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파르나스는 가난했지만, 그 가난 속에서만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있었다.”(헨리 밀러(Henry Miller), 1891-1980, 뉴욕 출신 헨리 밀러의 파리 생활은 1930에서부터 1939년까지이다. 이 시기는 제1차 세계 대전(1914-1918)과 제2차 세계대전(1939-1945) 사이의 전간기(1918-1939)에 해당하며, 또한 파리 몽파르나스의 전성기에 해당한다.)
“카페 뒤 돔의 밤은 지구에서 가장 인간적인 순간이었다.”(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에서, <Tropic of Cancer>, 1934년 파리 Obelisk Press 출간, 미국에서는 1961년까지 출간 금지 서적이었던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은 성적 표현의 자유와 실존적 자의식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꼽힌다.)
“몽파르나스에서 우리는 돈은 없었지만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었다.”
“카페 뒤 돔은 단순한 카페가 아니라 인간의 자유와 창조를 기념하는 성소였다.”
카페 뒤 돔을 아지트 삼았던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20세기 인류의 정신에 도끼를 내리쳤다.
카페 뒤 돔을 채운 떠들썩한 소란은 새롭고 자유로운 예술과 문학으로 변신하여 '정신을 내리치는 도끼’가 되었다.
마치 프란츠 카프카(1883-1924)가 “책은 도끼다.”라고 말한 것처럼.
파블로 피카소와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마르크 샤갈과 브랑쿠시, 디에고 리베라와 같은 화가들은 빛과 색, 선과 면에 대한 기존의 사고를 깨고 문학과 철학을 결합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을 창조하면서 정신을 향한 도끼질의 대열을 함께 하였다.
또한 어니스트 헤밍웨이와 헨리 밀러, 제임스 조이스와 만 레이와 같은 작가들은 언어로서의 문학과 텍스트의 틀을 과감하게 해체하고 여기에 예술과 철학을 결합한 새로운 문학을 창조하면서 이 도끼질의 대열에 참여하였다.
제임스 조이스는 카페 뒤 돔의 테이블에서 <율리시스>의 구절을 고쳐 쓰며 ‘의식의 흐름’ 자체를 새로운 문학 형식으로 창조하였다.
그들에게 예술은, 문학은, 사유와 창조의 수단이자 정신의 언어였으며 창작은 미적 행위를 너머 철학을 통한 세상과의 대화였다.
몽파르나스의 카페 뒤 돔(Café du Dôme, 또는 르 돔 카페(Le Dôme Café), 108 Bd du Montparnasse, 75014 Parise)은 ‘예술가들의 카페’, ‘자유의 예술, 사유의 공동체’, ‘몽파르나스의 심장', '모더니즘의 요람’, ‘예술가들의 피난처’, ‘예술가들의 성지’와 같은 다양한 별칭으로 불리고 있는 파리의 카페이다.
지금까지 이와 같은 멋진 애칭들을 가질 수 있었던 카페는 오직 카페 뒤 돔뿐 하나뿐이다.
그래서 ‘뒤 돔’이란 이름만으로도 무수한 상상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카페 뒤 돔은 19세기가 끝날 즈음인 1898년, 프랑스 제3공화국(1871년-1940년) 시절에 파리 남쪽의 교외 지역인 몽파르나스(Montparnasse)의 한적한 길모퉁이에 문을 열었다.
당시 몽파르나스 지역은 방돔 광장을 중심으로 하는 화려한 우안 지역과는 분명한 차이를 갖고 있었다.
지금과 같이 세련되고 번화한 지역이 아니었고 천장에서 물이 떨어질 듯한 허름한 다락방과 싼 값에 지낼 수 있는 낡은 펜션이 많아서, 세계 여러 나라에서 몰려온 가난한 예술가와 작가들이 모여 살던 변두리 언덕 마을이었다.
그러나 그 마을에서 피어 오른 새롭고 혁신적인 예술과 문학이 파리를 예술과 문학 중심지로 변화시켰다.
곤궁함 속에서 건져 올린 자유로운 창작 정신이 파리의 변두리 마을 몽파르나스를 예술의 수도로 변화시킨 것이다.
20세기 초의 카페 뒤 돔: 카페 뒤 돔은 카페 되 마고에서 남쪽으로 약 1.6km 떨어져 있으며 걸어서는 23분 정도 걸린다.
“20세기의 파리가 낳은 새로운 예술과 문학의 사조는 몽파르나스라는 연못에 뿌리를 내린 아름다운 연꽃이다.”
/* 파리 방돔 광장(Place Vendôme):
파리의 한복판, 루브르에서 북서쪽으로 이어지는 길 끝에 정교하게 만들어진 팔각형의 대칭형 광장이 서 있다.
