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변신>은 외판원으로 성실하게 일하면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던 [그레고르 잠자]가 어느 날 아침 지난밤의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여러 개의 가느다란 다리가 달려 있는 벌레 한 마리로 변한 자신을 알아차리게 되는, 악몽과도 같은 일을 겪게 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레고르는 커다란 벌레로 변한 자신의 모습에 큰 충격을 받는다.
하지만 그레고르의 더 큰 걱정은 ‘벌레로 변한 자신’에 대한 것보다 이 상태로는 직장에 출근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직장에 출근하지 못한다면 가족의 생계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이라고 벌레 그레고르는 걱정했다.
그레고르는 외형적으로만 벌레로 변했을 뿐이지 가족을 걱정하는 아들이자 오빠이며 음악을 사랑하는 인간다움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카프카는 벌레 그레고르가 인간 가족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통해 누가 진짜 벌레이고 누가 진정한 인간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이어지는 텍스트들을 통해 독자들은 그 질문에 대한 ‘답일 것 같은 답’을 향해 나아가게 된다.
‘자신의 경제적인 부재가 가족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한 그레고르의 걱정과는 달리 가족들은 그를 단지 징그러운 벌레 한 마리로 취급할 뿐이다.
그들은 그 벌레가 그들의 가장인 그레고르가 변태한 것임을 인정하기는 하지만 ‘걱정의 따뜻한 시선’이 아닌 ‘공포와 증오의 따가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인간 그레고르와 벌레 그레고르는 분명 같은 존재이긴 하지만 가족들은 그 둘을 전혀 다른 것으로 취급한다.
알게 된다는 것과 인정한다는 것은, 설사 그것이 가족에 대한 것이라고 해도, 전혀 별개의 문제라는 것을 그들을 통해 알 수 있다.
어떤 것으로의 변태한다는 것은 그때까지의 모든 상황을 완전히 바꾸게 된다.
일단 변태를 하게 되면, 그레고르가 더 이상 인간 그레고르가 아니라 벌레 그레고르인 것처럼, 모습뿐만이 아니라 ‘그때까지의 그’라고 여겨지던 모든 것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그 상황을 인정하는 것은,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처럼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 된다.
벌레로 변태한 그레고르를 더욱 절망하게 만드는 것은, 그때까지 그에게 생계를 위탁한 채 하루하루를 무기력하게 지내던 가족들이 이제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
인간 그레고르의 부재가 가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계기가 된 것을 바라보면 벌레 그레고르는 ‘자신의 부재가 단지 일시적인 경제적 부재’일 뿐임을 알게 된다.
또한 이를 통해 그레고르는 더 이상 가장의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는 지금의 자신은 단지 벌레일 뿐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인지하게 된다.
안타깝게도 이런 방식이 인간이 다른 인간을 대하는 방식이다.
인간은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고 있을 때, 그 직책이 자신의 이름 앞에 붙어 있을 때 비로소 ‘사회적 그’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 역할과 자리에서 내려온 그는 비록 동일한 사람이긴 하지만 더 이상 그가 아니라 또 다른 그일 뿐인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가면을 쓴 모습을 그리고 인식하고 있으며 그것은 본인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가족에 대해서 또한 마찬가지이다.
시간이 흐르고 ‘한 때 가장이자 오빠였던’ 벌레 그레고르를 의무감에서나마 돌보고 있던 여동생의 인내력이 한계에 달한다.
이제 그녀와 그녀의 가족들에게 인간 그레고르는 추억 속에서나 존재하는 듯하다.
그녀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으며 ‘저 벌레’를 집에서 쫓아내야 한다고 큰 소리로 가족들에게 말한다.
그녀의 선언과도 같은 말을 듣게 된 그레고르는 마지막 남아있던 삶의 끈을 놓아버린다.
자신이 가장으로서 가졌던 그들에 대한 의무감에 비해 가족들이 그에게 가진 의무감은 너무 가볍다.
그들은 ‘그날’이 있기 전까지 가장으로서 그들의 생계를 묵묵하게 책임져 온 그레고르에 대해 아무런 의무감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호의는 그것을 받는 측에게는 ‘당당한 권리’가 되고, 그것을 주는 측에게는 ‘당연히 해야만 하는 의무’가 되는, 아이러니한 것임을 그레고르와 그의 가족들을 통해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된다.
이미 육체적인 상처를 입은 채로 마지막 끈조차 놓아버린 벌레 그레고르는 정신적으로도 무기력해져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죽음은 가족들에 의해 강요된 것이자 그레고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기도 하다.
그레고르는 죽었지만 가족들은 되살아난다.
벌레 그레고르가 죽은 후 가족들은 생기와 여유를 되찾고, 새로운 삶의 희망을 찾아 밝게 걸어 나간다.
여기에서 독자들은 ‘누군가의 죽음이 누군가의 삶이 되는’ 삶의 아이러니를 만나게 된다.
