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인사이트 내부 소모임에 참여한 지 세 번째. 두 번의 피드백 모임을 보낸 후 이번에는 도서 모임에 참여했다. 북클럽에 참여하고픈 마음이 늘 있었기 때문이다. 이번 모임은 주로 신사역과 강남역 근처의 카페에서 주말에 이뤄졌기 때문에 대체로 사람과 소음이 다소 와글와글한 분위기 속에서 대화를 나눠야 했다. 하지만 그 와글거림이 영판 타인의 것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모임에서 특히 활발한 대화를 해서, 어쩌면 주변의 소음이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었을 테다.
첫 모임에서는 따로 책을 정하지 않고 서로 자신을 소개하고 서로를 파악하는 시간을 가졌다. 놀랍게도 우리는 처음 만나는 것치고-정확히는 한 분은 구면이었지만 이 세 명의 조합은 처음이었다는 점에서- 각자의 생활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J님의 말씀대로 진로 고민이 공감대가 되었던 것 같다. 그날 대화의 영향으로 ‘좋아하는 일로 진로를 잡았을 때 어떻게 하면 오래 즐겁게 일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들어 있을 만한 책을 찾아 읽기로 했다.
우리가 같이 읽은 첫 책은 일본인 디자이너이자 작가로 오랜 기간 일해 온 요지후리 분페이의 산문집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면>이었다. 작가의 작업 연대기와 직업인으로서의 고민 등을 알아갈 수 있었다. 문제는 우리의 대화가 자꾸 자꾸 책 내용보다는 개인적인 이야기로 빠져나갔다는 것이다. 즐거운 대화였지만 책이 중심이 되지 않고 있었다. 대학원 발제 후의 피드백이 떠올랐다. 좋은 정보를 담고 있어도 발제를 위해서는 논쟁할 거리가 있는 글을 골라야 한다는 평이었는데, 우리의 이번 모임에도 그 말이 적용되지 싶었다. 개인의 커리어에서 쌓아 올린 시간과 노하우에 대해서 독자가 말을 보탤 구석은 사실 적다. 게다가 이 책은 작가가 자기 작업의 자취를 보여주는 책이었지 직업인으로서 가져야 하는 어떤 태도나 방식을 정해두고 설파하는 유형도 아니었다. 때문에 책을 바탕으로 대화를 계속 쌓아올리기에는 구심력이 잘 생기지 않았다.
직전 모임에 관한 자체 피드백을 바탕으로 두 번째 도서는 좀 더 해석의 여지가 많은 책을 고르기로 했다. 두 번째 책은 S님이 추천한 안그람 작가의 그래픽노블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이었다. 5편의 그래픽노블이 실려 있는 단편집이었다. 각 편마다 줄거리에 대한 이해, 작가가 어떤 인물을 묘사할 때 개연성이 어떠했는지, 주인공의 선택에 대한 의견 등이 화제로 올랐다. 그래픽노블이다 보니 글 뿐만 아니라 그림체와 시각적인 연출에 대한 이야기도 풍부하게 나왔다. 단편 ‘진지하고 싶지 않은 혜지씨’에서는 진지함이 경시되는 요즘 세태에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하고, 판타지 장르 단편인 ‘녹슨 금과 늙은 용’에서는 회계사 캐릭터가 작중 한 인물의 환생일까 아닐까에 대해 잠시 가벼운 토론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에 실린 ‘토마토, 나이프 그리고 입맞춤’은 책 전체의 제목이 될 만큼 가장 강렬한 작품이다 보니 이 편에 대해 제일 길게 얘기했다. 우리는 이 기이한 분위기를 지닌 단편에 나타난 종교적 모티프 등을 근거로 각자의 해석을 내놓았다. 각자 제일 재미있게 읽은 단편으로 각기 다른 이야기를 고른 점 또한 흥미로웠다.
