으른(어른)이 되면서는 독서하는 것에 굉장히 게으른 사람이 되었다. 시간적, 심적 여유가 없다는 핑계로 책 읽기를 멀리하였는데, 그렇다고 딱히 그 시간에 대단한 일을 하거나 업적을 이룬 것도 아니었다. 책을 읽는 시간에 생산적인 활동을 더 할 수 있을 거라며 시간의 가성비를 따졌지만, 각종 SNS 순례 등의 비생산적인 활동에만 몰두하는 결과를 낳았으니, 따지고 보면 엄청 구린 가성비를 자랑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삶에 책을 읽을 시간적, 심적 여유는 좀처럼 생기지 않았다. 대학생일 때는 취직 이후로, 취직 후에는 회사 내에서 좀 더 자리 잡으면 책을 가까이하겠다는 마음이었는데, 책임을 전가하는 마음이 이자처럼 불어나서 이렇게 살다가는 문명인의 범주에도 못 들겠다는 생각이 다시금 책을 집어 들게 만들었다. 독서는 나의 한편에 부채처럼 남아있었다. 하지만 긴 호흡으로 문장이 이어지는 소설은 도저히 읽을 엄두가 안 났는데, 집중도 못했을뿐더러 책을 읽으면서도 ‘내가 지금 이렇게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도 될까?’라는 생각이 나를 괴롭혔다. 에세이는 자기 전에 간단히 읽으면서도 문명인의 역할을 한다는 안도감을 주는데 제격이었다. 부채를 갚는 심정으로 읽던 에세이에 매료된 이유는 누군가의 이야기인 에세이가 곧 나의 이야기가 된다는 점이었다. 그러니까 에세이는 말로는 표현할 수 없고, 머릿속에서 부유하던 정리되지 않은 나의 생각과 감정들이 작가를 통해 명쾌하게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그야말로 ‘유레카’였다. 나 자신도 어떻게 형언해야 할지 몰랐던 것들을 이토록 명쾌하게 정리한 글이라니. 때로는 사찰당했나 싶을 정도로 나와 똑 닮은 글을 보면서 ‘어머 어머, 맞아 내 말이 그 말이야’ 하며 주말 연속극을 보는 듯한 리액션이 나왔고, 나조차도 왜 이러는지 모를 감정에 오은영 박사님처럼 명쾌하게 답을 내주기도 했다. 그렇게 쌓여가는 에세이 책만큼 나는 위로받고, 공감했다.
나의 글이 누군가에게도 공감과 위로가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하지만 부유하는 내 생각을, 알 수 없는 내 감정을 글로 옮기기는 여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때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글을 쓰는 걸까 생각하며 교과서 보듯 에세이를 보았고, 작가에 대한 묘한 질투심이 들기도 했다. ‘이 작가는 어쩜 이런 생각을 할까’ , ‘어쩜 이런 문장을 쓰지?’ 스스로를 비교하며 비루한 나의 사유에 초라함을 느끼곤 했다.
잘 쓰고 싶은 욕심은 글쓰기의 재미를 앗아갔는데, 이내 한 에세이에서 본 문장이 생각나며 지금 나의 상태를 정의했다. 지금 나는 ‘성급한 과몰입의 실패’ 상태라고 생각하니 한결 마음이 편해졌다. ‘아니 뭐. 내가 독서력 (讀書歷)이 얼마나 됐다고.’
부유하는 내 생각과 감정을 글로 옮길 수 있는 날이 될 때, 라임(rhyme)이 들어맞는 것처럼 내 생각을 관통하는 문장을 써낼 수 있는 때가 됐을 때, 나는 에세이를 통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까? 아직은 읽는 재미가 더 크지만 언젠가 내가 묘한 질투 감을 느끼는 그 작가들의 문장처럼 누군가의 공감과 위로를 전하는 이가 될 수 있기를 소망하며, 오늘도 나는 소설 대신 에세이를 집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