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를 찾아 나선다는 것은 한 세기 전의 그들과 그녀들이 그랬던 것처럼, 스스로의 열망을 쫓아 '파리로의 망명길'에 오른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그 시절의 나에게 파리는 그런 자발적인 의미를 부여받은 신비로운 망명지였다.
파리를 향해 열려버린 창을 여태껏 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파리의 반짝이는 자유와 낭만’을 사랑한 작가들과 예술가들, 사상가들의 발자국을 쫓는 것과,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세우는 것을 ‘인간이기에 행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유희’라고 지금도 여기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니 어느새 백 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알 수 없는 것은, 채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지나간 백 년을 돌이키는 일은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더욱이 파리에서는 백 년이란 시간 따위는 그리 의미를 둘만한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문학과 영화와 미술에 있어 1920년대의 파리에서는 에꼴 드 파리(École de Paris)라는 신비로우면서도 특별하고, 아주 우아한 시간이 흐르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뿐만이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와 대서양을 건너 멀리 미국에서 저마다의 이유로 자신의 집을 떠나온 작가들과 출판인들,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16세기와 17세기의 로마가 종교와 예술의 중심이자 '영원의 도시'였던 것처럼 그 시절의 파리는 문학과 예술과 사상의 중심으로써 '영원의 도시'로 남겨지려는 꿈에 부풀어 올랐었다.
그 시절의 파리는 아무런 가림 없이 작가들과 예술가들을 받아들인 위대한 '지적, 예술적, 사상적 망명지'였다. 언어와 종교, 인종과 출신지 같은 것으로는 파리에서의 그들과 그녀들을 구분할 수 없었다. [거트루드 스타인]의 집과 [라 클로즈리 데 릴라], [돔](Le Dôme Café), [셀렉트]와 같은 카페는 망명자들의 삶과 문학, 예술이 질펀하게 어우러지는 무도회장이었으며 오데옹 거리 한 편에 박혀 있는 책방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그들의 영혼에게 쉼표를 찍어 주는 쉴만한 개울가이자 정신적인 사원이었다.
"문학이 깊어질수록 점점 시적이 된다."는 낭만주의 작가 노발리스의 표현을 빌리지 않더라도 파리를 떠올리며 긁적이는 문장은 점점 더 운문적으로 흘러가는 경험을 하게 된다. 그것은 문학과 예술에 있어서 파리는 '유리알 유희의 성소'와도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그 성소의 뜰에서 뿜어내는 문향에 취한다면, 누구나가 시적이 되기 마련이다.
파리는
남아 있는 한 오라기의 자존심을 지켜주는
세상의 마지막 도시이다
그때의 넘쳐나던 감정의 절실함을 지킬 수 있고,
기름기 빠져 버린 고독을 지킬 수 있고,
물기 말라버린 슬픔을 삼킬 수 있고,
노인네처럼 속 좁아진 완고함을 숨길 수 있고,
어린아이처럼 서툴러진 걸음걸이를 들키지 않을 수 있고,
겁에 질린 눈빛을 감출 수 있고,
점점 뭉그러져 가는 얼굴의 윤곽선을
피식 웃는 웃음만으로 가릴 수 있는
파리에서는
날마다, 오직 나만을 위한 축제가
쓸쓸해서 아름답게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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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길을 걷는다는 것은 단지 딱딱한 보도 위에 발을 딛는다는 것만이 아니라 어니스트(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함께 걸아간다는 것이기도 하다. 파리의 거리에는 궁핍하고 미래가 불확실했던 젊은 날의 어니스트와, 파리에서의 그의 시간보다 더 긴 시간을 살아왔지만 아직 걸음걸이 서툴기만 한 사내가, 새벽 물안개에 잔뜩 무거워진 눈빛을 농밀하게 흩뿌려 놓았다.
[뤽상부르 공원]을 산책하다가 보면 파리의 공기를 들이키며 허기를 달래는 어니스트를 만날 것 같고, 햇살 환한 한낮의 [몽파르나스] 카페에서는 한 줄의 문장을 찾기 위해 커피 잔과 펜을 달그락거리고 있는 어니스트가 맞은편 테이블에 앉아 줄담배를 피우고 있을 것 같다.
쌀쌀한 날 [카르디날 르무안](Cardinal Lemoine) 거리에 서서 서로 살갗을 비비는 듯 옹기종기 늘어서 있는 건물들의 꼭대기 층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어니스트가 춥고 낡은 아파트의 창문가에 서서 파리의 거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것 같다.
그가 걷던 거리와 내가 걷는 거리의 풍경이 그리 다르지 않고 그의 파리의 하늘빛과 나의 파리의 하늘빛이 별반 다르지 않기에, 파리에서는 한 세기라는 시간이 그리 길지 않을 수 있다.
