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부라는 직업을 얻는 중
본업에 몹시 소홀한 중
인터넷 사이트에 가입을 하거나 보험 서류를 작성하거나 할 때 가끔 직업란을 기입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어릴 적 학교에서 부모님 직업을 써낼 때도 못 느꼈던 부끄러운 마음으로 한동안 '무직'이라고 골라 넣곤 했다. 그렇다. 일을 그만둔 후로 경제적으로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는 무직자, 백수다.
옆에서 보던 신랑은 의아해했다.
- 왜 무직이냐? 바로 위에 있는 '주부'라고 골라야지.
- 주부라기엔 좀 거창하지 않아? 나 집안일 별로 안 하고 사는데, 딴짓만 하고 있지.
- 된장 담그고 손빨래 맨날 하고 뭐 그래야 주부냐? 집안일을 주관하면 그게 주부지. 우리 집 집구석은 네 머릿속 계획에 맞춰서 돌아가고 네가 주관하고 있고 나는 아무 생각이 없지. 그러니까 너 주부 맞잖아.
그럴듯했다. 신랑은 기본적인 의식주만 해결된다면 돼지우리에서도 살 수 있는 사람이고, 언제든 이 집을 돼지우리로 만들 수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대부분의 집안일은 내가 주도하곤 한다. 가사일을 많이 하지 않고 시간을 보내는 것은 아이도 없이 둘이 사니 일거리가 별로 없어서기도 하고, 생기는 일거리를 대충 처리해버려서 이기도 하다.
- 그래도 좀 부끄럽다. 진짜 일 많이 하는 주부들이 보면 욕할 것 같아.
- 그건 주부 치고 일을 못하는 편이라 그런 거 아닐까? 회사에도 일 잘하는 사람도 있고 일 못하는 사람이 있듯이, 주부라도 일 잘 못하고 대충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지. 주부이긴 한데 더럽게 일을 못하는 사람, 그게 바로 너. 케케케...
어찌나 재미난지 등짝을 손바닥으로 한 번 '짝' 소리 나게 쓸어주니 신랑은 오랜만에 생명의 소중함을 느낀 듯 낄낄대던 입을 틀어막았다.
직업란에서 '주부'라고 다시 골라 저장했다. 민망해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일을 잘 못해도 회사원은 회사원이고, 손님이 별로 없어도 장사꾼은 장사꾼이다. 글이 안 팔리고 작품이 끊임없이 출판되지 않아도 작가는 작가인 것처럼, 가사를 잘 못해도 일을 대강 해치우더라도 주부는 주부니까.
오늘도 빨아야 할 겨울 옷들을 옆으로 밀어둔 채 글을 읽고 공부도 좀 하다가 그림을 그려보다가 이제는 글을 쓰고 있다. 창밖을 보는데 베란다에 먼지가 쌓여있지만 햇빛 좋은 날에 물청소하기로 하고 또 미뤄버렸다. 단지 미룰 뿐, 결국 하긴 한다.
그래도 요리는 예전보다 더 신경 쓰고 있다. 아프다는 소리 한 번을 하지 않던 신랑이 통풍이 생겨서 끙끙 앓았던 후로 고기와 튀긴 음식들을 줄이려다 보니, 생각보다 요리에 신경을 많이 써야 한다. 채소들은 대부분 손질에 시간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조금은 주부다워지고 있는 기분이다. 저녁에는 남은 알배추를 살짝 데쳐 간장과 참기름에 무치고 두부찌개를 슴슴하게 끓여봐야겠다고 생각하는데, 아침에 신랑이 야근한다고 했던 게 기억났다.
배추 무침과 두부찌개도 내일로 미루고 오늘은 보던 글이나 마저 보기로 한다. 화분의 가지치기를 어떻게 하나 찾다 이어진 식물 생장의 원리에 대한 흥미로운 글에 빠져들기로 한, 한없이 백수에 가까운 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