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의 잘못에 어떻게 간해야 할 것인가?

부모의 잘못을 대하는 자식의 태도에 대한 지침

by 발검무적
子曰: "事父母, 幾諫, 見志不從, 又敬不違, 勞而不怨."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부모를 섬기되 은미하게 간해야 하니, 부모의 뜻이 내 말을 따르지 않음을 보고서도 더욱 공경하고 어기지 않으며, 수고롭되 원망하지 않아야 한다."

이 장을 잘못 이해하고 호도하는 이들이 있었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참 많았다고들 한다.

이 장의 가르침이 주는 주요요지는, 결코 ‘부모님의 말씀에 무조건 복종하라’가 아니다.


<효경>에서 증자가 공자에게 “부모님 말씀을 좇기만 하는 것을 효라고 할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대목이 나온다. 그에 대해 공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이 무슨 말인가? 이 무슨 말인가? 옛날에 천자에게 간하는 신하 일곱명이 있으면 무도할지라도 그 천하를 잃지 않고,…중략…선비에게 간해주는 벗이 있으면 아름다운 이름이 몸에서 떠나지 않고, 부모에게 간하는 자식이 있으면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따라서 불의를 당하면 자신이 부모한테 간하지 않아서는 안되고, 신하가 임금에게 간하지 않아서는 안된다. 불의를 당하면 간하는 것이니, 부모 말씀을 좇기만 하는 것이 또 어찌 효가 될 수 있겠느냐?”

효에 대한 공자의 생각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구절이라 하겠다. 그런 고로, 이 장은 부모님에게 무조건 복종하는 것이 결코 효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한 위에, 부모님에게서 불의를 봤을 경우, 부모님께 간하되 ‘어떻게’ 해야하는 것이 효에 부합하는 것인가에 대한 지침되시겠다.

먼저 이 장에 대한 주자의 해설을 살펴보기로 하자.

이 장은 <禮記>의 ‘內則’의 내용과 서로 겉과 속이 된다. 幾는 은미함이니, 은미하게 간한다는 것은 ‘內則’에 이른바 ‘부모가 과실이 있거든 기운을 내리고 얼굴빛을 화하게 하여 부드러운 소리로써 간한다.’는 것이다. 부모의 마음이 내 말을 따르지 않음을 보더라도 더욱 공경하고 더욱 어기지 말라는 것은 ‘內則’에 이른바 ‘간하는 말이 만일 받아들여지지 않더라도 더욱 공경하고 더욱 효를 하여, 기뻐하시면 다시 간한다.’는 것이다. 수고롭되 원망하지 않는다는 것은 ‘內則’에 이른바 ‘부모가 鄕黨, 州閭에 죄를 얻기보다는 차라리 익숙히 간해야 할 것이니, 부모가 노하여 기뻐하지 않아서 종아리를 쳐 피가 흐르더라도, 감히 부모를 미워하고 원망하지 말 것이요, 더욱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것이다.

길게 설명하고 있지만, 결국 요점은 부모님께서 잘못된 판단을 하시는 것을 자식이 보았을 때, 그것에 대해 어떻게 간하는 것이 옳은가에 대한 구체적 방법론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제시하는 방법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부모님의 감정을 상하지 않게 조심스럽게 말씀을 드리고, 내 말을 들어주시지 않는다 하더라도 더욱 공경하고 효를 해서, 기뻐하실 때 다시 간하는 방법을 택하라는 것이다. 심지어 내가 드린 말씀에 노하셔서 나를 때리시더라도 ‘감히’ 부모님을 미워하거나 원망하지 말고, 그럴수록 더욱더 공경하고 효도하라는 지침이다.

이쯤되면 성격 급한 독자는 바로 손들고 불만어린 질문을 던질 것이다.

누가 그걸 몰라서 못하나요?

아니, 조금 더 솔직해져 보자.

함께 살면서 누구보다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내왔고, 내 지랄맞은 성격을 다 받아주신다는 이유만으로 오히려 더 함부로 대했던 우리들을 향한 완곡한 경고이고, 반성의 기회를 주는 것이니 말이다.

함께 살기 때문에 늘 마주치고, 자기 자식이라서 모두 받아주신다는 이유로, 부모님께 함부로 하게 되었고, 그것이 어느 사이엔가 익숙해져 버렸다는 변명은, 어디사는 누구의 변명인지는 몰라도, 물크러진 삶은 호박에 이빨도 들어가지 않을 헛소리일 뿐이며, 말도 안되는 궤변이고, 멍멍거리고 짖어대는 소리에 불과하다.

효도가 좋은 것이고 따라야만 할 인간된 도리이자 가치임을 부정할 인간은 결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부터 효자효부들에게 국가 차원에서 상을 내려 모범으로 삼았던 것을 보면, 그때나 지금이나 불효를 하는 자들이 차고 넘기기 때문일 것이다.

효도를 하는 방법은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효도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라서 안 하는 인간역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님께 어떻게 해드리는 것이 진정한 효도냐고 물으면, 정작 시원하게 제대로 대답하기 어렵다. 그런 가장 큰 이유는, 단 한 번도 자신이 어떻게 하는 것이 진정한 효도인가에 대한 기준을 깊이있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던 탓이다.

사랑이나 효도나 그 마음을 품은 사람만 좋자고 하는 것은 진정한 효도나 사랑이라고 할 수 없다. 즉, 받아 들이는 사람이 그 진정성을 느껴야만 그 진심이 그제서야 빛을 발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장은, 어쩌면 살아가며 가장 많이 부대끼는 부모님과의 관계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것이 제대로 된 효도의 방식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지침서인 셈이다.

