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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의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

그와 나의 아름다운 시절, 벨 에포크

- Rev.


파리의 초겨울 날씨는 맑고 쌀쌀하다. 물론 어떤 날은 그렇고 어떤 날은 그렇지 않다. 어쨌든 겨울이 맑다는 것은, 철들지 못한 채 기울어 버린 인생의 저녁에 내린 어둠처럼 차갑고 검고 슬프다는 얘기이다. 그래서 우울하긴 하지만 한편으로는 감미롭기도 하다는 얘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완결되지 않은 소설 같은 얘기들을 남겨두고 떠나온 지나간 날들을 돌이켜보면, 가로등 아래를 떠나지 못하는 벌거벗은 겨울 나그네처럼 아련해서 역설적으로 아름다움마저 느껴진다. 그래서일 있다. 파리에선 무렵을 초겨울이라든가 겨울이라고 부르지 않고 그저 '늘어진 가을'이라 부르게 되는 것은.  


생각이 많아지다 보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더 빠져들기 전에 센강의 찬바람을 쐬어야겠다. 센강을 부유하고 있는 불빛은 수면을 쓸고 가는 일드프랑스(Île-de-France)의 바람처럼 아무리 쳐다본다 해도 익숙해질 것 같지 않다. 분수대에서 흩뿌려지는 물줄기의 파편처럼 금세라도 노랗고 하얀 물방울이 되어 허공에 산란될 것만 같이 어른거리기만 한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구입한 책 한 권을 손에 잡고 밤의 벤치에 앉는다. 째깍째깍 시간의 토막이 불빛의 산란처럼 뽀얗게 흘러간다. 저기에서 초저녁의 취기에 잔뜩 몸을 맡긴 한 사내가 다가온다. 낯설지 않다. 우디 앨런 감독의 영화 <미드 나잇 인 파리>에서 만나 눈인사라도 설핏 나누었던 그인 듯하다.     


“그도 나처럼 아직 파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구나.”       


그도 나도 파리는 그리 쉽게 벗어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마음이 떠나지 않으니 파리는 우리를 놓아주지 않는다. 옆자리에 앉은 그가 종이와 펜을 꺼내 든다. 기사 같기도 하고 일기 같기도 한 얘기가, 어니스트가 갈기는 문자로 남겨진다.     


“다행이다. 이 좋은 시절을 배고픈 그와 함께 파리에서 머물고 있으니.” 


그의 파리에는, 작가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제임스 조이스, 음악가 콜 포터, 화가 파블로 피카소와 살바도르 달리와 로트렉과 고갱과 드가, 시인이자 소설가이자 비평가인 거트루트 스타인이 함께 머물고 있으니, 내일 아침에도 해는 또다시 찬란하게 떠오를 것이 분명하다. 


떠난다는 것은 소멸하는 것이다. 소멸의 고독을 생각하며 지새웠던 밤은 더욱 쓸쓸하였다. 소멸이 고독하다면 삶 또한 고독한 것이기에. 파리의 그는 고독하지 않을 것이다. 파리를 떠나지 않는 한 그는 결코 소멸하지 않을 것이기에.  

언젠가 이 날을 돌아보며 그와 나는 얘기하게 될 것이다.    


“좋았던 시절의 파리는, 배가 고팠던 그에게도 이유 없이 허기진 나에게도, 한 없이 '아름다운 시절'(벨 에포크(Belle Époque))이었지.”     


*** ***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가 술 한 잔 하자고 청한다. 우리는 이십 세기 초반의 [카페 레 되 마고](Café Les Deux Magots)로 걸어 들어간다. 살다 보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처럼 시간이 거꾸로 흐를 때가 있다. 

왁자지껄한 실내는 향수냄새와 담배연기, 커피냄새와 알코올냄새, 빵냄새와 음식냄새로 가득하지만 숨이 막힐 만큼 매캐하지는 않다. 술을 마시는 사람이며 커피를 마시는 사람, 모두가 이해할 수 없는 텍스트와 물감을 좁은 실내에 뿜어내고 있다. 허공을 부유하던 그것들은 종이의 표면에 붙기도 하고 캔버스의 올에 스며들기도 한다.  

