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국제무용축제, 듀이 델 <봄의 제전>
춤추는 몸에는 항상 관심이 간다. 춤추는 몸은 인체의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건 물론이고, 예상치 못한 동작으로 우리 몸의 의외성을 가장 잘 알려준다고 생각한다. 이번 서울국제무용축제 공연을 관람한 이유는 이렇듯 무용하는 인체에 끌리기 때문이었다.
서울국제무용축제이니만큼 여러 국제 무용 팀의 무대가 실연되었다. 내가 본 공연은 듀이 델의 <봄의 제전>이었다. ‘듀이 델’은 이탈리아 소도시에서 자라난 카스텔루치 삼 남매를 주축으로 한 무용단이며, 이번 서울국제무용축제를 계기로 첫 내한 공연을 진행했다. 클래식 음악 혹은 서구 무용의 역사에 조예가 깊다면 공연 제목을 보고 이 무대의 내용을 짐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렇지 못한 편이었고, 막이 오르기 직전 했던 검색으로 ‘봄의 제전’이 스트라빈스키의 음악인 것 정도를 알았을 뿐이었다.
나는 ‘봄’과 ‘제전’이라는 단어의 조합에서 멋대로 차이코프스키 ‘꽃의 왈츠’ 같은 화사하고 아름다운 정조의 발레 무대를 생각하고 말았다. 사실 아름다운 풍경도 가까이 들여다보면 생명과 생명 간의 사투가 늘 존재하고, 제전에는 제사와 축제의 두 가지 의미가 모두 있었으니 이는 다소 나이브한 기대였다. 화사한 봄의 몸짓에 대한 환상은 극의 시작을 알리는 암전 된 후 ‘쾅!’하고 난 첫소리로 단박에 깨졌다. ‘이 공연은 말랑한 분위기는 아니겠군’ 하고 말이다.
<봄의 제전>은 러시아 태생의 음악가 이고르 스트라빈스키가 작곡한 발레 음악이다. 천재 무용가이자 안무가였던 바츨라프 니진스키의 안무로 파리 샹젤리제의 극장에서 초연을 올렸다. 원시성을 띠며 반복되는 멜로디와 의도된 불협화음으로 짜인 스트라빈스키의 음악, 그리고 기존 발레의 움직임이 아니라 파격적인 움직임으로 구성된 니진스키의 안무. 초연을 본 관객들의 호불호는 극심하게 나뉘었다. 이 공연의 실험성이 ‘불호’였던 관객들은 공연이 한창 진행 중인데도 일부러 발을 구르고 야유를 보냈다고 한다. 오죽하면 작곡가 스트라빈스키가 분노한 안무가 니진스키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그가 무대 위로 올라가는 걸 막을 정도였다고 하니, 그날의 소란이 얼마나 격했던지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뿐 아니라 동시대 예술가들도 이 두 사람의 실험에 대해 그러지 말았어야 한다는 평을 했다고.
다행히 예술가로서 스트라빈스키의 전망이 암울하지는 않았다. 새로운 시도에 목마른 사람들은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새로움은 소화할 시간이 주어지면 흥미롭고 독특한 개성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다. 그의 음악도 마찬가지였는지 바로 1년 뒤 열린 <봄의 제전> 연주회에서 스트라빈스키는 박수갈채를 받았다. <봄의 제전>은 지금도 여전히 스트라빈스키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아쉽게도 니진스키의 실험적인 안무는 보존되지 않았다. 이러한 공백이 후대 복원가와 안무가들의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했다. 듀이 델의 <봄의 제전> 역시 후대의 여러 시도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봄의 제전>의 본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고대 러시아의 이교도 부족이 러시아의 혹독한 겨울을 버텨낸 후 봄을 맞이하기 위해 제물이 될 아름다운 처녀를 점찍고, 그렇게 뽑힌 처녀는 태양신을 위해 죽을 때까지 춤을 춘다는 것이다. 듀이 델은 오리지널극의 스토리라인을 유사하게 따르되 이야기가 진행되는 시공간과 등장인물들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듀이 델 <봄의 제전>은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는 구멍 안에서 펼쳐진다. 누르면 액체가 뿜어져 나올 것 같은 반투명한 알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반투명한 알에서 무언가가 숨 쉬고 꿈틀거린다. 나중에 정체가 밝혀지지만 이는 거대한 애벌레였다. 어두운 조명과 나지막한 숨소리 같은 연출 때문에 기괴하다 못해 공포감마저 드는 도입부는 유명 영화 <에일리언> 시리즈마저 연상시켰다. 극이 본격적으로 진행되자 거대 거미 두 마리와 나뭇잎을 닮은 곤충 두 마리가 투닥거리는 과정이 춤으로 보여졌다. 듀이 델 <봄의 제전>의 이 시공간은 인류가 멸망하고 난 뒤 새로운 식생이 지배하는 미래의 지구 아니면 아예 미지의 행성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나뭇잎을 닮은 곤충들은 붉은 식물을 보호했다. 다른 존재의 보좌를 받는 점, 추상적인 동작을 반복하여 종교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이 붉은 식물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겨진다. 오리지널극으로 치면 태양신에 해당하는 존재가 아닐까. 그러나 그 무게감이 무색하게 붉은 식물은 제3의 곤충에게 잡아먹히고 만다.