이곳이 바로 ‘권력의 대칭이자 아름다움의 질서’라고 불리는 방돔 광장이다.
방돔 광장은 파리의 우안(Rive Droite)을 대표하는 공간으로 질서와 위엄의 미학이 가장 완벽하게 구현된 공간이다.
방돔 광장은 17세기말에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의 명령으로 건설되었다.
당시 루이 14세는 자신의 권력은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고 믿었으며 이것을 도시의 형태로 표현하고자 했다.
방돔 광장은 권력에 대한 루이 14세의 정치 철학을 반영하여 화려하고 완벽한 대칭형의 팔각형 광장으로 탄생하였다.
방돔 광장을 건설한 건축가 쥘 아르두앵-망사르(Jules Hardouin-Mansart)는 루브르 궁의 재설계(루이 14세 시절)와 베르사유 궁의 설계와 건축을 담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19세기말에 파리가 부르주아 사회 중심으로 이동하면서 방돔 광장은 부와 세련미의 상징으로 조명을 받았다.
까르띠에(Cartier), 부쉐론(Boucheron), 쇼메(Chaumet)와 같은 최고급 주얼리 샵들과 리츠 파리(Ritz Paris) 같은 세계 정상급 호텔이 방돔 광장에 자리를 잡았다.
그중에서도 리츠 파리 호텔은 코코 샤넬이 30년 넘게 살았던 곳이자 어니스트 헤밍웨이, 마르셀 프루스트, 다이애나 비와 같은 수많은 예술가들과 작가들, 유명 인사들이 사랑한 현대적 신화의 무대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
20세기가 시작하던 해의 파리 방돔 광장(The Place Vendôme, circa 1900)
카페 뒤 돔이 예술가들의 성지가 된 배경에는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의 포화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국가와 국가 간의 관계뿐만이 아니라 개인의 가치관 및 종교와 정치, 문학과 예술, 문화와 철학에 이르기까지 사회 전반을 근본적으로 흔들어 놓으면서 파리를 세상의 중심에 올려놓았는데, 그 근간을 이루는 것이 ‘예술의 중심’으로서 파리의 역할이었다.
전쟁으로 황폐화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죽는 것과 사는 것이, 악한 것과 선한 것이, 도덕적인 삶과 비도덕적인 삶이, 종교적인 삶과 비종교적인 삶이, 결국에는 그리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누구나 가슴에 상처를 품고 살아가는 ‘상처받은 인간들의 세상’에서 진실로 필요한 것은 ‘새로운 정신을 통한 혁신적이고 혁명적인 변화’였다.
시간은 이미 20세기라는 새로운 세기에 접어들었지만 세기말보다도 더 세기말적인 분위기와 증세가 사람들을 신음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은 기다리는 것 밖에 다른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올 것인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사람들은 무엇인가 혁신적인 변화가 있기를 갈구하였다.
예술과 문학, 철학과 사상이 그 변화의 선두에 섰고 사람들은 환호하였다.
그 시기에 파리는 상처받은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정신을 찾아 나서는 피난처이자 항구가 되어 주었다.
베를린, 비엔나, 뉴욕, 모스크바와 같은 세계 각국에서 자발적으로 또는 타의에 의해 망명길에 오른 젊은 예술가들이 파리로 모여들었다.
그들은 국적도, 언어도, 생김새도, 성격도, 가진 자와 안 가진 자, 학력도, 모든 것이 달랐지만 ‘새로운 정신을 좇으면서 진정한 자유 속에서 창조를 실현할 수 있는 공동체 공간’을 파리라는 도시에 형성하였다.
그들이 있어 파리는 ‘누구나가 자신의 방식과 자신의 주관으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정신의 도시’로 자리 잡았다.
그들 대부분은 가난했지만 카페 뒤 돔에서 서로의 재능과 고뇌를 나누면서 ‘몽파르나스파(Ecole de Montparnasse)’라는 새로운 미술의 흐름을 만들어내었다.
그들에게 카페 뒤 돔은 단순한 카페의 의미를 너머 새로운 예술 언어와 새로운 예술 철학이 탄생하는 실험실이었으며 ‘이방인들이 하나의 가족으로 지낼 수 있는 거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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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의 카페 뒤 돔은 ‘몽파리나스의 심장’이자 ‘몽파르나스의 정신’ 그 자체였다.
