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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유목민 카뮈의 부조리한 사랑과 떠남

파리의 유목민 카뮈의 부조리한 사랑과 떠남



뉴욕의 밤은 속을 알 수 없을 만큼 깊고 검다. 풀린 실타래 같이 엉켜버린 하루, 무엇 하나 제대로 손에 잡질 못하고 있다가 창 밖에 어둠이 내린 후에서야 서재 책장 머리에 앉는다. 네모난 박스에 눌러 담긴 채 태평양을 건너온 책에서는 잘 익은 더치커피의 향이 나는 것 같다. 눈길 가는 대로 모서리들을 쓰다듬다가 문득 한 권을 끄집어 든다. 코트 깃을 세운 채 담배를 문 한 잘 생긴 사내가 색 바랜 표지 뒷면에서 서재 천정을 응시한다.

“프랑스에는 중앙정부 외에도 또 다른 두 개의 정부가 지배하고 있다. 하나는 프랑스 중앙은행이고 하나는 갈리마르 출판사이다.”


이 이야기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를 점령했던 한 독일군 장교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 말을 한 독일 군인이 누군지에 대해선 굳이 찾아보지 않았지만, 그는 분명 프랑스인의 속살에 돋아 있는 돌기를 하나하나 만져 보았던 것 같다.

어쨌든 그 갈리마르 출판사가 출간한 수많은 책들 중에, 가장 오랜 기간 사랑받고 있는 책이 알베르 카뮈(Albert Camus)의 ‘이방인’이라 한다.


몇 장을 넘긴다. 누렇게 변한 군데군데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 보다는 ‘왜 사는가’에 대해 더 많은 질문을 가졌었던 젊은 날의 흔적이 낙서처럼 남겨져 있다. 하긴 카뮈, 그 조차 그것의 답을 알지 못했을 것인데 누군들 알겠는가.


돌이켜보면 시간의 흐름은, 카뮈나 나에게나, 그저 흐르는 바람 줄기 같은 것이었다. 파리의 유목민이었던 카뮈, 루르마랭의 파란 하늘 아래에 누워서야 비로써 온전히 쉬고 있는 그에게, 사랑과 떠남이란, 부조리한 상황에 빠진 그의 주인공들이 그랬던 것처럼,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무엇이 지나 않을까.



카뮈의 연인 마리아 카사레스


마리아 카사레스(María Casares, 1922년 11월 21일 - 1996년 11월 22일)는 연극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카뮈와 인연을 맺게 된 여인이다. 연극이란 게 원래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서 온 것이니 유부남이었던 카뮈와 마리아의 사랑에는 처음부터 비극적 요소가 내재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1944년 카뮈의 연극 ‘오해’의 작가와 여배우로 만난 그와 그녀는 첫 순간부터 강렬한 끌림이 있었다고 한다. 어쨌거나 스페인 내전 기간 중에 에스파냐의 국무총리를 지낸 산티에고 카사레스 키로가의 딸인 마리아는 그녀만의 강렬한 개성으로 이 연극 속의 여주인공 역을 성공적으로 연기해 낸다.


원래 모든 인연에서 때가 있는 법이다. 작가 카뮈에게 작품 ‘오해’는 카뮈식 부조리극의 서막과도 같은 작품이었다. 그 시작을 같이 한 젊은 여자배우와의 사랑은 이제 때 맞은 운명이 엮은 벗어날 수 없는 사랑이 된다.

그 후 카뮈가 세상을 떠나기 전 16년이란 긴 시간 동안 마리아는 카뮈의 무대에 올랐고, 카뮈는 자신의 무대에 선 그녀를 지켜본다.


여러 활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카뮈는 늘 논쟁에 휩싸이기 마련이었고, 마리아는 지치고 절망한 카뮈의 곁에서 휴식과 위안을 준 뮤즈였다. 또한 그녀는 카뮈에게 그의 고향인 알제리의 초록 들판과도 같았으며 파리라는 사막에서 수풀 우거진 오아시스이기도 하였다.


카뮈는 아내인 프랑신 포르에게선 아이들의 엄마로서의 우정과 애정의 ‘사랑’을 가졌던 것 같고, 마리아에게선 열정과 욕정의 ‘사랑’을 느꼈던 것 같다.

카뮈식의 이중적인 사랑에 대해 그를 ‘나쁜 남자’ 라거나 ‘이기적인 인물’이라고 해야 할 것인지, 또는 ‘절대 사랑’이라는 부조리한 상황에 빠져버린 것인지에 대해선 알 길 없다. 어쩌면 스스로 설정한 부조리한 상황을 핑계 삼아 두 여자 사이를 오간 것을 사랑이란 이름으로 즐긴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세상을 떠난 카뮈가 루르마랭의 공동묘지로 향하던 날, 아내 프랑신 포르가 형 뤼시엥과 오랜 친구이자 시인인 르네 샤르(René Char)와 함께 행렬의 앞에 섰다고 하니, 그날 파리의 하늘에선 마리아의 슬픔을 담은 겨울비가 내렸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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