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너스(Sinners): 죄인들>을 보고 나서
딱히 재미있다고 여겨지는 영화나 드라마를 찾기 어려운 요즘, 작년 즈음 미국을 들썩이게 만들었던 영화를 뒤늦게나마 찾아보는 여유를 갖게 된 것은 그야말로 우연이었다.
있어 보이는 영화상식이나 멋들어진 미사여구를 늘어놓는 영화평론가라고 타이틀을 달고 다니는 이들의 겉멋 들린 글 같지 않은 잡문을 읽는 것이 매우 거슬리는 내 캐릭터를 감안하자면 영화 <씨너스(Sinners): 죄인들>를 찾아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영화의 내용은 없고, 기승전결은 고사하고 그저 마케팅으로 승부하려는 조악함으로 치닫는 한국영화를 필두로 한 최근 영화분위기 속에서 이 영화는 1년 전 한국에서 개봉해서 고작(?) 10만을 겨우 넘긴, 망한 영화에 해당하는 그 수많은 외화들 중의 하나로 기억될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미국에서 로튼토마토지수 98%를 시작으로 평단과 흥행, 모두에게 인정받은 역대급 영화로 작년 할리우드 영화계를 뒤흔든 바 있다.
국내에선 고작 10만도 겨우겨우 채우는 것에 그쳤지만, 전 세계에서 3억 6800만 달러(약 5400억 원)를 벌어들여 흥행에 성공했다. 전체 매출액 중 북미에서 벌어들인 게 2억 7990만 달러였으니 본토에서만 먹히는 문화적인 차이가 있어서 그럴 수 있다는 꺼벙한(?) 의문도 생길 법하다.
올해 초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이 영화는, 무려 16개 부문 후보(작품·감독·남우주연·남우조연·여우조연·각본 등 주요 부문은 물론 촬영·편집·미술·의상·분장·음향·시각효과·음악·주제가상과 함께 올해 신설된 캐스팅상 후보에도 올라 기술 분야 전 부문)에 지명되며 역대 최다 후보작 새 역사를 썼다.
이 영화를 어설프게 마케팅했던 한국의 홍보대행사는 이 영화의 감독, 라이언 쿠글러를 <블랙팬서>의 감독으로 전면 포스팅했다. 당연히 이 영화의 주연이 <블랙팬서>에서 빌런역을 멋지게 소화했던 마이클 B. 조던임을 강조하는 의미에서는 당연한 포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틀렸다.
<블랙팬서>가 흑인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했던 최초의 영화로 기록되었던 것처럼, 이 영화는 라이언 쿠글러가 작정하고 기획단계서부터 철저하게 준비한 다양한 장치들이 배치된 영화라는 점을 간과한 마케팅 포커싱이었다.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한국에서 왜 이 영화가 그렇게 홀대를 받으며 흥행에 참패했는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미국 본토에서는 흥행은 물론 평단까지 열광했는지 살펴보려면 그저 뱀파이어 액션물이나 음악영화정도로 이해해서는 감독이 장기간에 걸쳐 준비하고 포석했을 '진정 흥행과 평단에 모두 인정받기 위한 킥'을 고스란히 맛볼 수 없다.
영화의 배경과 시작은 그렇게 복잡다단해 보이지 않는다.
1932년 미국 미시시피를 배경으로 하여 당시 극심했던 인종차별과 ‘KKK 단’의 백인우월주의, 반흑인 인종주의가 팽배했던 사회적 현실을 촘촘히 녹여내기 위하 노력이 있었구나, 정도는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런데 감독은 이것을 지루하고 장대한 시대극이 아닌 자신을 유명감독으로 만들어준 액션극으로 버무려 뜬금없이(?) 뱀파이어 호러물로 둔갑시켜 내놓는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이 영화는 단순한 공포나 스릴러가 아닌 역사적 상처와 인권 문제, 인간 본성에 대한 깊고 치열한 성찰을 담은 걸작의 하나로 인정받은 작품이다.
