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간은 늘 부지불식간에 스쳐 지나가기 마련이다. 그러니 때 지난 후에야, 시간이 지나가 버린 뒤에야 후회하게 되는 것들이 어디 한 두 가지일까. '괜찮다, 인간이라서 그런 게다, 인간이니깐 그렇다, 정말 괜찮다'라고 혼자 위로한다.
오늘은 조금 더 욕심을 내어도 좋겠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마음을 활짝 열어, 더는 때가 늦어지지 않게 그것과 진하게 눈 맞춤해야겠다.
"하지만 어쩌지. 실루엣만이 어렴풋하게 더듬어질 뿐이니. 시간의 변색 작용 탓일 거야. 울컥해지는 것은."
시간이 지닌 가장 강력한 힘은 색바람이고 색바람의 결과는 지워버림이다. 그래서 지워지기 전에, 잊어버리기 전에 마음 한 편에 미루어둔 것들에게 시간을 할애하다 보면, 그러지 못하는 다른 것들이 배고픈 아기 새처럼 입을 쫙쫙 벌려 아우성치기 일쑤이다.
그 참, 언제 다시 길을 나서려나. 글줄에 지나간 시간을 풀어 남기는 일이 살아가는 의무가 되어서는 안 되겠지만 오늘도 바람기 가득 차오른 욕심은 또 다른 길을 기웃거리게 만든다.
어떤 연유로 인해 서건, 다시 흘러 들어온 곳이 파리이다. 파리라는 그녀는, 이름 앞에 어떠한 수식어가 붙여진다 해도 어색하지는 않지만, 거추장스러운 싸구려 장식일랑은 거부할 것 같다. 그래도 상관없다. 나는 지극히 이기적인 사내이기에. 나만 좋으면 될 뿐이니.
나에게 파리는 음악 같고, 소설 같고, 연극 같고, 커피 같고, 사랑 같고, 연인 같은 낭만과 사색의 도시이다. 난 지금 그 파리의 거리와 하늘과 햇살과 바람을 향해 사색의 골짜기를 걸어간다.
파리의 유혹은 라뒤레(Laduree) 가게의 마카롱의 속삭임보다 달콤하다. 파리라는 도시의 감미로우면서 향긋한 맛에 길들여진 사람은, 비록 허름한 옷에 조악한 액세서리를 걸쳤을 뿐이라고 해도 세느의 바람에 옷깃을 여미는 파리지앵이나 파리지앤느가 되려고만 할 뿐 결코 파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파리는 작가 샤를르 모리스 탈레랑이 커피를 두고 했다는 말처럼 “악마처럼 검고 지옥처럼 뜨거우며 사랑처럼 달콤한” 도시이다.
파리는 악마의 유혹이 곳곳에 즐비한 선택된 자들의 도시이다. 삶에 있어 악마적 요소를 즐기려는 것은 인간의 또 다른 내면이기도 하다. 보이지 않고 만질 수 없는 것에 집착하는 인간의 행위는 그것의 발로가 가져오는 의식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글을 쓰는 것 또한 그 의식의 하나이기도 하다. 그래서 애초부터 악마적 요소를 내재한 인간이 글쟁이가 되는 것이다.
궁금하다. 악마의 유혹에 빠져 찾아온 곳이 파리인 걸까. 내 안의 악마적 요소가 파리로 이끈 것일까. 비밀의 정원에 피어난 장미의 유혹에 빠진 사이, 퍼퓸의 향기에 글줄이 가리가리 찢어진다고 한들, 파리에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종일 걸어 다니다가 돌아온 숙소에서 깨끗이 정돈된 침대 위에 몸을 툭 늘어뜨린다. 하얗게 칠해진 천정에 그들의 이름을 적어본다. 이십 대의 나에게 파리라는 단어는 카뮈이자 랭보였다. 특히 랭보의 감성적 천재성은 카뮈의 이성적 천재성보다 늘 앞자리에 앉아, 몽롱하지만 빛 강한 두 눈으로 그때의 나를 쳐다보곤 하였다.
왜 랭보는 파리라는 도시의 유혹에 빠져버린 것일까. 아프리카에서 멈춰버린 그의 삶의 시계조차, 그가 이 파리를 떠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이었을까. 개선문이 가까운 객실에서 오늘 랭보는 또 다른 천재, 베를렌(Paul-Marie Verlaine)의 다정한 연인으로, 파리라는 지옥에서 달콤하고 향긋한 유혹의 한 때를 보낸다.
지난 계절의 끝, 인생의 봄이었던 스물의 어느 날, 랭보와 베를렌에 대해 어딘가에 남겨두었던 글줄을 뒤적인다. 천재들에게 있어, 이성의 경계를 넘어선 지독한 사랑이란 게, 이성조차 마비시켜버린 자유인지, 랭보의 시집처럼 <지옥에서 보낸 한 철> 일뿐인지, 그것의 대답은 이곳 파리에서조차 찾아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