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퀘테레에서는, 두서없이 밀려왔다가 한 순간 쓸려가 버리는 종잡을 수 없는 환영에 시달리다 깨어난 어느 날의 아침처럼 간혹 식은땀에 젖기는 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신열에 시달리지는 않는다.
아마도 잇대어 불어오는 지중해의 바람이 이내 물기를 닦아주기 때문인 것 같다.
덕지덕지하게 파헤쳐 놓은 몇몇 공사장들은 시간이 할퀴고 지나간 마른 생채기 같다.
궁금하다. 대체 어떤 모습이 친퀘테레란 말인가.
상처조차 아름답다고 한다면 역설이라고 받아들이게 될까, 한낱 궤변일 뿐이라는 말을 듣게 될까.
굳게 문이 닫힌 쓸쓸한 가게들과, 어수선하다 못해 스산하게 느껴지는 숙박시설들을 지나다 보면 여느 관광지의 비수기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하지만 친퀘테레에게 단지 ‘관광지’라는 텍스트를 사용한다면, 염원만을 품은 희망 없는 여행자의 자조적 한탄이라는 비난을 혹시라도 받을까 봐 조심스러워진다.
친퀘테레에게는, 문득 해안절벽기슭에 인 바람 한줄기와도 같은 짧긴 하지만 허허하지 않은 어떤 텍스트를 안겨주어야만 할 것 같다.
지금이 바로 친퀘테레의 시간이다.
스스로를 위한 스스로의 시간을 오롯이 보내고 있는 것이 바로 지금이다.
자신의 절정기로 돌아가기 위한, 그때의 자신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친퀘테레만의 시계가 거꾸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 지금이다.
그래서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골목이며 담장이며 마을 곳곳마다 ‘지중해라는 기적적인 존재와, 지중해를 향한 애절한 사랑으로 새로워진 삶’을 품은 갈색의 씨앗 <비타노바>가 잔걸음 같은 낮은 숨을 새근새근 거리면서 코발트빛 발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다.
<비타노바>(La Vita Nuova)는 알리기에리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가 1292년-1293년 경에 집필한 저서의 제목으로 이탈리아어로 <새로운 삶>, <신생>(新生)을 의미하는 텍스트이다. <비타노바>라는 제목이 뜻하는 것은 ‘베아트리체라는 기적적인 존재와, 그녀를 향한 사랑으로 새로워진 삶’ 또는 ‘베아트리체를 향한 사랑으로 새롭게 된 삶(vita)'이라고 할 수 있다. 국내에서는 단테의 이 작품을 주로 <신생>이란 제목으로 소개하고 있다.
골목마다 여행자의 걸음 북적이는 성수기의 친퀘테레를 상상해 본다.
골목과 골목에서, 가게와 가게에서, 카페와 카페에서, 숙소와 숙소에서, 이방인과 이방인의 틈을 헤집고 다니는 것이 친퀘테레에서 기대하는 모습인 걸까.
어떤 누군가는 그럴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누군가는 커다랗게 손사래를 칠 것이다.
언젠가 이 자리를 다시 찾는다 해도 지금이라는 시간과 이곳이라는 공간의 조화가 지극한 아름다움을 엮어내고 있는 바로 이맘때가 좋겠다.
이러 때면 잠시 눈을 감아도 좋다.
결 좋은 울림 같은 바람의 속삭임이 귓불을 쓰다듬는다.
지중해의 파란 햇살과 다섯 개 해안 마을이 품어내고 있는 신비로운 풍경은, 운행시간표가 주는 시간의 긴장감과 군데군데에서 마주치는 공사의 소란에 파란 물감을 잔뜩 찍어 덮어버린다.
여행자의 기억은 생각보다 단순하다.
애써 카메라에 담지 않고, 애써 망막에 남겨두지 않으면 가시 같이 날카로운 기억도 지워버리기 일쑤이다.
잔 공사 몇 개가 친퀘테레의 아름다움에 상처를 내지는 못한다.
철 지난 비수기의 친퀘테레에서 저 정도야 오히려 자연스러운 모습이 아닐까.
더 이상을 바란다면 어린아이의 칭얼거림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친퀘테레 또한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땅이기에, 있어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은 인간의 삶이 호흡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기억하고자 하는 것과 기억하려는 것만 기억할 수 있는 인간의 왜곡능력이 고맙다.
적당한 때의 적당한 왜곡은 삶을 단순하게 만들어준다.
삶에서의 단순함은 때때로 삶을 풍요롭게 해 준다.
그래서 왜곡을 막아서지 않는 삶에서 안락함이 느껴지는 것이다.
생각의 흐름을 따라 돌아다니는 사이에 머리 위를 불어가던 바람이 빛을 바꾸었다.
코발트빛 바다와 파란 하늘 아래에서 눈부신 하얀 원피스를 입은 티끌 하나 없는 말간 섬처녀의 모습이 눈에 담긴다.
친퀘테레 그곳에는 두고 온 설렘이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