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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서밀 Jul 14. 2024

스탠드업 코미디 계의 첫 번째 펭귄 쓰다

박철현, <웃기려고 쓴 농담에 짠 맛이 날 때>, 웜그레이앤블루



예전에 <유퀴즈 온 더 블록>에 모델 최소라가 출연한 편을 본 적이 있다. 최소라는 처음 모델 일을 했을 때 무대 위에서 턴을 하는 순간 온몸이 짜릿했다고 한다. 그는 그 순간 이것이 자신이 해야 될 일임을 직감했다고. 그 말을 듣는데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무대 위의 걸음걸음이 그렇게나 짜릿짜릿할 수가 있구나. 그 짜릿한 감각, 전기 신호처럼 다가오는 황홀함을 잊지 않고 자기 길을 개척해나가는 사람은 또 얼마나 멋있는지. 웜그레이앤블루 크루 2기로서 이번 기회에 읽게 된 <웃기려고 쓴 농담에 짠 맛이 날 때>의 저자 박철현 역시 무대 위의 짜릿함으로 꿈을 찾아 진로를 만들어나간 사람이다. 다만 그는 런웨이 위의 모델이 아니라 공연장 무대 위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겠다는 꿈을 꿨다.


p. 51
교회에서 처음으로 꽁트를 하며 참 행복하겠다 싶었던 ‘코미디언’을 내 직업으로 삼아보고 싶어졌다.


교회 행사를 위한 꽁트를 만들다 적성을 발견한 저자는 실행력 또한 높았다. 그는 공연의 즐거움을 계속 맛보기 위해 전국 공대 최초로 개그 동아리를 만들기도 했고, MC로서 자기 홍보를 가열차게 하며 교내외 행사 MC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다 듣게 된 아는 형으로부터의 발언. 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도 어울릴 것 같아. 스탠드업 코미디언은 솔직히 한국에서는 다소 낯선 직업이다. 코미디에 관심이 많았던 저자 본인도 그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무엇인지 잘 몰랐다고 한다. 그랬던 그는 코난 오브라이언의 코난 쇼 등을 접하며 스탠드업 코미디의 매력에 스며들게 된다.


별다른 세트나 소도구가 없는 무대 위에 마이크만 들고 서 있는 스탠드업 코미디언. 얼핏 보면 어떤 강연의 연사인가 싶기도 하다. 그러나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입을 열면 자기가 경험해 온 문화를 바탕으로 쌓은 위트와 유머가 빛을 발하고, 그의 농담에 즐거워지거나 허를 찔린 사람들은 이내 웃음을 터트린다. 자기 문화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되 냉소에 그치지 않고 웃음을 자아내는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통찰을 전달하는 것이 스탠드업 코미디를 비롯해 코미디 장르의 장점이 아닐까?


저자가 코난 오브라이언을 동경했다는 말에 아는 이름이 나와 반가워졌다. 나 역시 코난 오브라이언의 입담과 쇼에서 많은 즐거움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의 모든 쇼를 본 것은 아니지만 그의 농담은 약자를 소재거리로 삼지 않는 듯 하여 웃는 동안 불편함이 없었다. 나와 다른 문화의 유머 코드나 사회 문제에 대한 의식 등이 흥미로워 해외 스탠드업 코미디를 조금 찾아보기도 했으나 그 흥미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다. 시간이 지나며 나는 국내사회 문제에 더 관심이 가기도 했고, 한국어 화자로서 우리 말로 된 콘텐츠를 더 깊게, 더 즉각적으로 즐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국내 콘텐츠를 그전보다 자주 찾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편 해외 콘텐츠를 통해 생겼던 스탠드업 코미디에 대해 약소한 관심은 국내 콘텐츠로 쉬이 이양되지 않았다. 그 이유를 박철현 작가의 책에서 알게 되었다. 저자의 말마따나 당시 한국에는 스탠드업 코미디 씬이 형성되어 있지 않았으니 그 관심이 바로 옮겨갈 곳도 딱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당장 특정 프로그램이나 스타가 대두되지 않았다고 해서 노력하는 사람들도 없다는 뜻은 아니다. <웃기려고 쓴 농담에 짠 맛이 날 때>를 읽으며 국내 스탠드업 코미디 씬의 형성과정을 알아갈 수 있었다. 이 점이 이 책이 지닌 또 하나의 가치가 아닐까 한다. 스탠드업 코미디 농담 만드는 방법, 좌중의 웃음 포인트를 찾는 방법 등을 알려주는 공략집이 아니라 저자가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그리고 스탠드업 코미디언이 되어서 걸어온 자취를 고스란히 기록한 이 책은 한 씬을 일구기 위한 노력의 축적에 대해 사유해 보게 만든다. 지금 내가 향유하는 문화예술의 각 분야, 씬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시행착오가 들어 있는지를 말이다.


