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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전기: 판돌포 푸치 시기를 통한 카라바조 이해

카라바조 전기: 판돌포 푸치 시기를 통한 카라바조의 이해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오직 그가 요구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뿐이었다.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에게 요구한 그림이란 게 그의 성공(재기)을 위한 로비용 그림인지, 내다 팔아서 경제적 이익을 취하기 위한 판매용 그림인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카라바조가 이 기간에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들을 통해 어느 정도의 실마리는 찾아볼 수 있다.


카라바는 이 기간에도 그림을 그렸다.

따라서 이 기간 또한 ‘카라바조의 작품활동 기간’에 포함시키고는 있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작품활동’을 했다고 표현하기에는 어색한 부분이 있다.


학자들은 카라바조가 1592년에서 1593년 사이 몇 개월 정도를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물렀다고 보고 있다.

카라바조가 밀라노를 떠나 로마에 도착한 것이 1592년이기에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문 것은 로마 초입기에 있었던 일이다.


그렇다면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에서 그림을 그린 기간은 넓게 잡더라도 1592년과 1593년이 된다.

카라바조의 작품 리스트에서 이 기간에 해당하는 작품은 총 6점이 있으며 그중에서도 동일한 주제로 총 4점이 발견된 <과일 껍질을 깎는 소년>(Boy Peeling Fruit)이 가장 유력하다고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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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 작품 리스트>(1592-1593년)


다음으로 주목할 점은 리스트에 있는 이 시기의 작품들이 캐비닛 그림, 즉 정물이나 인물을 그린 소품이라는 것이다.

만약 판돌포 푸치가 정치적인 목적에서 로비용 그림이 필요했다면 좀 더 규모 있고, 종교적인 내용에 바탕을 둔 작품을 요구했을 것이다.


예술품으로 로비를 하려 했다면 무엇보다 로비 대상자들의 예술적 안목을 먼저 고려했을 것이다.

판돌포 푸치의 로비 대상자들은 당연히 바티칸의 고위 성직자와 바티칸에 영향력을 가진 귀족이었다.

그들은 틀림없이 높은 수준의 교육을 받았으며 예술에 대한 안목 또한 누구보다 높았을 것이다.

하지만 카라바조의 1592년과 1593년 작품 리스트에서는 그들을 만족시킬 만한 수준의 작품은 보이지 않는다.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자신의 집에 데려간 것을 두고 대부분의 연구자들은 ‘로비용 그림’이 필요해서라고 주장하는데 한마디로 난센스이다.

판돌포 푸치가 겨우 캐비닛 그림을 가지고, 그것도 명성 있는 기성 화가의 그림이 아니라 일개 무명 화가의 그림으로 로비를 시도하였을까, 굳이 답을 해야 할 가치조차 없는 질문일 수 있다.


그렇다면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자신의 집에 들인 것이 경제적인 목적 때문이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사회적 상황과 카라바조의 상황을 좀 더 들여다봐야 한다.


당시 로마의 많은 화실들과 그림상들이 그림의 제작과 유통, 판매를 통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고 있었다.

이를 위해 화가를 직접 고용해서 그림을 그리게 하거나, 외부 화가가 이미 그려 놓은 그림을 싼값에 사 와서 되팔기도 하였다.

어느 정도 경제적인 성취를 이룬 사람에게 그림은, 특히 캐비닛 그림은, 집안 벽면에 걸려 있어야만 하는 필수적인 장식품으로 인식되던 시대였다.


누군가를 고용한다는 것은 철저하게 경제적인 논리에 기반을 둔 행위라는 것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화가를 직접 고용하는 것은, 고용된 화가에게 그림을 그리게 하는 것이 외부 화가의 그림을 사 오는 것보다 시간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더 효율적이라는 전제조건을 충족할 때만 이루어지는 행위였다.

따라서 고용된 화가는 고용주가 수익을 낼 수 있을 만큼의 그림을 그려야 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어차피 장식용 캐비닛 그림을 구입하면서 화가와 작품성을 따지는 구매자는 없었을 것이다.

액자에 집어넣어 집안 거실이나 침실의 벽면에 걸어 두면 가격만큼의 가치는 하는 것이 장식용 캐비닛 그림의 속성이다.


당시 로마 저잣거리의 화가들은 ‘화가로서 자신의 그림’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구매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구매자의 그림’을 그리면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성공하면 ‘화가로서 대접’을 받지만 성공하기 전까지는 ‘한낱 거리의 화가로 취급’ 받는 것이 무명 화가의 삶이기에 그들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미술품을 거래하는 현장 또한 물건(미술품)을 사고파는 행위가 이루어지는 시장이었기에 가격은 구매자의 구매 욕구를 자극할 수 있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수요가 있다고는 하지만 캐비닛 그림을 공급하고 판매하는 시장의 경쟁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당시 로마는 약 2천 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이 일거리를 찾기 위해 혈안이 되어 북적거리는 상황이었다.

수요보다는 공급이 많았기에 박리다매, 즉 가능하면 더 싼 가격에 되도록 더 많은 그림을 팔아야만 수익을 낼 수 있는 ‘기울어진 구조’가 미술품 시장에 형성되어 있었다.


