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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십이월 Dec 14. 2022

아버지가 퇴근해 오셨으면 좋겠다



'그립다'는 '그리다'와 같은 말이라고 한다. 

머릿속에 그려보고 싶은 것이 그리운 것이고, 

그려 보려면 기억해야 한다. 

그것도 아주 작은 것들까지, 혹은 작은 것들만.

평범하고 소소한 기억들을 낱낱이 기억해 떠올릴 수 있을 때

우리는 누군가를, 어딘가를, 그 어느 한 때를 그릴 수 있다.

겨울의 초입, 한 해의 끄트머리

이맘때는 누군가를 그리기 좋은 계절이다. 








아버지가 퇴근해 오셨으면 좋겠다

 

 

이렇게 첫눈이 감질나게 뿌리는

흐린 겨울날 저녁에는

아버지가 퇴근해 오셨으면 좋겠다

홈스방 코트 단추를 단정히 여미고

갈 때가 지난 금강구두 끈을 바짝 조인 채

아륙 20번 버스에서 내려  

은행을 까고 밤을 굽는 리어카의

카바이드 불빛을 지나

조금은 빠른 걸음으로 모퉁이를 돌아 

막다른 골목 끝 요비린을 누르면

뛰어나가 빗장을 풀고

묵직한 나무 대문을 열어 드리고 싶다  

아버지의 찬 손에 단내 나는

태극당 봉지가 들려 있을지도 모른다

 

예배당마다 알록달록 전구를 매달고

구세군 냄비가 새빨갛게 흔들리는 허름한 도시

동지가 아직 보름은 더 남았어도

일찌감치 어둠이 깔리는 저녁이면  

이제 곧 아버지가 퇴근해 오실 것 같다

돌아와 외풍 심한 안방에 들어 

길이 잘 든 티크 장롱에

소맷부리 희끗해진 양복을 벗어 걸고

두툼한 내복과 파자마 바람으로

모란꽃 그림 요란한

양은 소반 앞에 앉으셨으면 좋겠다.  

반짝반짝 광을 내놓은  은 젓가락으로

 밴 생태탕 가시를 발라 드셨으면

잘 익은 지레김치 흰 줄기를 찢어 드셨으면

별말씀은 없으셔도 좋을 것 같다

 

가족이 모두 각자의 방에 깃들고

나의 병이 홀로 깊어 가는 겨울밤이면

자꾸만 누군가를 기다리며 마음이 서성인다.

돌아가신 지 이미 10년

퇴직하신 지 30년은 된

아버지가 퇴근해 오시기를 기다리나 보다.  

새삼 새삼 기다리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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