p. 122
 오픈마이크 무대가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매주 시도할 수 있는 무대가 생긴 것 자체가 고무적이었다. 회차가 진행될수록 더 많은 사람이 모였다. 드디어 한국 스탠드업 코미디에도 씬이라는 것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pp. 132-133
 우리가 한국 스탠드업 코미디를 일구어 오는 동안 잇따른 개그 프로그램의 폐지로 설 자리를 잃은 공채 개그맨들은 대부분 유튜브에 도전했다. (...) 그 시점에 유튜브를 안 하는 건 바보 같은 일이었다. 우리도 여러 시도를 하다가 2019년 초, 대학 생활 공감대를 콘텐츠로 삼아 채널을 하나 만들었다. 이름을 뭐로 할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 또 마침 만났던 영준이 형의 조언과 형들의 아이디어를 더해 <피식대학>으로 결정했다. 나는 대학교 마크를 본떠 로고와 채널아트를 디자인했다.


저자는 <피식대학> 채널의 초창기에 같이 참여했었지만 성공에 대한 초조함 탓에 그간의 단체 활동을 접고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로 한다. 자기 시간을 온전히 개그와 생활 유지에 쓰고 싶어 택한 자발적인 고립이었지만 예상보다 무거운 고립감과 일련의 사건 때문에 저자는 무대와 잠시 멀어지고 만다. 어떤 결과에 이르기까지 자의와 타의의 비율은 사람마다 다 다르게 섞여 있겠지만 젊음에 방황의 시간은 좋든 싫든 필수인 것일까. 방황은 피할 수 없었으나 스탠드업 코미디에 대한 사랑은 저자를 다시 무대 위로 이끌었다. 복귀 후 스탠드업 코미디 씬의 성장을 위해 저자가 했던 몇몇 시도는 해당 씬에 성공적인 결과를 안겨주었다. 그 발상과 시도에 따른 반향이 자신 앞에서 빛을 전부 발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의 활동을 더욱 빛내주더라도 저자는 속을 끓이지 않는다.


p. 176-177
 나는 ‘테이블 세터’의 역할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거면 됐다. 언젠가 내가 더 힘이 생긴다면 3번, 4번에 들어설 수도 있는 날이 오겠지만 내 쓰임새가 확고해졌다는 게 오히려 씬 전체로 보면 더 이득이 될 것이다.
p. 180
 스탠드업 코미디 실력도 No. 1이라면 좋겠지만, 웃음은 취향의 문제이니 굳이 동료들과 경쟁해서 줄 세우기를 당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누군가 나중에 나를 기억해 주었을 때, 미지의 바다로 먼저 뛰어들었던 첫 번째 펭귄 같은 존재가 있었다고 말해준다면 그건 꽤 뿌듯할 것 같다.


씬 전체를 생각하는 마음, 그만큼 사랑하는 씬에서 자기의 역할과 위치를 스스로 찾아내었고 만족하기까지하는 그의 모습은 비슷한 나이의 누군가에게는 외려 부러움의 대상일지도 모른다. 저자 스스로 자기 인생은 찍먹의 역사라고 했지만 그는 코미디에 누구보다 끈덕지고 적극적인 사람이다. 미지의 바다에 뛰어들었던 첫 번째 펭귄은 앞으로 어떤 해류를 타고 어디까지 헤엄쳐 갈까. 너른 바다의 어떤 지점에서 어떠한 만족감을 느낄까. 좋은 책을 손에 쥔 것에 대한 감사로, 대중의 웃음이 함께할 그의 헤엄을 응원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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