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의 이야기
대학생이었던 나는 언젠가 엄마 앞에서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아직도 “내 대학이 자랑할만하지 않다”던 아빠의 말이 아직 내게 상처가 된다며. 그리고는 엄마라도 나에게 잘했다고, 고생했다고 말해주지 그랬냐며 원망했다. 그렇게 머릿속에서 정리되지 않은 말이 두서없이 흩어졌고, 엄마는 한참을 말없이 나를 안고 토닥였다. 그리고 내 눈물이 멎을 즈음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 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라 몰랐어.”
상처를 마주하는 것이 부모님과 화해하기 위함이라고 믿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엄마에게 내 상처를 꺼냄으로서 ‘과거의 나’와 화해했다. 그렇게 부모님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스스로를 미워했던 나를 용서할 수 있었다. 좋은 대학을 나오지 않아도, 그럴듯한 직장이 아니어도 괜찮다고, 나를 다독일 수 있게 됐다. 그런데 문득 의문이 들었다. 나는 자식으로서 부모님을 이해하려고 노력한 적이 있던가?
엄마는 강원도 원통에서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첫째인 큰 이모를 시작으로 둘째인 엄마, 유일한 아들인 삼촌, 그리고 8살 터울의 막내 딸 작은 이모까지. 큰 이모는 장녀였기에, 삼촌은 귀한 외아들이었기에, 작은 이모는 늦둥이 막내였기에 많은 사랑을 받았다고 한다. 반면 엄마는 둘째 딸, 다른 자식들에 비하면 약간 애매하고 서러운 포지션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인지 엄마는 네 남매 중에 가장 현실적이고 이성적인 어른으로 컸다.
어릴 적 외갓집은 원통에서 큰 슈퍼마켓을 운영했고, 덕분에 엄마는 나름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4남매를 키우기가 녹록지는 않았나 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운영하시던 가게를 지키느라 늘 바쁘셨다. 특히 할머니께서는 주로 돈을 버는 가장 역할에 육아까지 담당하셨다. 게다가 엄한 시어머니 아래 달마다 장을 보고 제사까지 치뤄야 했으니, 할머니께서 얼마나 고달프셨을 지 감히 상상하기도 어렵다. 그러니 중-고등학생이 된 큰 이모와 엄마를 살뜰히 돌볼 정신도 없으셨을거다. 그럼에도 여자 아이들도 대학에 꼭 보내야 한다는 할머니의 신념 아래, 악착같이 돈을 모아 자식 모두를 대학까지 졸업시켰으니, 이게 사랑이 아니고 뭐란 말인가.
하지만 어떤 형태의 사랑이든 결핍은 존재한다. 엄마는 항상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평범한 삶을 살도록 키워주셨음에 감사한다. 하지만 두 분은 육아 혹은 돈 문제로 자주 다투셨고, 그 소리가 어느 날에는 징글징글하게 싫었단다. 엄마는 그 때의 기억으로 내가 아이를 낳으면 다투는 소리만큼은 절대로 듣게 하지 않겠노라 다짐했다. 덕분에 나는 부모님이 다투는 모습을 거의 본 적이 없다.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로.
또 딸보다는 대를 이을 아들이 귀했던 시절이라, 유일한 아들이었던 외삼촌은 생선이나 고기 반찬을 놓은 상차림을 두고 할아버지와 따로 식사를 했다. 그리고 나머지 식구들은 식사 후 남은 반찬에 밥만 새로 덜어 식사를 했다. 그렇게 외삼촌을 금이야 옥이야 키웠던 할머니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좀처럼 자신을 찾지 않았던 그를 제일 귀하게 여기고 애틋해 하셨다. 곁에서 내내 자신을 보살폈던 두 딸을 두고서. 증조 할머니의 눈에도 둘째 딸인 엄마가 그리 예뻐보이지 않았나 보다. 게다가 순한 인상으로 고분고분 말을 잘 들을 것 같았는 지, 증조 할머니의 잔심부름은 꼭 엄마의 차지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꼭 못난 말을 골라서 해주셨다고 했다.
엄마의 어린시절을 상상해 보면, 엄마에게 따뜻한 말을 전하는 사람이 그리 많지는 않았겠다. 그러니 우리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도 서툰 말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줄 수 있다고 믿으셨던 게 아닐까.
* 부모님께 받았던 상처(첫 문단)에 대한 글은, 아래 링크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