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시가 그의 삶만큼이나 난해하다고 하는 것은, 그가 상징주의 작가라는 것과 직접적으로 맥이 닿아있다. 따라서 랭보의 사상과 그의 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말에 프랑스를 중심으로 사실주의와 자연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상징주의(Symbolism)’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상징(Symbol)’이란 조립, 결합, 연결을 의미하는데 하나의 이미지가 그것을 암시하거나 환기시키는 다른 또 하나의 관념이나 이념과 연결되어 있고, 그 관념 또는 이념은 신비적인 실재實在이거나 초월적인 실재인 것을 일컫는 표현이다. 또한 문학에서의 ‘상징’을 사전적으로 본다면 추상적인 사물이나 관념 또는 사상을 구체적인 사물로 나타내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랭보는 미지에 도달하기 위해 끊임없이 현실 세계를 분해 및 재창조하고자 하였고, 이를 위해 파괴와 재창조와 현실에 대한 반항을 통한 지적 유추, 은유와 상징으로 무질서의 질서를 그의 삶과 시어에 사용함으로써 그와 그의 시에, 어쩌면 의도적으로, 난해성을 불어넣었다.
그래서 랭보와 파리는 무척이나 닮아 있는 것 같다. 파리의 하늘을 올려다볼 수 있는 카페에 앉아 긴 시간을 묵혀두었던 랭보의 시집을 펼쳐 드니 그의 상징주의 문학에 한걸음 더 다가선 것 같이 느껴진다.
그의 시를 읽고 해석하던 한 시절의 영원히 초록빛만이 영롱하게 반짝일 것 같았던 들판을 뛰어다닌 그날들처럼, 모서리 없는 눈부신 파리의 하늘을 높고도 넓게 비행하는 환상에 빠져든다.
그렇게 한참 동안을 날개를 퍼덕이며 파리의 하늘을 유영하다 보니 자신을 집어삼킨 삶의 껍질로부터의 완전한 자유가, 랭보가 시를 정복하게 해 준 도구일 수 있다는, 비밀스러운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랭보와 베를렌, 카프카와 까뮈 같은 천재 작가들은 오직 자신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삶을 살아간 것 같다. 그러니 결코 그들과 같은 범주에 갇힐 수 없는 일개 범부의 잣대를 그들과 그들의 작품에 어설프게 들이대다 보면, 보잘것없는 억측으로 인한 오류가 무수하게 생겨나기 마련일 것이다.
이성의 영역을 벗어난 초이성만이 그들의 삶과 그들의 작품 세계를 제대로 받아들이게 한다는 것을 늦게나마 깨닫기는 하였지만, 안타깝게도 부족하기만 한 지식의 역량은 비이성을 초이성이라고 우기도록 종용하고 있을 뿐이다.
천재성에는 인간으로서의 결핍과 허술함이 동거하기 십상인가 보다. 인간에게 있어 완전한 채움이란 결코 허락되지 않는 것 같다. 넘쳐나는 것이 있으면 어딘가에는 그만큼 부족해지는 것이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인 것이다.
이 세상은 채운만큼 비워지는, 그래야만 하는 제로썸(Zero Sum) 게임의 공간이다. 비록 그렇다는 것을 완전히 받아들인 것은 아직 아니지만, 천재에겐 그 비어지는 부분의 아픔이 범부의 그것보다 훨씬 더 큰 것 같다.
어쨌든 그들에게도 우리에게도 세상은, 비우라는 대도 비울 수 없는 징벌적 공간인 셈이다. 제대로 알지 못한 채, 무언가를 그곳에 채워 넣으려는 발버둥이 이 세상을 잔인한 전장戰場으로 만드는 것은 아닐까.
랭보는 자신의 내면의 그 빈 공간을 상징이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막연한 것들로 채우려 했는 것 같다. 나이 차 많은 연상과 연하의 사랑을 나타내는 ‘메이 디셈버 로맨스 (May-December Romance)’처럼, 초록의 물기로 가득 찬 5월의 싱그러움과, 갈빛에 서걱거리는 12월이 공존하는 희망과 절망의 대지인 아프리카에서 랭보의 행적을 더듬게 되는 것은, 삶의 기원을 찾으려는 그의 회귀의 여정이었을 것이다.
거칠지만 파릇한 물이 가득 오른 5월의 랭보와 시를 정복해 버린 원숙한 12월의 랭보에게 아프리카는 초록의 물기를 한껏 끌어올린 더위와 거친 사막과도 같은 메마른 들판이 공존하고 있는, 충동적인 쾌락과 드넓은 자유의 대지였을 수 있다. 그래서 랭보에게 아프리카는 또 다른 파리였던 것이다.
랭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천재는 재능이 아니라 절망적인 처지 속에서 만들어지는 돌파구’라는 샤르트르의 말을 떠올려 봐도 좋을 것 같다.
랭보는 때때로 절망의 구덩이에 스스로를 던져 넣고서는 그 속에서 발현되는 자신의 천재성을 쾌락처럼 즐긴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자학을 통한 유희와, 자학으로의 도피는 천재에게서 종종 발견되는 충동적이고 의도된 행보이니 이 추측에 당위성을 부여해도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랭보를 아프리카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은 일종의 자학 때문이라 할 수 있으니, 랭보가 랭보일 수 있게 한 파리의 생활 또한 랭보에겐 자학이었다고 할 수 있고, 랭보가 시를 쓴 것은 그 절망적인 처지에서 찾아낸 돌파구였다고 볼 수 있다.
랭보를 떠올리는 동안 카페의 구석 자리 한 테이블은 온전히 랭보만의 것이 된다. 그를 알아보고 다가서는 몇몇 사람들 속에 슬그머니 끼어들어 낮은 목소리로 묻는다. 기록에 남아 있는 랭보와의 지난 대화 속에서 찾아낸 질문이 랭보의 답변으로 기다린다.
"왜 파리를 떠나지 않고 있나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랭보의 입술이 열린다.
"기다리고 있어요. 아직 기다리고 있다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