‘이 공연은 아예 인간 형상으로는 진행되지 않는구나’라는 생각이 들 때쯤 방호복을 입은 인간 무리가 나온다. 복장과 주변에 약제 같은 무언가를 뿌리는 행동 때문에 처음에는 그들이 방역 중인 연구자들처럼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붉은 식물의 사체 일부인 커다란 꽃술을 발견하고는 곧 그것을 숭배하기 시작했다. 그렇다. 이 공연의 제목은 <봄의 제전>이니까. 알에서 부화한 애벌레, 먹고 먹히는 자연의 순리를 보여줌으로써 계절의 순환을 언급했다면 이제 제전을 다뤄야 하지 않겠는가.
방호복 무리는 광란의 춤을 췄고 그중 누군가는 목을 긋는 듯한 몸짓도 취했다. 마침내 한 명이 쓰러지고, 남은 인원이 그의 몸뚱이를 중심으로 둘러앉아 뒷모습을 보였다. 기묘한 흥분감으로 들썩이는 그 뒷모습에서 <봄의 제전>의 기저에 깔린 원시성이 가장 강하게 전달되었다. 배경지식 없이 본 공연인데도 이 장면에서 ‘마침내 제물을 바치려는 고대인의 기대감과 긴장감’이 느껴졌다. 듀이 델 무용수들의 표현력에 정말 감탄했던 부분이었다.
듀이 델 <봄의 제전> 등장인물들은 모두 똑같은 방호복을 입어 성별이나 나이, 무리 내 지위의 고하가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누군가가 제물로서 죽는 장면은 여전히 얼떨떨하게 다가오지만, 이 부분이 오리지널극처럼 ‘아름다운 처녀’가 바쳐지는 장면으로 그려졌다면 감상은 매우 달라졌을 테다. 아마 집단 내의 전형적인 약자가 공양되는 다소 천편일률적인 장면으로 느껴지지 않았을까.
한편 식물 형상의 숭배 대상을 위해 무리의 일원을 바치는 모습에서는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성이 동시적으로 다가왔다. 인류 문명이 한 차례 쓰러진 후 인류가 다시 자연 앞에 무력해진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미래의 한 순간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우리 인류가 이미 거쳐 온 애니미즘적인 고대 신앙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이 극의 클라이맥스는 금색 생명체가 제물로 바쳐진 인간을 잡아먹고 내부에서부터 끓어오르듯이 비정형으로 세차게 움직이다 다른 생명체를 내보내는 장면이었다. 이 장면을 위해 무용수 몇 명이 금색 천 안에서 긴 장대를 들고 빠르게 움직인 듯한데, 이 움직임을 어떻게 ‘안무’로 짜고 반복적으로 재현하도록 방안을 마련했는지 그 연습 과정이 매우 궁금해졌었다. (아마도 금색 천 외부로 드러나는 움직임을 몇 번이고 촬영하고 돌려 보며 움직임을 안무로 만들었겠지 싶다.)
숭배는 붉은 식물의 유해에 대고 했으나 막상 제물을 먹고 새 생명체를 내보낸 것은 금색의 알 수 없는 존재였다. 이 전개에 착안하면 자연현상을 향한 인간의 기도는 자연의 순환 위에 덧씌워지는 바람 같다. 그럼에도 인간은 바라게 될 것이다. 바람이 입는 종교성의 정도는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달라지더라도, 오늘의 먹고사는 고통과 수고로움 탓에 지금이 지나가기를 바라게 되는 것이 사람 마음이고 생리인 탓이다.
결국은 골몰할 것을 찾아야 한다. 원시사회의 제사와 달리 생명을 해치지 않으면서 몰입할 수 있는 것으로 말이다. 듀이 델에게 그것은 춤이었다. 듀이 델은 자신들의 <봄의 제전>에서 낯선 시공간의 괴이한 생명체들을 앞세워 생소하고 이질적인 ‘움직임–춤’을 만들어 선보이면서도 극 특유의 미래적인 원시성의 심상을 구현하고 전달하는 실험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들이 골몰하여 만들어낸 성과가 펼쳐진 공연장에서 관객인 나는 오늘치 수고로움을 잠시 잊거나 더 의미 있게 만들어 줄, 새롭게 몰입할 거리를 움켜쥐고 나왔다. 춤추는 사람 몸의 신체성 말고도, 가상의 생명체가 설득력 있는 존재감을 지니게 만드는 움직임들의 발생과 전달에 관한 것이다. 듀이 델 <봄의 제전>을 통해 무용의 정의와 범위에 천착할 계기를 만나게 되어 기쁘다. 그토록 새로운 충격 가득한 춤 공연이었다.
*참조 칼럼: 새로운 시대의 음악가, 스트라빈스키 <봄의 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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