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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랭보의 두통을 나누는 파리의 아침

1. 랭보의 두통을 나누는 파리의 아침



1.

어느 날, 어린 랭보(Jean Nicolas Arthur Rimbaud)가 숲 속에 난 길을 지나가다가 갑자기 자기의 머리를 덩치 커다란 아카시아 나무에 처박았다. 당황스러운 눈빛으로 이마에 맺힌 핏방울을 걱정하는 친구에게 랭보가 말했다.

"나는 괜찮아. 이것은 생각하는 자가 걸어야 하는 가시밭길일 뿐이야."


그날 랭보가 걸어간 그 길이 자신의 여린 몸조차 이리저리 살피며 걸어야만 하는 좁은 오솔길이었는지, 걸음이라도 조금 자유롭게 뗄 수 있는 길이 었는지를 알지 못하는 것처럼, 그가 걸었던 길이 어디였는지, 누구와 함께 걸었는지 또한 알지 못한다. 사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고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푹 끼워 넣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타박타박 걸어가는 랭보가, 그날 ‘길’이라고 불렀던 그 길을 나 또한 걷고 있다고 여기면 족할 뿐이다.

<랭보> (Jean Nicolas Arthur Rimbaud, 20 October 1854 – 10 November 1891)


2.

잠이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어제의 밤이지만 시간으로 본다면 분명 오늘의 이른 새벽에 마신 검붉은 보르도 와인이 삼켰던 따가운 햇살 때문인지, 벌써 희미해져 버린 간밤의 꿈 때문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가벼운 두통에 어렵사리 눈을 뜬다.


가벼운 증상이야 간혹 있어왔지만 지금껏 별 달리 두통이란 걸 겪지 않고 살아왔기에 지끈거리는 머리로 깨어난 오늘 아침은 느낌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어색하다. 침대에 누워 아침 빛이 창을 뿌옇게 밝힐 때까지 잠자리를 뒤척인다. 미처 쳐두지 않은 커튼이 창 옆으로 밀려난 채 잔뜩 숨을 죽이고 있다.

발바닥의 욱신거림을 이제야 알아차린다. 간 밤, 울창한 숲 속으로 난 꿈속의 좁은 길이 ‘생각하는 여행자가 가야 할 길’이었던 것일까. 점점 짙어져 가는 아침의 상념을 진하게 우려낸 잉글리시 블랙티 한잔으로 비우는 것이 좋겠다.


3.

두통이란 건 아무리 가벼워도 신경을 날카롭게 만드는 법이다. 여행 캐리어를 뒤져 타이레놀을 찾아낸다. 잠시 속이 쓰리다. 온기가 남아 있는 블랙티가 삼킨 두통약 때문이라 여긴다. 게다가 아직 아침의 빈속이라서 더 그런 것이라고, 금방 가라앉을 것이라고 혼자 중얼거린다.


알 수 없는 두통의 원인이 궁금하다. 침대 머리의 작은 탁자 위에 얹어 둔 랭보의 시집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의 표지에선 푸르고 잘생긴 랭보가 무뚝뚝한 표정으로 객실의 천장을 응시하고 있다.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 머리를 제쳐 천장을 따라본다. 하얗게 칠해진 네모난 천장이 먹먹한 우주의 어느 한 구역 같다. 한참을 그렇게 서서 있자니 마치 어딘가를 중심으로 공전하는 듯한 회전이 느껴진다. 어지러움에 소파에 풀썩 주저앉는다.

나의 두통의 원인을 랭보의 두통에서 찾아낸다. 오늘 아침 난, 랭보의 두통을 나누어 갖는다.

랭보의 시집(캡쳐).JPG


4.

어느 날 랭보는 자신의 머리숱이 너무 많기 때문에 두통이 생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의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린다. 이제 갓 수계한 비구니의 머리처럼 젊은 랭보의 머리는 하얀 종이를 둥글게 말아놓은 것 같이 파리했을 것이다. 그 치료법에 대해서는 어떤 의학적 근거가 제시되진 않았지만 그것은 분명 두통의 숙주인 랭보에겐 상당히 적절했던 처방이었다고 믿는다.