포스터에는 장렬한 뱀파이어 호러물로 액션을 표방하는 것처럼 그려져 있지만, 이 영화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이제까지 전혀 볼 수 없었던 지루하고 장대한 역사물이자 시대극이며 그 안에 담은 미국 흑인 공동체의 역사와 기억, 그리고 그 주변을 담고 있던 그릇을 오롯이 빚어내는 신성한 의식에 가깝다.
대공황의 황폐함과 제도화된 인종차별이라는 복합적 억압을 생생하게 그려내면서, 그 지루해질 만할 이야기에 하품을 던질 젊은이들이 눈이 번쩍 뜨이게 할 만한 역동적인 뱀파이어 액션이 펼쳐진다.
그래서 단순한 할리우드 액션물을 예상하고 극장을 찾은 한국의 관객들에게는 그야말로 낯설고 맥이 끊기는 이상하기 그지없는 영화로 평가절하되기 딱 좋은 형태였을지도 모른다.
피범벅이 된 기타로 상징되는 강렬한 블루스 배경음악과 앞뒤를 채우는 유일하게 생존한 뮤지션의 이야기가 도대체 왜 액자구조로 감싸져 있는지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한국 관객에게는 도대체 이 영화에서 음악이 갖는 의미가 뭐가 그렇게 큰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이 영화의 OST를 장악하며 저변에 내내 흐르는 블루스는 이 영화에서 단순한 배경음악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주인공(?)이자 생존자, 새미(프리처 보이; 무어)의 블루스는 개인적인 고뇌 속에서 갈구하고자 했던 얕은 희망, 그리고 당시 흑인 사회에서 가지고 있던 집단적 해방의 상징이다. 영화 속에서 새미와 뱀파이어 ‘렘믹’ 간의 음악적 대립은 당시 시대적 흐름 속에서의 정서적 충돌이 클라이맥스에 달해갔던 상황을 고스란히 드러내면서 OST의 각 넘버가 서사와 밀접하게 맞물려 독특한 분위기와 감동을 전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1930년대 미시시피는 그저 시대적, 공간적 배경이 아님을 이제 눈치를 챌 만도 하다. 백인을 배제하고 흑인들만이 모이는 클럽을 만들고 그 클럽이 만들어진 하루를 보여주는 이 영화는 얼핏 로버트 로드리게스의 <황혼에서 새벽까지(From Dusk Till Dawn)>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누차 강조하던데, 이 영화는 단순 뱀파이어 호러 액션물이 아니다. 이 영화에서의 흑인 공동체 사회를 대변하는 흑인들만의 클럽은, 외부의 폭력으로부터 고립되었지만, 동시에 내부의 문화적 풍요로움과 정체성을 지켜내는 흑인들만의 최후의 보루 같은 곳으로 상징된다. 그들은 말이 아닌 침묵으로, 신념이 아닌 의식으로, 논리가 아닌 음악으로 서로를 끌어안는 방식으로 그 시대를 투영시켜 준다.
그래서 이 영화 속의 캐릭터들은 그 어느 하나 버릴 것이 없는 시대의 대변인으로 등장한다. 흑인 블루스 음악이 갖는 뿌리를 보여주듯 새미(프리처 보이)는 목사의 아들이라는 전통적인 종교적 배경과 블루스 뮤지션으로서 자유로운 예술가 정체성 사이에서 심리적 갈등을 겪는다.
한국인들에게는 진짜 주인공으로 보이는, 마이클 B. 조던의 1인 2역 쌍둥이 형제, 스모크 무어와 스택 무어는 인종차별과 폭력,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마피아 조직 생활 등 극한 환경 속에서 서로 다른 성향이긴 하지만 각자의 방식으로 트라우마를 견디며, 복잡한 심리적 긴장관계를 드러낸다.
애니(운미 모사쿠)는 흑인 전통문화의 영적 중심으로, 부두교의 주술사로 등장하며 주술과 영적 치유를 통해 당시 흑인들이 죽음과 삶, 희망과 절망을 어떻게 조율했는지에 대해 집단 치유의 상징을 보여준다.