그레고르의 죽음으로 인해 가족들이 부활하게 된 것이라면, 그레고르의 죽음이 가족들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고 볼 수도 있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그레고르가, 자신의 의도와는 전혀 다르게, 가족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에 있어 방해물이었다고도 볼 수 있게 된다.
마지막 장을 덮기 전에 독자들은 ‘인간 실존’에 대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가족들에게 있어 그레고르의 존재는 무엇이었단 말인가.
더 나아가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란 말인가. 아무리 최선을 다한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그레고르처럼 죽어가게 되고, 죽음은 모두에게서 잊히게 만든다면, 인간은 잠시 지나가는 바람과도 같은 덧 없는 존재란 말인가.
3부로 구성되어 있는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책을 덮는 물리적인 행위를 저지른 후에도 정신적으로는 결코 책을 덮지 못하게 만드는 신묘한 주술을 부린다.
카프카는 그레고르가 변태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아무 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그나마 암시라면 ‘불안한 꿈’이라는 문장이 전부이다.
하지만 벌레에 대해서는 ‘장갑차처럼 딱딱한 등’, ‘활 모양의 각질(角質)로 나뉜 불룩한 갈색 배’, ‘형편없이 가느다란 여러 개의 다리’와 같은 좀 더 구체적인 문장을 통해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있다.
하지만 독자들은 ‘상상력이 만드는 벌레’보다는 ‘삽화 벌레’에 의존하려는 경향이 있어 이것은 작품의 매력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카프카 또한 당시 벌레 삽화를 책에 포함시키는 것을 반대했다고 한다.
<변신>은 다양한 화두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핵심은 ‘가족’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은 인간관계에 있어 가장 원초적인 단위이자 사회라는 거대한 유기체를 구성하는 세포라고 할 수 있다.
사회는 가족의 확장을 통해 구성된다.
결국 카프카의 <변신>을 이해하는 것은 ‘그레고르의 가족’을 이해하는 것에서 시작한다고 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카프카의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주인공 그레고르의 삶과 죽음에는 그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그 중심에 있다.
독자들은 더 나아가 그레고르의 변태와 파멸 또한, 비록 그것이 미필적 고의에 따른 것이라고 하더라도, 틀림없이 그들 때문이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다.
그레고르는 아버지의 사업이 망한 후에 가족의 생계를 위해 외판원으로 취업했고, 긴 근무시간과 힘들고 비인간적인 처우를 견디며 묵묵하게 일을 했다.
그가 가장으로서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것은 아들이자 오빠로서 어쩔 수 없는 상황으로 인한 것이긴 했지만 그는 그에게 닥친 현실을 불평 없이 받아들였고 그 날이 있기까지 그 역할을 누구보다 성실하게 수행하였다.
그런 그였기에 벌레로 변한 그를 대하는 가족들의 차가운 행동과 말은 그를 더욱 비참하게 만든다.
그는 가족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아왔고 그들은 그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가족의 일원이 아니라 부끄럽고 징그러운 한 마리의 벌레일 뿐이다.
게다가 그를 보살피던 사랑하는 여동생 그레타가 가장 적대적이 된다. 사회적 관계로부터 소외되었던 인간 그레고르는 결국 가족들로부터도 소외되는 벌레 그레고르가 된다. 사회적 관계로부터의 소외는 일을 함으로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지만 소통의 단절은 그레고르를 철저한 고립의 골짜기로 밀어 넣는다.
인간의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소통의 단절로 인해 더욱 고통 받는다. 잔인한 것은, 말을 할 수 없음에도 그들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이다. 말을 할 수 없게 된 그레고르는 가족들이 내뱉는 말에 더욱 귀를 기울이게 되고 그로 인해 더 큰 상처를 받게 된다.
<변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카프카가 살아가던 시기가 자본주의가 만연하기는 하였지만 아직 제대로 뿌리를 내리지 못한 초기 자본주의 사회였다는 점과 당시 카프카가 직장에서 맡았던 업무가 근로자의 상해와 관련된 것이었음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초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심지어는 인간조차도 경제적인 관점에서 판단하였기에 경제력을 잃는다는 것은 더 이상은 인간이 아니라는 사회적 판결을 받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태했다는 것은 사회적 기능을 잃었다는 것이기에 그는 더 이상 인간이 아니며 따라서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런 일은 어느 날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이며 이에 대해 인간이 미리 대비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다.
아무튼 가족 관계조차 경제적으로 맺어져 있는 사회에서 더 이상 경제활동을 할 수 없게 된 그레고르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죽음 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레고르는 한 마리의 벌레로 죽어간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의 경제적 무능력자로 죽어 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의 역사는 부족함을 이겨온 투쟁의 산물이다. 부족함은 경쟁을 발생시키고 경쟁은 소수에게는 승리자란 영예를 안겨주지만 다수에게는 패배자란 낙인을 찍는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경제적인 패배는 곧 사회적인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사회적 죽음은 다른 누군가의 희망이 되기도 한다.
결국 벌레 그레고르는 숨을 거두었고 그가 사랑했던 가족들은 비로소 앞날의 행복과 기쁨을 기대한다.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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