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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다떠는 옌 May 26. 2024

나만 안 되는 '장기연애'

나는 네 엑스가 부러웠다.


책도 한 권만 읽은 사람이 가장 무섭다고. '사랑'에 대해 한창 호기심을 가지고 열정을 가졌던 나는 드라마 속 연인의 모습이 참 예쁜 연애이자 사랑의 본보기라 생각해 왔다. 시작의 설렘, 시간이 지난 후의 편안함, 그 속에서도 꾸준히 지속되는 애틋함, 설렘을 잊을 만하면 서로를 위한 이벤트까지. 내 연애만큼은 이 과정이 지켜지길 바랐다.


이에 바탕이 되는 건 '지속성' 즉, '세월'이라 생각했다.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세월. 그 기간이라는 게 앞선 모든 연애 행위들의 근본이 되고, 앞서 언급된 연애 과정은 그만한 시간이 받쳐줘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라 생각했기 때문. 당연하게도 2달의 연애보다 2년의 연애가, 2년의 연애보다 5년의 연애가 더 많은 것을 남기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장기연애가 하고 싶었다. 내가 나눈 사랑과 추억이 헛되이 지 않도록.


어처구니없게도, 나와 만났던 이들은 장기연애를 해봤던 이들이었다. 마치 나도 그만큼의 기간을 보내야만 할 것 같이. 아니, 무조건 그러고 싶었다. 내 욕심이겠지만. 그 사람의 엑스가 부러워서. 그에 비하면 반도 안 되는, 얼마 지나지도 않은 우리들의 시간을 내세우며 내가 그를 다 알고 있다고, 그가 나를 가장 사랑하고 있다고 감히 여겨지지가 않아서. 아직도 묻어 있는 그의 과거 조각들이 나의 연애를 계속해서 아프게 하니까. 얼른 그 기간을 뛰어넘어야겠다고 생각한 걸 어떡해.  


나는 오랜 기간 이 이상한 집착을 뗄 수 없었다. 기간에 대한 집착. 그 세월이 추억과 신뢰, 그리고 사랑의 무게와 비례하다 생각했기 때문. 그만큼 사랑했기 때문에 오래 만날 수 있었다고. 그만큼 놓기 어려웠다고 생각했다. 모두에게 적용되는 비례법칙인 줄만 알았다. 그러나, 이 법칙은 나한테만 적용되나 보다. 아니란다. 그 기간만큼 사랑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냥 안정감에 사귀었다고. 근데, 그 사람의 흔적을 그렇게 티를 내냐.


장기연애를 만들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더 좋은, 사랑스러운 사람이고 싶었을 뿐인데. 그런 욕심이 내 시야를 좁히고 있다는 사실은 외면한 채, 이런 나 때문에 너도 아팠다는 사실을 외면한 채. 욕심을 부렸다. 그것도 티가 나게. 장기연애는 무슨, 단기연애조차도 제대로 못했다.  


이보다 어리석고 아쉬운 일이 있을까 싶다.




그런데 있잖아. 내가 먼저 힘들어한 적은 없었다. 내가 먼저 물어본 적도 없었다. 내가 먼저 네 이별을 위로해주려 한 적도 없었다. 내가 먼저 사진 보여달란 적도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해 보란 적도 없었다. 내가 먼저 비교해 달란 적도 없었고. 일주일에 몇 번 만나는 게 좋겠냐는 대답에 네 전 연애를 근거로 대란 적도 없었다. 먼저 과거에 어떤 데이트를 했는지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우리 기념일 챙기는 건 우리의 몫이지 전에는 무얼 챙겼고 무얼 안 챙겼는지 중요하지 않아. 나랑 어떻게 연애할 거냐고. 나는 그걸 물었지.


나도 어리석었지만, 나만 속상해할 필요는 없었다. 처음부터 깔끔하게 정리한 후에 다음 사람을 좋아해 주라. 다음 사람이 굳이 겪지 않아도 될 아픔 겪지 않도록. 굳이 알 필요도 없는 거 다 알고 시작해서 소중한 연애 경험에 상처 주지 말고. 나랑 했던 연애도. 나랑 할 연애에도.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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