메리 루이즈(헤일리 스타인펠드)는 클럽에 들어올 수 있는 백인이면서 흑인 문화권에서 자라 인종과 문화의 경계에 서서 복잡한 정체성 혼란과 사랑의 심리를 보여준다. 그녀의 이중 정체성은 '미국'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유도한다. 한국 관객들이 위화감을 느끼고 이야기에 몰입하지 못하는 돌멩이역할이 되기도 한 것은 역사적 배경을 행간에서 읽어내지 못했기 때문이 가장 큰 요인이라 하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미있는 등장인물은 최초의 뱀파이어로 등장하는 렘믹(잭 오코넬)이다. 그는 전통적인 뱀파이어 설정을 넘어 ‘구원’과 ‘해방’을 주장하는 마치 사이비종교의 교주 같은 복합적 존재로 등장한다. 그는 새미의 음악적 재능을 노골적으로 탐내며, 악과 선, 구원과 파괴의 경계를 넘나들며 기존 뱀파이어 영화의 문법의 선을 넘나들며 긴장과 철학적 깊이를 동시에 관객들에게 던진다.
조금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자면, 렘믹은 아일랜드 이민자로 표현된다.(그의 발음에서도 여실히 느껴진다.) 단순히 오리지널 뱀파이어가 백인이 아닌 아일랜드 이민자라는 사실은 역시나 감독에 의해 치밀하게 안배된 비틀기 문법이다. 왜냐하면 흑인과는 또 다르게 당시 미국에 온 아일랜드 이민자들은 엄청난(?) 차별을 받았어야 했기 때문이다. 영화에서 새미의 음악의 질시하며 과거와 미래를 넘나는 영적능력까지 보여주는 그 음악을 탐내는 렘믹은 아일랜드 포크송으로 대적하는 듯 하지만, 그의 음악으로 사용된 편곡은 엄연히 흑인 블루스라는 사실을 음악에 약간의 조회가 있는 사람이라면 눈치채고 그 반전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를 통해 감독이 의도했던 복합적이고 다층적인 은유는 복잡한 것을 싫어하는 한국관객들에게는 당혹감을, 문화적 해석이 액션물에 들어가는 신선함을 높게 평가하는 미국의 평론계에는 기립박수를 받아내고야 만다.
기본적으로 이 영화는, 뱀파이어를 고전적 전통에 충실하게 재현하면서도, 그 설정을 사회적·철학적 의미로 확장하는 데 성공한다. 햇빛에는 바로 타 죽고, 마늘에 반응하며, 남의 집에 초대받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고, 심장에 나무 말뚝이 박혀야 소멸하는 설정은 브람 스토커의 전통을 따르지만,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억압된 기억과 권력의 구조’를 투영하는 중층적인 의미를 덧붙이며 블루스에 재즈의 스캣을 넣듯 변용을 시도한다.
뱀파이어는 피를 빨아들이는 행위로 동족을 만든다. 그리고 동족이 되면 서로의 기억을 공유한다. 기존 뱀파이어 호러물에서는 그 기억의 공유가 설명되지도 강조된 바도 없다. 다시 말해 이 영화에서 이 부분이 강조되는 이유는, 그것이 단순한 공포 장치가 아니라, 식민주의적 지배의 은유를 담아내기 위한 필수요소이기 때문이다. 타인의 피를 섭취하고 그 기억을 강제로 내면화시키는 것은, 백인 주류 권력이 흑인의 문화를 식민화하고 자신들의 기호에 따라 해석하고 지배해 온 방식과 매우 닮아있다고 감독은 설파한다.
즉, 영생을 주거나 자신의 허수아비로 만들어 노예처럼 부리는 기존 뱀파이어물의 방식을 넘어, 기억을 공유한다는 설정자체가 뱀파이어가 단순히 인간의 생명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개인의 정체성과 역사까지 지배하고 흡수하는 존재임을 암시한다. 이는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흑인 공동체로서의 기억과 죄악, 그리고 그 구원 간의 상관성에 주목하게 만든다. 결국 음악으로 자유로워지고 싶어 했던 새미의 블루스는 그들의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과거와 조상의 기억이 유리되지 않았음을 역설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셈이다.