때론 자신의 불분명한 주관이 명백한 객관이 되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 순간 랭보가 자신에게 내린 주관적인 처방은 분명 그의 두통을 덜어주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음은 사실을 꾸며내는 법이다. 속임수로 주어지는 약조차도 피처방자의 믿음에 따라서는 치료효과를 가지듯, 진실이란 것이 오직 인간의 마음 안에서만 찾아질 때도 있는 것이다.


누구보다 감상적이었고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가득했던 랭보에게 '자아가 만들어낸 위약'은 의사의 처방보다 더 큰 치료효과를 가졌을 것이라고 믿고 싶다. 두통의 해결책이란 게 결코 이성의 세계에 갇혀 있는 자아에게 있지 않고 감성의 세계를 자유롭게 날고 있는 초자아에게 있음을 랭보는 아직 어렸지만, 분명 알고 있었던 것이다.



5.

서쪽으로 길게 드리웠던 아침 그림자의 키가 한 뼘씩 줄어들어가고 태양은 남쪽 하늘 위로 한 뼘씩 오르고 있다. 점차 밝아지고 있는 태양을 따라 두통이 가벼워진다. 가만히 보니 두통이란 것도 어떤 주기를 따르는 것 같다. 낮의 시간에는 빛의 주기를 따르는 것 같으니 밤의 시간이면 어둠의 주기를 따를 것 같다.


물리적이지 않은 두통의 원인은 자신의 안에서 찾아볼 수도 있겠다. 내 안 어딘가에 숨어 지내고 있는 내면의 나는 다른 어떤 주기를 따르고 있고 그 주기가 현실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지금 숙소를 떠나지 않으려 하는 '여기의 나'는 나의 삶을 안주시키려는 나의 '정(thesis)'이고, 문손잡이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저기의 나'는 길 떠남을 유혹하는 나의 '반(antithesis)'이다. 그렇다면 이 여행길에서 찾아야 할 것은 나의 '합(synthesis)'일 것이다.

"어떻게 하면 서로 다른 이 두 개의 나에게 변증법적인 현명한 타협을 가르칠 수 있을까."


살아가면서 알게 된 것은, 삶에서는 어떠한 답도 결코 쉽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 아침의 가벼운 두통은 좀 더 가까운 곳에서 그 답을 찾아보라는 랭보의 은밀한 조언일 수도 있겠다.



6.

젊은 날의 어느 날, 머리를 빡빡 밀었다. '이부 머리'라고 불리는 짧은 머리로 나타난 나에게 툭툭 던져지던 언어들이 일벌의 날갯짓 소리처럼 아직도 윙 윙 울려대곤 한다. 사실 그것들은 그저 의미 없는 단어들을 책임 없는 목소리가 실어 나른 것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는 있다. 하지만 속이 빈 구형의 물체가 가끔씩 이유 없는 공명을 일으키듯 의미 없는 말들이 모여 웅 웅 진동을 일으킬 때가 있는 법이다. 그렇게 일어난 공명음과 날갯짓 소리는, 서로 다른 차원에 존재하지만 같은 공간을 차지하고 있는 듯 구분하기 어려운 하나의 음원을 가진 것이 아닐까, 궁금해지기도 한다.


혹여 다시 그날의 나처럼, 숲 속을 걷던 랭보처럼 머리를 깎아보면 어떨까. 그러면 랭보의 그날과 다른 그날의 내가 불쑥 모습을 드러내게 될까. 시집의 표면에 박제된 흑백의 젊은 랭보에게 묻는다.

"그래서 어땠었니. 두통은 나아졌었니."



7.

머리 깎은 젊지 않은 사내를 바라 볼 세상의 눈빛이 한낮의 햇살보다 날카로울 것 같다.

"다행이다. 그 시선을 버텨보려는 용기가 나질 않아서."

더 큰 용기란 건 괜한 만용일 뿐이라고 자위하는 나에게 스스로의 박수를 보낸다.

“정말 다행이다. 조금은 더 비겁하고 조금은 더 겁쟁이처럼 살아도 될 것이니.”


구름 한 점 없는 햇살에 짙은 보랏빛으로 잘 익은 포도송이들이 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능선을 따라 내려온 바람에 마른 흙먼지 한 덩이가 포도원 구석에서 몸을 일으킨다. 포도원에 딸린 낡은 주택 앞에 놓인 벤치에 앉아 나에게 그리고 랭보에게, 짧은 편지를 쓴다. 두통을 함께 나눈 오늘 아침의 감상을 글에 남겨 어린 랭보에게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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