   

"허기가 진다 해도 커피를 마실 수 있다면,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울 수 있다면, 큰 소리로 떠들며 텍스트와 물감을 뿜어낼 수 있다면, 결코 예술의 혼을 잃어버릴 일이 없는 것처럼, 파리를 떠나야 할 이유는 작은 하나라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파리의 [카페 레 되 마고], Café Les Deux Magots

//1885년에 오픈한 [카페 레 되 마고]는 가까이에 있는 [카페 드 플로르](Café de Flore)와 함께 19세기 말과 20세기 프랑스와 유럽의 지성과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해온 카페이다. 파리의 6구 [생 제르맹 데프레](Saint Germain des prés) 성당 인근에 있는 카페이다. [생텍쥐페리](Saint-Exupéry),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 등과 같은 수많은 그 시절 지성들의 단골 카페로 명성이 높았다. 

특히 [장 폴 사르트르](Jean Paul Sartre, 1905~1980)와 그의 연인 [시몬 드 보부아르](Simone de Beauvoir, 1908~1986)가 카페의 난방 문제로 인해 [카페 드 폴로르]로 만남의 장소를 옮기기 전까지는 그들이 글을 쓰는 장면을 종종 목격할 수 있었다고 한다. 

현재에도 이십 세기 초(1915년 경)의 장식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카페 레 되 마고'는 '두 개의 도자기 인형이 있는 카페'라는 뜻이다. 카페가 들어 서기 전까지는 중국산 비단을 판매하는 가게가 있었던 장소이었기에 '중국 도자기 인형'을 뜻하는 마고(Magot)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


    *** ***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빵가게 앞을 지난다. 파리에선 밤이 늦어져도, 이른 새벽에 그런 것처럼, 빵가게의 쇼윈도를 지나지 않고서는 길을 지나다닐 수 없다. 분명 저녁을 먹었지만, 그와 마신 술로 취기가 잔뜩 올랐지만, 배가 고프다.

카페 [레 되 마고]에서 어니스트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빵가게에는 먹음직스러운 빵들이 가득하고 거리의 테라스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이 많아서 늘 음식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곳곳에서 먹을 것이 눈에 보이는 곳이 파리이기에, 파리에서는 충분히 먹지 못한다면 몹시 허기가 진다.”     


파리에서의 배고픔은, 배가 고픈 것인지, 그림이 고픈 것인지, 글이 고픈 것인지, 삶이 고픈 것인지, 종잡을 수 없을 때가 있다. 문손잡이를 밀고 빵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신선한 버터향이 술기운을 깨운다. 큼직한 크로와상 하나에 에스프레소 커피 한잔을 손에 쥐어 들고 어두워진 창가에 붙어있는 테이블에 앉는다. 파리에선 해장을 위해 뜨끈한 국밥집을 찾지 않아도 된다.  


"파리에서의 허기짐은, 배가 고파서 그런 것인지, 텍스트가 고파서 그런 것인지, 음악이 고파서 그런 것인지, 그림이 고파서 그런 것인지, 원인을 알 수 없을 때가 있다. 그것은 파리는 영혼의 촉수를 자극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파리에서는 글을 충분히 읽지 않는다면, 그림을 충분히 감상하지 않는다면, 음악을 충분히 듣질 않는다면, 산책을 충분히 하질 않는다면, 몹시 심한 허기에 시달리게 된다."  


옆 자리에 앉아 커피를 마시는 연인들의 나지막한 속삭임이 센강의 수면을 쓰다듬는 바람의 결처럼 귓불을 간지럽힌다.

"사랑하며 살아갈 수 있는 지금이 우리에겐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야."


***   ***     


*벨 에포크(belle époque, The Belle Epoque, 아름다운 시절 또는 좋은 시절):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1914년까지)에 걸쳐 사회, 경제, 기술, 정치적으로 풍요와 평화를 누린 파리를 회고적으로 표현하는 용어이다. 이 시기 파리에는 문화와 예술이 번창하였고 거리에는 멋진 복장을 한 신사와 아름다운 의상의 숙녀가 넘쳐났다. 물랭루주와 맥심과 같은 화려한 유흥공간들이 생겨나고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문화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어 활동하였다. 시기적으로 벨 에포크는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끝무렵과 에드워드 시대와 겹치며, 독일의 빌헬름 시대에 해당하는 프랑스의 시대이지만 프랑스 이외의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도 이 무렵에 대해 애정을 담아 말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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