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의 하늘 아래 앉아 에스프레소 잔의 자그마한 주둥이가 뿜어 올리는 흑갈색 악마의 둥그런 유혹에 빠져든다. 아무렇지도 않게, 상념의 호수가 물안개를 무심하게 뿜어 올리듯이, 희뿌연 담배연기를 허공에 더해 넣고 있는 파리지앵과 파리지앤느 무리 속에 오도카니 앉아 있다.
"파리에서 지내는 시간 동안에는 행여 이성이란 것을 따른다는 것이 오히려 비이성적으로 비치지 않을까."
"파리에 있다는 것은, 일상이라 부르는 사사로운 것들 따위는 미루어 두어도 괜찮다는, 의무 같은 권한을 부여받은 것이라 여겨도 괜찮지 않을까."
파리에서는 파리의 작은 참새 [에디뜨 파이프]의 노래를 듣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마찬가지로 파리에서는 ‘스스로 시를 정복해 버린’ 천재 시인 [랭보]를 떠올리는 것이 훈련 잘 된 이방인에게는, 능숙한 방관자에게는, 숨을 쉬고 하품을 하고 배변을 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금지된 것들로부터의 일탈을 오히려 규칙이라 할 수 있는 자유의 도시가 파리이다. 그래서일까, 수많은 자유의 파편이 파리의 하늘을 아무런 굴레 없이 떠다니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금세 하늘이 흐려지는 것 같더니 제 한껏 물기를 품은 자잘한 방울들이 얼굴이며 머리에 떨어진다. 쌀쌀한 축축함 속에서 눅눅하고 풋풋한 파리의 향기가 느껴진다.
"파리의 하늘을 향해 고개를 조금 치켜들어야겠다."
"행여 고집스러워 보인다 해도 괜찮다. 여기는 파리이기에."
물안개 낀 뿌연 허공에 누군가의 실루엣이 새겨진다. 자리에서 일어나서 몇 걸음 가까이 다가간다.
알 것 같다. 그녀는 여성이란 육체적인 성과, 그것보다 더 완고한 사회적 성의 울타리를 걷어버리고 스스로에게 자유를 부여했던 남장의 여인 조르주 상(Sand, Georg, 한국에선 조르주 상드로 알려진)이란 것을. 그리고 그는 파리를 떠났지만 영원한 파리의 천재 시인인 아르튀르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란 것을. 그녀와 그가 거기에서 파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조르주 상에 대한 얘기는 다음으로 미뤄야 되겠다. 오늘은 영원한 파리의 시인 랭보, 그에 대한 것만으로도 생각이 넘칠 것 같고, 가슴이 벅차오를 것 같은, 그런 날이기에.
바람 구두를 신은 천재 시인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 1854.10.20. ~ 1891.11.10.), 그를 처음 만났던 스물의 캠퍼스 그곳에는 미련의 갈색 잔재를 벗어내지 못한 초록의 내가 아직도 서성이고 있다. 그의 시를 처음 읽던 날, 마치 태초의 혼돈과도 같은 거대한 소용돌이 속에 빠져버린 나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하였었고 그의 문학적 천재성을 인지하게 된 나 스스로에게 "정말 장하다"는 칭찬을 읊조렸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 시절의 난, 결코 그가 될 수 없는 나일 뿐임을 알았던 것 같다. 그저 그의 주변을 얼쩡거리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라는 사실에, 신열에 시달리는 날도 있었지만, 나 보다도 더 나 같은 그를, 그보다도 더 그 같은 나를 발견하게 된 것만으로도 자리를 떨쳐 일어날 수 있었다.
베를렌(Paul-Marie Verlaine, 1844.03.30. ~ 1896.01.08.)과의 스캔들에서 떨렸던 나의 눈빛은 그의 시를 읽고 또 읽으면서 넓고도 커다란 바다 위를 먹먹하게 떠다니게 되었다. 그렇게 그의 시집을 손에 잡았던 그날부터 여러 날과 여러 달과 여러 해의 낮과 밤을 검은 활자에 남겨져 있는 그를 쫓고 또 쫓았다.
절필 후 프랑스를 떠나 여러 가지의 삶 속으로 스스로를 던져 넣었다가,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오직 출렁이는 물 밖에 없는 바다 한가운데에서 사나운 폭풍우에 휩싸인 한 척의 배처럼, 너무 일찍 불꽃을 잃어버린 천재 시인 랭보, 그를 둘러싼 수많은 추측과 비평은 오히려 그의 작품과 삶을 신비롭게 만들어 줄 뿐이었다.
1873년, 랭보의 대표작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로슈에서 쓰였지만, 1891년, 병에 걸려 돌아온 프랑스에서의 그의 족적마저 마르세유와 로슈에서 마침표를 찍었지만, 파리는 그와 그의 연인 베를렌의 만남을 주선한, 그를 저주받은 시인으로 살아가게 한, 천재 시인 랭보를 탄생하게 한 운명의 도시였다.
위 속으로 흘러들어 간 에스프레소의 갈빛 온기가 혈관을 타고 온몸으로 구석구석 퍼져나간다. 파리의 향기가 코 끝을 희롱한다. 파리는 계절과 상관없이, 갈색이어야 할 때가 잦다. 그래야 책 한 권 펼쳐 중얼거리기 좋고, 땅바닥을 툭툭 차며 걸어 다니기에 좋다.
가방에서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끄집어낸다. 내지 첫 장에 흑백의 사진으로 인쇄되어 있는 젊디 젊은 그가 나를 응시한다.
"랭보는 그토록 원했던 미지에 도달하였을까.
무언가를 책망당하는 듯 괜히 부끄러워진다. 페이지를 넘긴다.
*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은 랭보가 생전에 출판을 시도한 유일한 책이다. 1873년 브뤼셀에서 500부가 인쇄되었지만, 당시 대금을 지불하지 못해 가까운 지인들에게 몇 부만을 증정하였을 뿐 정식으로 출간되지는 못하였다. 이후 인쇄소의 창고에 보관되어있다가 랭보가 사망한 후 약 10년이 지난 1901년에 발견되어 1892년에 베를렌에 의해 랭보의 다른 유작 시집인 <채색 판화집>(Illuminations)과 함께 정식으로 출간되었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이 집필된 1873년은 랭보의 삶에서 가장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1873년 7월 10일, 그의 연인이자 문학적 동지였던 베를렌이 그에게 총을 쏘았고, 이 일로 인해 두 사람은 결별하게 된다. 베를렌은 감옥에 갇혔고 랭보는 고향 로슈로 돌아와 이 책을 집필한다.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이러한 배경으로 인해 랭보의 삶을 알고 있는 독자와 문학가, 연구가는 이 책에서 랭보의 자전적인 이야기와 그의 삶에 얽혀 있는 베를렌의 이야기를, 시의 상징들 속에서 찾으려 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