서두에 밝혔듯이 가장 활발한 대화를 하게 만든 것은 우리 모임의 마지막 책 <이 안에 당신의 수명이 들어 있습니다>였다. 작가 니키 얼릭이 쓴 소설로, 어느날 전세계 사람들에게 미지의 상자가 주어지며 일어나는 사회적 현상을 다룬 책이다. 상자 안에는 상자 주인 개개인의 수명을 알리는 끈이 들어 있다. 상자가 나타난 이후의 세상에서 수명이 긴 사람은 ‘긴 끈’, 반대로 수명이 짧은 사람은 ‘짧은 끈’으로 불리게 되고 사회에는 새로운 차별이 생긴다. 작품에는 긴 끈과 짧은 끈을 받은 여러 명의 등장인물이 나오고 각 장마다 그 인물들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서술된다. 본인은 ‘긴 끈’이지만 반려자가 ‘짧은 끈’인 사람, 자신의 끈 길이를 십분 활용하는 정치인, ‘짧은 끈’ 중에서도 끈의 길이가 유독 짧은 사람, 너도나도 자기 수명을 알게 된 세상에서 여전히 자기 소신대로 상자를 열지 않는 사람 등 다양한 인물이 나오고 이들은 크고 작게 서로에게 영향을 준다.
처음부터 독자들의 손에 뜨거운 감자를 던지고 시작하는 책이기 때문에 우리는 얘깃거리가 아주 많아졌다. 먼저, 나라면 상자를 열 것인지 아닌지. 우리 중 두 명은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답했고, 한 명은 상자를 열 것 같다고 답했다. 책 안에서 애인이나 가족의 상자를 몰래 열어보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에 가족이 상자를 열지 않겠다고 한다면 그 의견을 끝까지 존중할지 아니면 몰래라도 가족의 수명을 알고 싶어질지 또 질문을 던지기도 했다. 각자의 가치관에 따른 대답이 나왔다. 첫 번째 질문에서 기존에 건강 문제가 있었다면 차라리 수명 알기를 바랄 확률이 높을 수 있겠다는 의견이 나왔다면, 두 번째 질문에서는 ‘나’의 입장이 부모인가 자식인가에 따라 가족의 수명을 알고 싶은지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겠다는 견해가 나왔다.
소설 속 남은 수명에 대한 차별과 현실 세계에 있는 차별의 양상을 비교해 보기도 했다. 등장인물의 인종, 성별, 계층에 따라 짧고 긴 수명을 받아들이는 데에 차이가 있는지 분석해 보는 일 또한 흥미로웠다. 등장 인물들은 여러 조합의 상호작용 속에서 여러 층위의 교차성을 보여준다. 이 다양한 교차성이 이 책의 배경이 미국 뉴욕임을 다시 실감케 했다.
마지막 책에 대한 이야기는 책 구석구석의 비슷한 상황이나 정서, 인물, 모티프를 연결고리로 연상되는 작품 추천으로 이어졌다. 나는 전 인류가 수명을 알게 되는 설정이 비슷하지만 작품의 분위기나 진행은 매우 다른 영화 <이웃집에 신이 산다>, 책 속의 ‘긴 끈’ 정치인과 가치관 및 수완이 비슷한 인물이 나오는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기존 사회의 아웃사이더가 바뀌어버린 사회에서 새로 아웃사이더가 된 이들과 연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바비>를 언급했다. 다른 두 분도 좋은 작품을 많이 추천해주셨다. 영화 <새벽의 황당한 저주>, 책 <다만 죽음을 곁에 두고 씁니다>, <생명 가격표> 등등… 이처럼 책 한 권 이야기를 하다 보면 감상할 작품들이 배로 불어난다. 새로운 관점을 얻어가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책이라는 상자를 열면 온갖 지식과 지혜, 그리고 작가들이 마련해 놓은 삶의 딜레마로 그 안이 풍족하다. 책을 읽는 사람의 모습은 고요하지만 사실 그의 내면에서는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책 읽는 이의 속은 새로운 세상의 정보와 인물들로 가득해진다. 책 속 상황을 두고 ‘나라면 어떻게 할까’라는 생각이 들 때쯤이면 책 읽는 사람의 내면은 와글와글해진다.
와글거리는 세 명의 내면, 말, 공간.
좋은 책과 좋은 사람들 덕분에 내 세상도 넓어져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