상황이 이러다 보니 화가들은 가로와 세로 각각 약 60센티미터 정도인 캐비닛 그림을 비슷하게 빠르게 많이 그려내고 있었다.

카라바조의 로마 초입기 작품인 <과일 껍질을 깎는 소년>(Boy Peeling Fruit)이 동일한 주제, 비슷한 크기, 거의 같은 구도로 4점이나 발견된 것도 이와 같은 당시의 시장 상황과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기에서 [카라바조 작품 리스트]를 다시 살펴보자.

이 시기 카라바조의 작품들 또한 캐비닛 그림들이지만 그 수가 많지 않다.

1592년과 1593년을 통틀어도 6점이 전부이다.


당시의 시장 상황을 고려해 보면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또한 판돌포 푸치가 경제적인 목적으로 카라바조를 집에 들였다고 주장하기에는 작품의 수가 적어도 너무 적다.


물론 카라바조가 이 기간에 더 많은 캐비닛 그림을 그렸을 수는 있다.

아니 분명 그렸을 것이다.

언젠가 그 그림들이 몇 점 정도는 더 발견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더라도 ‘경제적인 측면에서 충분한 수’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거장이 된 후의 카라바조는 일 년에도 대작 몇 점씩을 그려낸 천재 화가이다.

그런 카라바조였기에 캐비닛 그림 정도는, 더욱이 젊고 배고픈 무명 화가시절에는, 하루에도 몇 점씩 그리는 일이 전혀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어떠 이유에선지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물던 기간에 그린 작품의 수가 너무 적다.

카라바조가 그 기간에 더 많은 그림을 그렸는데도 대부분이 소실된 것인지, 병에 걸려 그림을 그리지 못한 것인지, 판돌포 푸치에 대한 불만으로 의도적으로 그리지 않은 것인지, 그림을 그리지 못할 다른 사유가 카라바조에게 있었는지, 지금의 우리로서는 진위를 파악할 방도가 없다.


... ...


카라바조의 입장에서는 판돌포 푸치의 성공을 위해 그림을 그리는 일이, 물론 그 일 덕분에 초입기 로마에서 처음으로 안정적인 거처를 마련하였다고는 하지만,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결코 만족스러운 상황은 아니었다.


먹을 것과 묵을 곳, 화구와 그림 그릴 공간을 안정적으로 마련하게 되었으니 처음에는 육체적으로는 만족했겠지만 그 만족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고 시간이 갈수록 정신적으로는 점점 더 심한 갈등에 빠져들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화가로서 자유로운 창작 활동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카라바조를 집안으로 들인 판돌포 푸치의 의도와 카라바조가 가졌던 생각의 간격이 넓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카라바조는 ‘자유로운 작품 활동’을 위해, 자신의 실력을 인정하고, 아무런 조건 없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후원해 줄 ‘진정한 후원자’를 찾으려고 했지만 판돌포 푸치에게 카라바조는 일거리를 찾아 거리를 배회하는 수많은 무명 화가들 중에서 자신의 선택을 받은 ‘운 놓은 무명 화가’였을 뿐이었다.


게다가 당시 최고의 명문가 중에 하나인 콜론나 가문이 소개했으니 그 가문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카라바조가 최선을 다해 자신을 받들 것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이 숙식을 제공하면서 고용했으니, 다른 고용주들이 고용한 많은 무명 화가들처럼 고용주인 자신이 요구하는 그림을 최선을 다해서 그릴 것이라고, 그게 당연한 것이며 카라바조가 그 정도의 실력은 갖추었다고, 확신했을 것이다.


카라바조와 판돌포 푸치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는 대부분의 문헌에서는 “이 시기에 카라바조는 제공되는 음식이라고 해봐야 '채소(샐러드)가 전부‘라고 불평할 정도로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록에 대해서 당시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가 요구하는 그림을 최선을 다해 그렸는데도 그러한 대접을 받은 것인지, 그렇지 않았기에 그런 대접을 받은 것인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카라바조 작품 리스트를 들여다보면 아마도 후자에 해당하지 않았을까, 의구심을 갖게 된다.

그림의 숫자를 놓고 보면 판돌포 푸치는 자신이 숙식에다가 화구까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지원하는 데도 카라바조가 최선을 다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에 대해 한 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판돌포 푸치가 채식주의자이거나 가급적 육식을 자제했을 가능성 또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자신이 그렇다고 해서 다른 이에게까지 채식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의 집에서는 육식을 자제했을 수는 있다.

어쨌거나 이제 갓 스물을 넘긴 혈기왕성한 카라바조에게는 채소보다 기름진 음식이 더 필요했겠지만 판돌포 푸치의 집에서는 이 욕구를 채울 수 없었다.


이 시기에 대한 기록들은, 카라바조가 생전에 늘어놓은 판돌포 푸치에 대한 여러 가지 불평이 지인들과 주변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져 오던 것을 카라바조의 사후에 텍스트로 옮긴 것이다.