낮 시간이면 빛이 드는 창가에 앉아 물끄러미 창밖을 쳐다보면서 한 손으로는 빵을 뜯고 다른 한 손으로는 커피 잔을 달그락거리며 한가로운 오후의 여유를 즐기는 여느 변두리 마을 카페와 다를 바 없었지만, 어둠이 내리고 밤이 찾아오면 세계 각지에서 온 예술가들과 문학가들,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함께 엉켜 목소리 높여 서로의 텍스트와 예술을 떠들었고, 서로에게서 쏟아져 나온 자유와 창조의 정신이 서로의 가슴을 들끓게 만드는 하나의 아름다운 우주가 그들의 머리 위에 펼쳐졌다.
카페 뒤 돔에서는 언어와 언어가 국경을 넘어 서로에게 스며들어 자유롭고 새로운 예술 언어를 탄생시켰고, 예술과 예술이 철학과 치열하게 반응하면서 잘 익은 와인처럼 짙은 향기를 뿜어 내었다.
카페 뒤 돔은 예술과 학문과 철학과 사상이 아무런 제약 없이 교차하는 자유의 공간이었고, 그 공간에서는 시간조차 아무것도 상관하지 않겠다는 듯 그냥 자유롭게 지나갈 뿐이었다.
이윽고 어둠이 짙어지면 실내를 점령한 자욱한 담배 연기는 ‘새롭고 자유로운 정신의 바다’를 항해하는 모더니즘의 파도가 되어 이리저리로 흘러 나갔다가 흘러 들어오기를 제약 하나 없이 반복하였다.
그렇게 카페 뒤 돔은 20세기 초의 파리에서 (특히) 예술가 공동체의 상징이 되었고 예술가들은 ‘르 돔파르나스’(Le Dômaparnasse)라는 이름으로 사랑을 담아 불렀다.
/* 뒤 돔 정신(Esprit du Dôme):
예술가들은 카페 뒤 돔을 하나의 장소로서가 아니라 정신으로서 존재하는 형이상학적인 공간으로 승화시킴으로써 카페 뒤 돔은 ‘보헤미안(Bohemian) 정신’이 가장 순수하게 구현된 시간 속에 쌓아 올린 아름다운 공간이 되었다.
‘뒤 돔 정신’(Esprit du Dôme)이라고 불리는 이것은 3개의 키워드를 통해 살펴볼 수 있다.
뒤 돔 정신의 제1 키워드는 자유이다. 개인의 국적이나 사회적 계층, 종교나 언어 같은 외적인 것들은 결코 서로를 구분 짓는 경계가 될 수 없기에 서로와 서로는 아무런 경계 없이 예술과 문학으로 연결된다.
뒤 돔 정신의 제2 키워드는 불완전함의 아름다움이다. 물질은 개인을 불완전하게 만드는 장벽이기에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정신이야말로 창조를 이루는 아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질서보다는 창조의 불완전함을 사랑하는 것이 진정으로 아름다워질 수 있는 길이다.
뒤 돔 정신의 제3 키워드는 공동체의 열정이다. 파리는, 몽파르나스는, 카페 뒤 돔은 혼자이면서 함께인 지성들의 공동체 공간이다. */
제2차 세계대전(1939-1945)이 끝난 후 예술의 중심이 생제르맹 데 프레(Saint-Germain des Prés)로 옮겨가면서 몽파르나스와 카페 뒤 돔에서 예술가들과 작가들의 소란이 사라졌다.
인간은 소란 속에서 살아가야 행복해지는 존재이지만 그 소란이 사라진 뒤에야 그것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어리석은 존재이기도 하다.
카페 뒤 돔은 몽파르나스의 길모퉁이를 지금도 지키고 있다.
조이스와 피카소, 샤갈은 떠났지만 카페 뒤 돔에 들어 서면 그들의 웃음소리와 한껏 높아진 목소리가 금세라도 공명을 일으킬 듯 진동하고 있는 걸 느낄 수 있다.
몽파르나스의 카페 뒤 돔을 중심으로 예술가들과 작가들의 공동체를 형성하며 새로운 문학과 예술을 창조하던 이 시기를 ‘몽파르나스 시대’(Les Années Montparnasse)라고 부르고 있다.
몽파르나스 시대의 예술가들과 작가들은, ‘물질보다 정신의 자유를 우선시하고, 사회의 질서보다 창조의 불완전함을 사랑하며, 타인의 시선보다 자기 내면의 진실에 충실한 삶을 추구’하는 ‘보헤미안의 윤리’(Ethos of Bohemia)를 세움으로써 모더니즘의 반석을 놓았다.
인간이란 누구나가 불안하고 고독하며 결핍을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불안과 고독과 결핍을 숨기려 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 속에서 새로운 언어와 예술을 찾으려 하였다.
파리 좌안으로서 그들의 문학과 예술은, 부르주아 질서에 대한 지적인 저항이었으며 인간 존재의 불안과 불완전함에 대한 지적인 찬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