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그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것에 관하여...
브런치를 시작하고 얼마 되지 않아 나는 <어른들이 읽는 위인전>이라는 주제로, 기존 위인전의 방식이 아닌 대가라고 불리는 이들이 그들의 인생이 좌절이라고 표현하기에도 부족한 실패 앞에서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고 위인이라 불리게 되었는지에 대한 돋보기식 글쓰기를 무려 2년이 넘도록 245명에 대해 연재한 바 있다.
https://brunch.co.kr/brunchbook/fail1
그렇게 남의 인생을 245명이나 들여다보고 돋보기로 살펴보는 안내자 역할을 했음에도 나 역시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아내는 것인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라를 빼앗긴 것에 대한 것도 관념이라 설명하는 양아치 먹물들이 있었더랬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고 자신들의 언어를 강요하고 자신들의 원래 나라 신민이 되라며 강요하던 이들은 버젓이 자신들이 미개하고 제대로 발전하지 않은 너희 나라를, 그리고 그 국민들을 더 잘 살게 해 주려 침략을 했다는 궤변을 늘어놓았더랬다.
나라를 잃은 것이 무에 그리 큰 일이냐며 결국 나라님이 누가 되든 사는 것이 팍팍하기는 마찬가지라며 자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런데, 소위 배울 만큼 배워서 그것이 도저히 깔깔한 무언가가 입안에서 계속 맴돌아 씹어서 밥과 같이 삼킬 수 없는 것이라며, 도저히 부끄럽고 분통 터지는 일이라며 나를 되찾겠다고 자기 자산을 모두 내놓고, 독립운동을 하겠다고 나선 사람들도 있었더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름 없는 선각자들의 수많은 죽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우리나라가 빛을 다시 찾게 된 것은 독일에서 날아와 원자폭탄이라는 것을 개발한 독일인이 속해있던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떨어뜨린 폭탄으로 인해 결착을 맺게 되었다.
아무리 조선총독부에 부임한 자들을 죽이고, 여기저기 매국노를 처단하고 암살해도 찾을 수 없었던 독립은 그렇게 어마어마한 위력을 자랑하는 폭탄으로 기어들어가는 일본 천황의 항복을 라디오에서 끄집어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그렇게 독립을 위해 있는 재산 없는 재산 모두 다 바치고, 남아있는 가장 소중한 자신의 생명마저 갈아 바쳤던 이들의 노력과 갈망이 결정타가 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의미 없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그것이 기회라며 힘 있는 자들에게 바로 붙어서 같은 민족을 괴롭히고 고문하고 밀고하며 자신의 부와 명예를 쌓았던 사람들이 일소되지 않은 채 반민특위에서도 살아남고 오히려 다시 그 부와 학식으로 인한 경력을 밑천 삼아 새 시대에도 또 기회를 잡고 영위하며 지금까지 그 자식의 자식까지 떵떵거리며 사는 모습이 바로 우리네 대한민국임을 모르는 사람이 있어 보이진 않는다.
아우슈비츠에서 매일같이 죽음을 목도하던 이들에게 하루하루는 감사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많은 부도 결국 하나뿐인 자신의 목숨이 없어지고 나면 덧없어진다는 단순한 진리는 누구나 깨닫지 않아도 잘 안다. 물 대신 가스가 나오는 샤워실에 들어가던 사람들은 그저 무기력하게 죽을 날만을 기다리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런 사람들도 있었을지 모르겠으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더 많았다.
누군가는 언젠가 자신들을 구하러 올 것이라고.
그리고 이렇게 하루하루 죽지 않고 버티다 보면 반드시 좋은 날이 올 거라고
그 희망이 없이 그들이 하루하루를 버틸 수는 없었을 것이다.
나라를 잃은 억울함과 분노와 슬픔에 못 견뎌했던 한국과는 달리, 정말로 자기 나라를 발전시켜 주고 자기들을 잘 살게 해 줬다며 아직도 일본이 세운 건물들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문화재처럼 보존하고 일본을 동경하는 차이니즈 타이베이라는 변방 지역도 있긴 하다. 나라를 빼앗겼던 것도 마찬가지고 자기네 민족의 아낙들이 위안부로 인간 이하의 취급을 당했음에도 최근까지 자신들의 선거에 노년층의 표를 받겠다고 일본어를 버젓이 선전벽보에 적어 넣어 일본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쓰레기짓을 하는 그런 민족들도 있는 것을 보면 사람들이 모두 똑같은 상식을 가지고 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을 인지할 필요는 있다.(그래서 이제 세계 어디에서도 대접받지 못하는 엔저공항의 일본인들은 대만을 가면 공통적으로 대접받는 듯한 인상을 받는단다.)
하루하루 꾸역꾸역 죽지 못해 산다는 자영업자들을 보면서, 배달업체들이 이익을 모두 가져가버려 영업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결국 그들에게 월급을 받지는 못하면서 이익을 가져다주는 꼴이라고 폐업도 못한다고 주저하는 모습을 보면서, 그 와중에 OTT에 나와 그렇지 않아도 잘되는 가게 더 잘돼서 결코 싸지 않은 가격임에도 올해까지 예약이 모두 차버렸다는 셰프라 불리는 가게 점주들과의 크나큰 괴리를 본다.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고 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이 조금이라도 손해 볼까 싶으면 파업과 자퇴와 단체행동을 불사하지 않은 이들을 보면서, 억지로 지질하게 겨우 자식을 의대에 보내놓고 그것도 기득권이라며 행여 불이익을 보게 될까 싶어 아직도 성인이 된 자식을 위해 나선다는 그 볼썽사나운 부모들의 행태들을 보면서 그것이 과연 그들의 인생에 있어 고난이라 불릴 가치나 있을지 생각하노라면 한숨부터 나온다.
누구에게 힘들고 버거운 삶이 누구에게는 아무렇지도 않은 한숨거리일 수도 있겠으나, 그것을 객관적으로 정량화할 수는 없다. 저마다의 깜냥이 다르고 그것을 감내해 낼 수 있는 그릇의 차이가 있는 터라 누군가는 정말로 별 것 아닌 것 같은 무게에 눌려 스스로 생을 마감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벌써 자살을 선택했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버거운 짐을 짊어지고서도 그 큰 파고를 뛰어넘고 무언가를 이뤄내기도 한다.
하지만, 공통적인 부분은... 고난, 스트레스, 무거운 삶의 짐은 누구에게서 작든 크든 어떤 형태로든 있다. 늘 행복하고 즐겁고 잭팟만 터지는 인생이라면 사람들은 수천 년 전에 득도하신 누군가의 말처럼 인생을 고난이라고 표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주 많은 고난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긴 장마에 아주 잠깐 햇빛이 비추는 것같이 행복한 나날들이 끼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살아있어야 행복한 날이든 잠시의 볕이든 쬘 수 있지 않겠는가?
살아 있어야 그 고난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극복했다며 옛이야기를 나눌 수 있지 않겠는가?
힘겹다는 청취자의 고민에 신해철이 툭 내던지 말처럼, 어쩔 수 없다면, 내가 희망하는 바의 그 무언가가 짜잔 하고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냥 뚫고 가자.'라는 마음으로 살아남아야 하지 않겠는가?
큰 스님이 그러셨더랬다.
죽을병에 걸리지 않으면 된 거라고. 죽을병에 걸렸다면? 그건 어쩔 수 없으니까 준비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렇지 않다면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을 가다듬어 살아가는 것밖에 없는 거라고.
살아가는 것, 그 하루를 살아내는 것.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