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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변신>에서 만나는 부조리와 인간의 소외

카프카의 <변신>에서 만나는 부조리와 인간의 소외


카프카는 개와 원숭이, 쥐와 벌레 같은 ‘상상만으로도 알아차릴 수 있는 동물’들을 주인공 삼아,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모티프를 통해 ‘인간의 실존’ 문제를 텍스트 안에 가두었다는 점에서 현대문학의 새로운 장을 연 위대한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이야기의 주인공으로 이런 종류의 동물을 등장시키는 것에 대해 ‘아주 드문 일’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동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글 대부분이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춘 동화이거나, 성인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고 해도 우화(寓話)와 같이 의인화된 동물을 통해 세상을 풍자하거나 어떤 교훈을 전달하고자 하는 것들이다.


카프카의 글에 등장하고 있는 동물들은 이와는 크게 다르다. 그들을 제대로 보기 위해서는 우리의 눈높이를 크게 높여야만 한다. 그것들은 의인화를 넘어 인격화된 존재들이다. 그것들의 손에는 날 선 도끼 한 자루가 들려있다. 그것들은 그 도끼를 휘둘러 우리가 얼어붙은 영혼의 바다를 건너도록 해줄 수 있지만 언제 휘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심지어 그것들의 인격은 일반적인 인간의 그것조차도 뛰어 넘어 철학자 내지는 구도자의 경지에까지 도달해 있다. 그래서 카프카의 글에 빠져 지내다가 보면 그것들과 인간의 경계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인간이 동물인지, 동물이 인간인지를 혼동하는 일이 벌어지게 된다.


그러다가 문득 알아차리게 된다. 카프카의 그것들은 카프카의 또 다른 인격들, 즉 카프카의 페르소나들이라는 것을.


카프카의 <변신>에서 그레고르 잠자는 한 마리의 벌레로 변태한다. 그가 벌레로 변한 것에 대해 ‘변태’라고 불러야 하지만, 아마도 ‘변태’라는 단어가 가진 어감 때문에, 언젠가부터 ‘변신’이라고 번역하여 부르고 있다.

카프카는 ‘벌레’의 모습에 대해 비교적 구체적으로 설명하였지만 ‘개’나 ‘원숭이’와 같이 ‘그것’이 무엇이라고는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다.

우리가 알고 있는 ‘그레고르가 변태하여 생긴 벌레’의 형상은, 대게의 경우 다리가 여럿 달린 곤충의 형상을 띤, 오직 출판사에서 의뢰 받은 삽화가가 만들어낸 ‘출판사의 벌레’ 또는 ‘삽화가의 벌레’일 뿐이다.


그렇다면 카프카가 그의 작품에 등장시킨 벌레의 정체는 대체 무엇일까. ‘카프카의 벌레’(이하 벌레)는 현실 세상에 실제로 존재하고 있는 어떤 종의 동물이 아니라, 카프카가 처해 있었고, 카프카가 느끼고 있었던 부조리한 현실이 만들어낸 문학적인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카프카의 벌레는 사회가 일반대중에게 요구하는 규범을 성실하게 준수하고는 있지만 그것에게서 벗어나기를 바라는 인물에 대한 사회적인 권력의 희생양을 상징적으로 나타낸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외면적으로만 보게 되면 주인공 그레고르는, 가장으로서의 역할과 외판원으로서의 역할 모두를 성실하게 수행하고 있었기에 그것에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 같이 보였다. 하지만 그레고르가 수행하고 있던 그 역할들은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짊어져야만 했던 것일 뿐이었다. 그레고르에게 가장이란, 더 이상 경제 활동을 할 수 없게 된 아버지를 대신해서 장남인 그에게 지워진, 벗어날 수 없는 의무감의 굴레에 불과했다.


아이러니는 늘 사람의 삶을 따라 다닌다. 여기에서 우리는 의무감 또한 스스로의 선택의 결과물이라는 또 다른 아이러니를 만나게 된다. 의무감이 선택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하다.

어떤 의무감은 ‘선택이긴 하지만 선택할 수 없는 것’이어서 ‘선택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을 뿐이다. 사람은 선택할 수 없는 것과 선택할 수 있는 것 모두에 의해 소외되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인생은 그레고르의 인생과 같이 부조리한 것이다.

어쨌든 <변신>에서 그레고르가 상황은, 당시 카프카가 일상에서 처해 있었던 상황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카프카는1883년 7월 3일에 태어나서 1924년 6월 3일에 사망하였다. 사십년 하고도 십일 개월이란 시간을 이 부조리한 세상을 살아가다가 떠나간 것이다.

산다는 것도 부조리하지만 죽음은 그 자체로도 부조리한 것이다.


산다는 것과 죽는다는 것은 형이상학적인 것일 수도 있고 물질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스스로의 선택일 수도 있고 그렇게 해야만 하는 의무일 수도 있다. 사람은 살아가는 일생 동안 삶과 죽음이라는 이 두 가지의 부조리한 난제에 갇혀 살아가야만 한다는 또 다른 부조리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


카프카가 글을 쓰던 시대는 산업혁명과 물질주의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휩쓸고 있던 20세기 초반(1900년대 초반)이었다. 새롭다는 것은 늘 부족함을 품고 있어서 혼돈과 무질서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된다. 이런 사회적인 배경은 카프카의 문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작품 <변신>에서는 특히 20세기로 들어서면서 더욱 팽배해진 자본주의의 초기에, 물질 우선주의로 인해 비인간화 되어가는 사회적 현상과, 작은 권력에 불과하지만 그 권력의 절대적인 권위 앞에 억눌린 채 살아가던 주인공 그레고르가 결국에는 한 마리의 벌레가 되어, 인간성을 박탈당한 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는 상황을 고통스럽게 담아내고 있다.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직장 상사는 권력의 권위와 비겁함을 대변하고 있으며, 직장과 가족은 사회적 소외를 대변하고 있다.


이십세기 초반을 살아가던 대다수의 일반인들이 처해있었던 상황은, 항상 약자로 살아가야만 했던 그레고르와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레고르와 그들은 사회적 권력과 폭력의 희생자이며 그것으로 인해 사회적으로 소외되지만, 막상 그 상황을 인지한다고 하더라도 그들로서는 달리 어쩔 도리가 없었기에, 차라리 인지할 수 없음이 축복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인간은, 어느 시대를 살아가던 부조리한 상황에 빠져 살아가게 되며 그로 인해 사회적인 소외를 겪게 되지만 그것을 대하는 태도는 사람마다 크게 다르다. 카프카가 그의 작품 <변신>에 등장시킨 벌레와 아버지, 여동생과 어머니, 그리고 직장 상사는 카프카 자신이 처해있었던 부조리한 상황과 인간의 소외를 문학적으로 승화시킨 위대한 상징물들이라고 할 수 있다.


by Dr. Franz KO(고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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