밀어 올랐던 것 같다.


그 아버지가 마지막 숨이 끊어지기까지의 거친 숨소리가 내 심장 가까이에서 울리는 것 같아 가슴이 아파온 것이 먼저였다. 


25년 전 그가 40대였을 시기, 17살의 딸아이가 갑자기 실종되고 그가 겪었을 슬픔과 분노에서부터 딸을 잃어버린 슬픔에 우울증이 와서 먼저 세상을 떠났던 딸아이의 엄마이자 아내의 사고까지 겹쳐 보내고 일흔이 넘도록 자신의 일생을 꼬박 딸아이를 찾기 위해 악에 바쳐 하루하루 연명했던 그가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나며 얼마나 억울했을까를 생각하니 숨이 제대로 쉬어지질 않았다.


가족이 무엇인가?


결혼을 하지 않는다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고 사회적으로 국가적으로 전 세계적으로 말들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고 자기 자식을 낳는 것은 자기 혼자만 살면 경제적으로 훨씬 돈이 덜 들고 훨씬 효율적(?)으로 살 수 있음에도 그저 종족 번식을 하겠다는 본능 때문에 그러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안다.


남들이 다 하니까 쳐지기 싫어서 결혼을 하는 한때의 치기 어린 마음이 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결혼을 결정하고 가족을 이루고 아이를 낳아 기르는 것의 주된 이유일 수는 없다.


내 아이가 행복하기 위해 내가 힘들고 불행해지면서 그럴 수 있다는 모순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일반론적인 가족가치관에 부합하는지는 모르겠으나, 가족은 모두가 함께 행복할 때만이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이 나의 소박한(?) 가족관이다.


누군가는 25년이나 아내가 우울증으로 죽어가는대도 그저 모른 척하고 오기와 악에 바쳐 그저 인생을 허비한 것 아니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실종된 딸아이 때문에 가족이 모두 파멸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고 손가락질을 할지도 모른다.


그에게 실종된 아이 말고 다른 아이가 있었더라면 결말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는 내가 지켜야 할 또 다른 자식이 있다면 없어진 자식 때문에 내 눈앞의 자식을 죽일 수는 없었을 테니까.


그러나 그 속사정과 역사를 알지 못하는 내가 상상으로 생각하는 것은 그저 상상일 뿐 아무런 의미는 없으니 더 이상 논하는 것 자체가 의미가 없다.

우연히 <Dr. Brain>이라는 철 지난 드라마를 보면서 이선균이 절절한 부정을 연기하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그가 남긴 두 명의 실제 아들들이 떠올랐다.

물론 그의 아내가 그의 몫까지 다 채우려고 열심히 노력하며 아이들을 부양할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그 짐을 모두 짊어지고 갔어야만 하는 상황은....

그리고 그것이 정말로 현명한 어쩔 수 없는 선택지였나를 생각해 보면....

그래도 살아 있는 것이 아이들에게나 가족에게 모두 더 원하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살아 있으면....

살아만 있으면...

그 무엇이든 다시 회복할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이미 죽고 세상을 떠나고 나서 그의 작품값이 천정부지로 오른다 한들

그의 삶이 이미 가고 없다면 의미는 없다.


기레기들이 조회수를 바라고 이런 받아쓰기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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