부모님이 연로해지시고 자식이 장성하여 부모님을 봉양해야할 나이가 되면, 이제까지 부모님께 보살핌을 받던 위치에서 서로의 역할이 자연스레 바뀌게 되는 시기가 찾아오기 마련이다.

그 시기가 시작되는 과도기 즈음부터, 이성적인 자식들의 눈에는, 부모님이 간혹 그릇된 판단을 하시거나 잘못된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들어오게 된다.

바로 이 즈음에서부터 이성과 효도는 상충하기 시작한다.

이성적으로 생각했을 때 분명히 자식의 판단이 옳다손 치더라도 내 잘못을 지적하고 뭐라고 한 소리 듣는데 속 좋은 사람은 없다. 게다가 내 자식에게 듣는 비난과 잔소리는 유독 더 듣기가 싫기 마련이다. 부모님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은 효가 아니라고 했는데, 잘못된 것을 보고 바로잡아드리지 못하는 것도 효가 아니라고 하였다. 그럼, 어찌 할 것인가?

이 딜레마에 대한 실마리를 제공하려는 것이 바로 이 장에서 공자가 의도하는 바이다.

목적이 불의를 바로잡는 것이라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상대가 내 이성적인 지적을 이해하도록 설득하는 것이지, 상대의 잘못을 꾸짖고 비난하는 것이 아니라는 공자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효에서도 유지된다. 특히, 그렇게 간하였음에도 잘 듣지 않고 되려 그로 인해 나까지 잘못 얽혀서 손해를 보거나 욕을 먹게 되더라도 결코 부모님을 원망하거나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부모님이 자꾸 가당치않은 일로 사업을 벌이고 민폐를 끼친다고 가정해보자.

집안을 쫄딱 말아먹은 것도 부족해서 가족친지부터 시작해서 주변 모든 사람들에게까지 돈을 빌려가며 민폐를 끼치는 것을 보고, 좋아할 자식은 없다. 게다가 이번에는 자신을 보증인으로 하여 거액의 대출까지 받아내고 어디론가 사라지셨다. 그러면 자식의 입장에서 눈 돌아가지 않을 수 없다.

그렇게 졸지에 사라진 부모님의 빚을 대신 떠앉고, 자신의 삶이 엉망이 되었다고 하여 부모님을 원망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 장에서 공자가 그어준 가이드 라인이다.


부모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한 책임의 절반은 자식에게 있다는 것이다.

어린 미성년자였던 자식이 사고를 치고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쳤을 때, 경찰에서는 흔히 보호자, 즉, 부모를 찾는다. 부모가 가장 작은 범위의 울타리 안에서 자식의 관리를 소홀히한 책임을 묻는 것이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할 즈음에 부모의 잘못에 대해 자식에게 책임을 묻는 것 역시 이러한 이치로 당연한 것이다. 다만, 부모님이 이미 성인이기에 '절반의 책임'이라는 표현을 쓴 것이다.

절반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을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


그런 최악의 사태를 모면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부지런해야 한다. 부모님이 무엇을 하시는지 늘 미리 챙겨 알아야 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있으시고 어디가 아프시진 않는지, 최근 뭔가 미묘한 변화는 없으신지 등등에 대해 관심을 갖고 알고 있어야만 잘못이 사건으로 터지기 전에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큰 돈이 깨지고 사건이 터지는 것에 한정된 이야기가 아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닌 부모님이 절약근검이 평생 몸에 배어, 장대비가 쏟아지는 날에 택시를 타셔도 될만한 거리를, 굳이 버스를 몇 번씩 갈아타고 가시겠다고 하면 자식의 입장에서는 화부터 난다. 그건 감정에 대한 부분이다. 그 감정을 분노나 짜증으로 발산하는 것은, 자기 본능에 따른 반사적인 행동일 뿐이다. 정작 부모님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모님이 그러지말고 좀 편하게 지내셨으면 한다는 의도가 전혀 반영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 행동은 결국 부모님의 행동화로 결코 이어지지 않는다. 스스로 머리가 나빠 이성적으로 감정을 조절하지 못하는 다혈질임을 증명하는 바보같은 행동일 뿐이다.

자신을 다스리는 것(修己)은, 자신을 위함이기에 앞서, 상대를 배려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은 궁극적으로 나를 위한 공부이고, '수양'이라는 것으로 귀결되어 나를 완성시키게 된다.

또한 크게 다르지 않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가정이 줄어들어 없어져가는 지금, 당신이 부모님을 자주 찾아뵙지 않으면 부모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고 어떤 불의를 맞으셨는지 알 길이 없다. 바쁘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이유로 핑계를 대지만, 일이 커지면 그 몇 배의 대가를 당신은 치르면서 평생 후회하게 된다.

최소한 매일같이 아무런 이유없이 전화를 드려, 식사는 하셨는지 뭐하고 계시는지 여쭙는 것만으로도 그런 후회를 하게 될 확률은 현저히 줄어들게 될 것이다.

효를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는지 모른다며 묻기 전에, 애인, 남편, 아내한테 수시로 전화질하고 쓸데없는 하트 이모티콘 날리는 짓거리들 하기 전에, 부모님께 전화 드리고, 메시지 드리고, 카톡 드려라, 하트 이모티콘 듬뿍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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