파리에서는 "어디 한 번해보자."는 심정으로 달려들면 금세 헤아려질 것이 분명한 현실의 것들 따위는 의미를 잃어버리기에, 파리의 거리를 걷다가 보면 무언가를 따진다는 것이 단지 무기력한 산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세 알아차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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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선 조금은 잃어버려야
마음이 맑아진다
파리에선 조금은 배가 고파야
걸음이 편해진다
허기진 어니스트의 마음이 편안하듯
속을 비워낸 나의 마음도 편안하다
파리의 거리를 걷다 보면 머릿속이 텅 빈 것 같은 느낌이 들곤 한다. 파리지앵과 파리지엔느의 입술의 움직임에서는 소리의 진동이 느껴지기보다는, 설명을 하자면 왠지 더 복잡해질 것만 같은, 알 수 없는 리듬의 파동이 감지된다.
이렇듯 감지는 할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알 수 없는 파리의 징후들은, 사방에 잔뜩 저질러 놓은 누군가의 무례조차도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귓속말을 속삭인다. 그것들을 닥치는 대로 뒤적거리다가 보면 언젠가는 나를 위한 좁지만 넉넉한 자리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르기에.
"한 세기 전의 파리의 그와 오래 전의 파리의 나는 어떤 꿈을 꾸었을까."
살아간다는 것은 무수한 보잘것없는 것들을 자신의 주변에 잔뜩 흩뿌려놓고 손에 잡히는 대로 이것저것 골라 집어 올렸다가 내팽개치기를 반복하면서 어느 누군가에게 그리고 어느 공간에게, 언젠가의 시간에게 그리고 어떤 물건에게 애써 매달리는 일이기도 하다.
그때는 초라하고 하찮은 것으로 보였지만 시간 지난 후에 뒤돌아보면 반짝이고 팽팽한 것일 수 있는 것들이 다행스럽게도 파리의 거리에는 잔뜩 늘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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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eror)의 황제 카를 5세(Karl V(Charles V), 1500 - 1558)는 파리를 두고 이렇게 극찬했다고 한다.
“파리는 하나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의 우주이다.”
(Paris is not a city, but a universe, 원어로는 Lutetia non urbs, sed orbis).
오늘날 지구상의 모든 대도시가 그 나름대로는 하나의 우주를 형성하고 있지만 파리는, 문화예술의 중심지이자 인간의 영혼이 꿈꾸는 모든 것이 찾아질 것만 같은 낭만과 자유의 도시이다. 그래서 누군가 말을 한다. 파리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은 사람들의 영혼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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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뤽상부르 공원(뤽상부르 정원, 프랑스어: Le Jardin du Luxembourg, 영어: Luxembourg Gardens): 이탈리아의 메디치가에서 시집온 <앙리 4세>의 왕비 <마리 드 메디시스>를 위해 만들어진 17세기의 공원으로 파리의 공원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이라 불린다. 공원 한편에 있는 뤽상부르 궁전은 현재 프랑스 상원 건물로 쓰이고 있고 소르본 대학과 같은 여러 학교들이 모여 있는 파리 5구 라탱 지역에 자리하고 있어서 현지인들과 예술가, 학생들이 즐겨 찾고 있다.
빈센트 반 고흐의 1890년 작 <뤽상부르 공원의 테라스>
<Terrace in the Luxembourg Gardens>, 29 July 1890
*몽파르나스(Montparnasse): 뤽상부르 공원에서 걸어서 5-10분 정도에 있는 파리 제14행정구에 속하는 지역이다. 1920년대 에콜 드 파리가((École de Paris) 한창일 때, 유럽 각지에서 파리로 몰려든 수많은 예술가들이 이곳으로 모여들어 활동을 하면서 다양하고 흥미로운 일화를 남겼다. <몽파르나스 공동묘지>(Cimetiere du Montparnasse)’에는 <악의 꽃>을 쓴 19세기의 시인 보들레르부터 사르트르, 보부아르, 사뮈엘 베케트, 모파상과 같은 유명인들이 잠들어 있다.
몽파르나스 공동묘원에 있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드 보부아르의 무덤
Grave of Jean-Paul Sartre and and Simone de Beauvoir
*카르디날 르무안(Cardinal Lemoine):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파리에서 더 이상 찾기 어려울 만큼 가난한 동네'인 카르디날 르무안 거리의 '온수도 안 나오고 제대로 된 화장실 시설도 없이 간단한 변기통만 있는' 방 두 칸짜리 아파트에서, 캐나다의 <토론토 데일리 스타>가 보내주는 원고료로 생계를 이어가며 갓 결혼한 8년 연상의 아내 해들리 리처드슨과 함께 살았다. 후일 <파리는 날마다 축제>에서 그때의 생활을 "미시간의 오막살이에 익숙해진 사람에게는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라고 회상하였다고 한다. 하긴 그, 시절 파리에선, 어니스트를 위한 축제가 날마다 열렸으니 그렇게 받아들였을 만도 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