따라서 카라바조 특유의 주관적 과장에다가 얘기를 전달한 사람의 생각과, 옮겨 적은 이의 각색이 실제로 있었던 일들에 살을 붙였을 것임을 감안해야 한다.


아무튼 카라바조는 판돌포 푸치가 자신을 데리고 있는 것이 “예술가로서 작품 활동을 후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싼 값에 부려 먹을 수 있는 그림쟁이가 필요해서가 아닌가.”라는 갈등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 하루하루 계속되었다.


사실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집에 데려온 것은 ‘후원자’로서가 ‘고용주’로서 한 것이었기에 최소한의 투자로 좀 더 많은 이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은 그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에 야심 가득한 젊은 카라바조로는 자신을 한낱 거리의 화가 정도로 여긴다는 수치심을 떨쳐버릴 수 없었을 것이다.


물론 카라바조가 처음부터 그런 상황을 알아차리긴 했지만, 그때는 다급한 마음에 애써 무시했을 수 있다.

당장에 묵을 곳과 먹을 것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누구나 신중하지 못한 결정을 내리게 된다.


어쨌든 결국 카라바조가 판돌포 푸치의 집에 머무는 동안 한 일이라곤, 판돌포 푸치를 위해 로비용 그림을 그리거나 내다 팔 그림을 그리는 일이었다.

판돌포 푸치의 입장에서 카라바조는, 당시 로마로 몰려든 수많은 무명 화가들 중에서 자신의 선택을 받은 한 명의 화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기에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판돌포 푸치가 카라바조를 대우한 방식을 두고, 그가 원래부터 ‘인색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이었다고 표현하는 연구자들이 있다.

하지만 16세기말 로마의 예술품시장 상황과 그가 처했을 현실에서의 상황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보면, 카라바조를 그 정도로 대우하는 것이 당시로서는 타당하였으며, 그 이상의 대우는 그 또한 경제적인 문제로 인해 어려웠을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그 당시 판돌포 푸치는 그의 주된 수입원이 끊겨버린 상태였다.

판돌포 푸치에게 있어 교황의 사망에 따른 교황 형제와의 단절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들과 연결 고리가 끊겨 버렸거나 아주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기에, 자신이 가진 한정된 자산 내에서 새로운 성공을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있었다.


당시의 가톨릭 사제들이 성공한다는 것은 교황청의 고위 성직자가 된다는 것이었고, 그것을 위해서는 경제력의 뒷받침이 필요했다.

이에 판돌포 푸치는, 비용 면에서는 저렴하면서도 이왕이면 실력까지 갖춘 신진 화가를 찾고 있었고 이때 소개를 받은 것이, 당시 로마에서 가장 유력 가문 중에 하나였던 콜론나 가문이 추천한 화가가 카라바조였던 것이다.


당시 콜론나 가문이 카라바조를 추천한 것은, 화가 카라바조가 어린 시절에 카라바조 지역에서 지내면서 맺었던 인연 때문이었다.

어쨌든 판돌포 푸치는 카라바조를 추천받음으로써 명망 있는 콜론나 가문과 관계를 좀 더 깊이 이어갈 수 있을 것이고, 그로 인해 교황청과의 간접적인 연결이나마 도모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라고 여겼을 것이다.


카라바조의 입장에서 보면 판돌포 푸치를 만나 그의 집에 들어간 것은, 로마에서 자신에게 찾아온 첫 번째 기회라고는 할 수 있었지만, 그 기회란 것이 단지 먹을 것과 거처를 해결하는 현실적인 것이었을 뿐, 예술가로서의 그를 성공으로 이끌어 줄 수 있는 진정한 기회는 아니었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후원자를 찾았지만 판돌포 푸치는 고용주에 불과했던 것이다.

결국 카라바조는 단호하게 판돌포 푸치의 집을 떠났다.

카라바조와 판돌포 푸치의 길지 않았던 만남은 서로에게 상처만을 남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콜론나 가문은 1592년에는 카라바조를 직접적으로 후원하려 하지 않고 판돌포 푸치라는 사제를 소개해 주었지만 결국에는 후원자가 되어 카라바조가 로마에서 성공할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카라바조가 로마에 갓 도착한 1592년에는 화가로서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나 방법이 전혀 없었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의 실력을 펼쳐 보일 수 있는 제대로 된 작품을 그릴 기회가 없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변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후원자를 찾겠다는 무명 화가가, 로마로 오기 전 밀라노에서 또는 로마에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부은 작품 몇 점은 준비하는 것은 상식인데도 어찌 된 영문인지, 아마 그의 독특하다 못해 대책 없는 성향 때문에, 카라바조는 그러지 않았던 것 같다.


어쨌든 결국에 콜론나 가문은 카라바조의 화가로서의 실력을 알아보았고, 무명이었던 카라바조의 강력한 후원자가 되어 카라바조가 로마 최고의 거장이 되는데 일조하였다.

카라바조의 행적과 개인적인 성향을 살피다가 되면, 만약 콜론나 가문이 아니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바로크 미술의 거장 카라바조는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을 지워버릴 수 없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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