햇빛을 받으면 타 죽는다는 기존 뱀파이어 호러물의 공식을, 이 영화에서는 어둠이 거짓이고 햇빛이 적나라하 진실임을 대조적으로 보여준다. 뱀파이어는 어둠 속에서만 생존하며, 진실(햇빛)이 비추는 순간 사라진다. 마늘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젊은 세대들이 막연히 흑백 영화에서 보았던 마늘이 뱀파이어를 죽일 수 있다는 공식의 연원을 이 영화에서는 그것이 마치 부두가 저변에 깔린 흑인 공동체가 계승해 온 민속 지식과 주술적 믿음이 서양 중심 질서에 맞서는 저항의 도구로 작동하는 것처럼 반대되는 쪽에 둔다.
뱀파이어 한 명이 고통을 느끼면, 다른 동족들도 같은 고통을 느낀다는 영화 속 설정은 전통 뱀파이어 서사에는 없는 독창적인 장치 중 하나이다. 이는 공포의 장치이기도 하지만, 역설적으로 흑인사회에서 볼 수 있는 연대와 공동체의 구조를 뱀파이어들을 통해서까지 보여주는 감독의 기획된 메타포이기도 하다.
여기서 감독이 의도한 그 부분의 특장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뱀파이어의 고통 공유는 강제된 유대감이지 흑인 사회에서 갖는 정서적 공감이 아니다. 타인의 고통을 느끼지만, 그것은 자발적 공감이나 희생이 아니라 동류이기 때문에 강제로 연결된 운명이라는 점이다. 이는 흑인 공동체가 보여주는 자발적 연대, 기억을 통한 치유와는 정반대의 ‘역(逆) 공동체성’을 보여주기 위해 마련된 그야말로 감독이 새롭게 창조한 장치 중 하나인 셈이다.
이 영화 속의 뱀파이어라는 존재는, 기억의 강제 공유라는 장치를 통해 본래 흑인들이 가진 기억을 빼앗고, 존재를 잠식하여 과거를 잊게 만들며, 권력을 구축하는 식민자적 존재이자, 신앙과 이념을 오염시키는 허위 구원자이며, 동시에 연대를 강제하는 폭력적인 공동체에 다름 아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 서사를 모두 거부하는 구조를 유지한다. 예컨대, 가장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한국 관객들이 선호하는 단순 명료한 선악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인물들은 대부분 '죄’를 가지고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하며, 그 ‘죄’는 법적이거나 종교적인 단죄가 아니라, 구조적 억압과 생존의 대가로서 불가피하게(?) 얻어진 시대적인 산물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죄를 누가 규정하는지, 어떤 기억이 잊히고 어떤 역사가 기록되는지,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누구에 의해 결정되는지를 종교적인 의미가 아닌 개인의 의지와 선택이라는 점을 명확하게 드러내며, 그것이 개인의 선택이나 신의 뜻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권력과 기억의 구조 속에서 형성된다는 사실을 역사적 배경을 통해 강하게 관객들에게 의문처럼 던져준다.
뱀파이어와의 혈투가 다 끝났는데 뒷북처럼 등장해서 몰살당하는 KKK단의 모습이 그 대표적인 사례, 되시겠다.
라이언 쿠글러 감독이 장르적 흥미를 시대극이 지루하지 않게 젊은 관객들이 긴 러닝타임을 포기하지 않게 하면서도, 영화 문법이 아닌 기술적인 측면에서 모든 장면을 하나의 그림처럼 정제한 부분도 미국 평론계에서는 충분히 인정해 주었다. IMAX 포맷과 파나비전 렌즈를 활용해 시각적 깊이를 확보했으며, 조명은 인물의 심리 상태를 시각화하고, 그림자는 과거의 트라우마를 형상화하는데 일조한다.
이 영화는 단순한 엔터테인먼트를 넘어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사회적 모순과 인종차별의 뿌리 깊은 상처를 사실적으로 드러내며, 인권과 인간 본성에 대한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각 인물은 선과 악의 이분법을 넘는 복합적 존재로서, 죄와 구원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통해 관객에게 깊은 공감을 유발한다.
한 마디로 이 영화를 정리하자면, '억압과 기억, 구원의 의미를 음악과 상징적 서사로 풀어낸 감각적이면서도 통찰력 깊은 시대극을 포장한 뱀파이어 호러물'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다.
잊지 말자, 아는 만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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