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침수차
불행의 서막, ASMR 같던 빗소리
살다 살다 호주에서 지낸 2달이 채 안 되는 기간에 별 일이 다 있었다. 살면서 수재민이 된 것은 처음인데 그게 바로 호주에 이사 온 직후라니 어이가 조금 없기는 했지만 그래도 집 안과 사람에는 피해가 없는 게 어디냐 하는 생각이다. 사건은 지금으로부터 약 2주 전에 발생했다. 3월 초에 호주에 오고 나서 주말에 계속 일정이 있어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래서 4월 5일 금요일 저녁에 남편과 이번 주말은 울릉공 시티에 가서 맛있는 피자집에 가고 여기저기 둘러보자 하고 행복한 계획을 짰다. 금요일에는 하루종일 비가 추적추적 오다가 잠이 들기 전 저녁부터 굉장히 세차게 비가 내렸다. 무서운 기세로 비바람이 쳤는데 오히려 안락한 침대에서 들리는 거센 빗소리가 포근하게 느껴졌다. 빗소리를 들으며 평소보다 더 깊게 잠이 들었는데 토요일 아침에 밖에 시끄러운 사람들 소리에 어렴풋이 잠에서 깼다. 눈을 부스럭 떠보니 어제의 비바람이 무색할 정도로 창밖으로 해가 쨍 내리쬐고 있었다. 침대에서 꾸무럭 대면서 예의 없게 토요일 아침 댓바람부터 누가 이렇게 시끄럽게 밖에서 얘기를 하나 툴툴대며 2차 잠에 빠져들었다. 시끌시끌한 소리에 선잠이 들었다가 에라 그냥 일어나 버리자 하고 남편과 일찍 주말을 시작해 보기로 했다.
계획은 무의미할 뿐, 일단 닦자
날씨가 오랜만에 좋으니 빨래를 해야지 하고 세탁기에 빨래를 돌리는데 밖이 심상치가 않았다. 사람들이 여기저기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고 남편이 저쪽 길 멀리에 구급차도 보인다고 했다. 남편이 나가서 어떤 상황인지 보고 오겠다고 하고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아서 대체 무슨 일인가 하고 나가보았다. 아비규환이 따로 없었다. 문 밖의 길이 온통 진흙투성이었고 길을 따라 쭉 따라 내려가면 있는 차고까지 진흙으로 덮여서 걷기가 힘들 정도였다. 사람들이 부산스럽게 길을 청소하고 있었다. 진흙으로 미끄덩 거리는 길을 헤치며 차고로 가보니 남편이 차고 문을 열려고 끙끙대고 있었고, 차고에 주차된 차에 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거의 자동적으로 집에 있던 빗자루를 들고 그때부터 길을 청소했던 것 같다. 다행히 5개의 집이 붙어있는 타운하우스에 살고 있어서 이웃 주민들과 주민들의 가족들까지 함께 청소하니 나름 수월하게 청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수월하다고 했지 힘들지 않다고는 안 했다… 길에 물을 뿌려가면서 진흙을 긁어 내려가니 조금씩 맨땅이 보였다. 길을 어느 정도 닦고 나서 각 집의 차고를 하나씩 청소했다. 우리 집은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차고에 차 밖에 없었지만 여기서 오래 산 사람들은 차고 안에 많은 짐들이 있어서 꽤나 피해가 커 보였다.
생각보다 거칠었던 비의 흔적
진흙으로 신발을 신고 걸을 수가 없어서 맨발로 걸어 다니며 길을 닦아대니 얼추 건물 앞 길과 차고가 제 바닥을 다 드러내었다. 드디어 한숨 돌리겠다 싶어서 집으로 들어와 물 한잔을 들이켜니 시간이 4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이게 대체 뭔 일인지 헛웃음이 나왔다. 어제 저녁 남편과 오늘 하루 뭐 하면서 놀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것이 굉장히 먼 과거의 일 같았다. 진흙으로 뒤덮인 옷과 몸을 깨끗이 정돈하고 부서질 것 같은 몸을 뒤로 하고 일단 살기 위해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베트남 음식점이 있는데 그곳에서 늦은 점심을 해결했다. 동네를 살짝 걸어 다녀보니 꽤나 피해가 심한 곳들이 많았다. 특히나 우리 집 근방은 언덕의 내리막길이 만나는 끄트머리 지점이라서 간밤에 내린 비들이 다 우리 쪽으로 몰린 듯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는 집 안에는 피해가 없었지만, 근처 다른 집들은 집 안에까지 물과 진흙이 범람한 것 같았다. 청소하면서 들은 말로는 우리 윗동네의 어느 지역은 길가에 주차해 놓은 차가 물에 쓸려가서 다른 차 지붕 위에 올라타 있었다고 한다. 진짜 간밤에 내린 비가 이 동네를 휩쓸고 지나갔나 보다. 피해가 없는 집들이 더 많았지만 우리는 약간 재수 없게도 피해가 있었던 집이었다.
안녕, 우리의 첫 새 차
뽑은 지 6개월 된 우리의 차는 안에 물이 이미 차 있었고 운전할 때마다 뒤에서 물이 새나갔다. 처음에는 엔진 안에는 물이 안 들어가서 괜찮겠거니 했지만 결과는 역시나 침수차=폐차였다. 겉으로는 너무 멀쩡해 보이고 많이 운전하지도 않았는데 폐차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이 차로 열심히 운전 연습이나 했을 걸 싶다. 침수차는 뉴스에서만 들어봤지 직접 겪어보니 굉장히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겉으로 멀쩡한 차는 홀연히 우리 곁을 떠났고 보험회사에서는 일부 금액이 제외된 차 값을 입금해 주기로 했다. 호주에서는 차가 필수품 중 하나이기 때문에 이제 차를 다시 구해야 한다. 이 동네 일대에 침수차 피해가 많았던 만큼 중고차 대신에 새 차 위주로 알아보기로 결정했고 아직까지 구매하지는 못했다. 사고 후 2주가 지난 지금에서야 보험 절차가 마무리되었고 아직 입금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차를 찾아보기 귀찮은 것도 좀 있다. 그래도 이전 차는 남편이 혼자 결정하고 구매한 것인데 이번에는 함께 결정할 수 있어서 좋다고 해야 하나… 안 좋은 상황에서도 좋은 점은 있기 마련이다.
호주에 오고 이렇게 화려한 신고식을 치르고 나니, 인생은 정말 계획대로 흘러가는 건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간단한 토요일 데이트 계획마저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이유로 틀어졌으니 말이다. 그저 되는대로 흘러가듯이 살되 건강만 잘 지키면 바랄 게 없다는 생각이다. 안 겪어도 좋을 일까지 겪고 있는 다사다난한 호주 정착기. 당분간 이런 빅 이벤트는 사양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