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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정원, 플로렌스의 돌길을 걸으며

르네상스의 정원, 플로렌스의 돌길을 걸으며


고개를 들든 머리를 떨구든, 눈길 닿는 건물이며 걸음 디디는 골목마다에서 맞닥뜨리는 르네상스의 흔적들 앞에서, 경외심 가득한 표정을 짓는 것 이외에는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는 도시가 이곳 플로렌스이다. 플로렌스는 이방인을 왜소하게 만드는, 그래서 더욱 아름답게 느껴지는 아이러니한 도시이다.

 

이 돌길 위에 마련한 거처에서 며칠이라는 시간을 더 묵어갈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두고 온 행복을 꿈꿀 수 있으니 정말 다행이다. 어쩌면 이것이 이기적인 자기변명일 뿐이라고 해도 플로렌스가 이방인에게 허락하는 위안이기에, 그냥 받아들이면 된다.   


며칠 전, 설렘을 가득 안고 플로렌스라고도 불리는 피렌체에 발을 디뎠다. 이탈리아식 명칭인 피렌체와 영어식 명칭인 플로렌스 중에서 무엇이라 해도 상관없다. 때와 장소에 따라 혼용되고 있는 이 두 개의 이름에서, 누군가에게 붙여진 꼬리표 또한 한 두 개쯤 더 있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가져본다. 


나의 경우에는 타의에 의해 부여된 성과 이름, 나의 의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외에도 젊은 시절의 어느 날인가부터 사용하고 있는, 나의 의지가 지어낸, 몇 개의 명칭들이 있다. 그러한 언어적 상징들은 나를 지칭하면서 또한 나의 정체성을 표출하는 강력한 표식으로서의 역할을, 번거로울 때도 있지만 때와 장소에 맞추어 아주 적절하게 수행하고 있다. '나의 정체성이 바로 나'라는 말은 '나의 명칭이 나'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피렌체와 플로렌스 또한 그런 식으로 불려진다면 애써 고개 돌려 삐치는 일 따위는 없겠다. 


어쨌거나 오늘은 플로렌스란 이름에 더욱 마음 가는 날이기에, 길 나서면 만나는 첫 꽃집에서 플로랄 한 꽃다발을 가득 안은 이방인이 되어도 좋겠다. 플로렌스란 단어를 중얼거리며 돌길을 걷게 되면 진한 꽃향기의 마법에 빠져버릴 것 같다는 짧은 상상에 피식 입꼬리가 올라간다. 돌길에 자욱하게 깔린 플로렌스의 향기가 아침 호수를 집어삼킨 물안개처럼 온몸을 들인다. 바람의 촉촉한 속삭임을 따라서 그 꽃향기 속으로 한 걸음씩 가까이 다가선다.  

 

플로렌스의 꽃향기는 ‘꽃’이라는 물질적 존재가 뿜어내는 향기에만 있지 않다. 플로렌스에서의 꽃향기는 인문학과 예술뿐만이 아니라 응용기술조차 미학의 경지로 승화시킨 르네상스의 정원에서 뿜어 내고 있는 향기이다. 인문학이라는 꽃과 예술이란 꽃, 응용기술이란 꽃이 자연스럽게 피어난 정원, 시간과 특정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 신비로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는 아름다운 정원이 바로 플로렌스인 것이다. 


인간이 가진 예술적 감성에 물리적 지식이 더해져 쌓아 올린 건축물들과 성전들, 다시 태어나지 못할 천재 예술가들의 회화작품들과 조각작품들이 르네상스라는 조류를 일으켰고, 그것을 통해 인간은 찾지 못할 것과 이룰 수 없는 것을 갈구한 것일 수 있다. 자신을 창조한 신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서려는 피조물의 갈구가 르네상스의 원동력은 아니었을까.     


그 참, 피렌체는 이방인을 반기면서도 왜소하게 만드는 도시란 말인가. 피렌체에서는 어찌 이리 움츠려 들게 된단 말인가. 자그마한 무엇이라도 제대로 할 수 있는 게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걸음마다 작아져만 가는 나를 마주하였기에, 여러 해 전 처음으로 피렌체를 찾았을 때는, 이 돌길을 걷는 일 따위는 다시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에 서 있는 나는 대체 누구란 말인가. 서성이면서도 길을 가고 있는 이 이방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어째서 나는 이 길을 다시 걷고 있는 것일까. 지나온 무수한 길들이 빛바랜 흑백영화처럼 피렌체의 하늘 스크린에 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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