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동을 걸다, 그리고 희망을 줍다

기나긴 방황 끝에 얻은 자그마한 성취

by 바다반디

한 마리의 반딧불이가 동면을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 수북히 쌓인 눈을 걷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낙엽을 들추자 찬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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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연휴가 끝나 간다.
그 동안 미뤄 놨던 공부를 하고, 많이 먹고 바닥과 한 몸이 되기도 하며 토실토실해진 나로서는 다시 회사에 나가 부대껴야 한다는 게 마냥 아쉬울 따름이다.

그래도 휴식기간 동안 크나큰 수확이 있었다.
바로 현실과 목표를 매치시키는 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사실 목표가 있다고는 말하고 다녔고, 그렇게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막연한 감을 지우기가 힘들었다.
원래 가고 싶었던 농업, 원예 쪽으로 갈까, 했지만 그 쪽은 특성화고, 전문대 나와서 일찍부터 현장에서 뼈가 굵은 고인물 분들을 상대하기 힘들 터였다.(외국은 더할 터였다.)

'사실상 처음부터 시작해야 한다'
이 사실이 나 자신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그럼 지금까지 시간을 버린 건가?
4년동안 힘들게 배운 전공지식은 어떻게 하고?

여러 생각이 들었으나, 며칠 동안 고심하고 조사도 많이 한 끝에 이 결론에 도달했다.
"가장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은 현재 가지고 있는 자산을 최대한 활용하는 것이다."

분명 바이오를 좋아해서 이를 전공했다.

자랑은 아니지만 학창시절 공부는 어느 정도 했던 편이었고 선생님도 원서 하나는 지방대 의대에 써 보라고 권유하셨다.

그럼에도 나는 전부 생명과학 관련 학과에 원서를 넣엇고, 결국 고집대로 생물학과 화학을 전공했다.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고, 당시에는 유전공학 기술을 배워 종자회사를 세우겠다는 비교적 확고한 목표가 있었다.

그 시절의 집념은 다 죽은 건가?
어떻게 된 건가, 바다반디.


...아프기도 하고 일이 풀리지 않아서 이 지경까지 왔지만 아직 기회가 있을 때 바로잡아야 했고, 더 이상 낭비할 시간은 없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급했던 것이다.

그러던 중 전공수업 시간에 접했던 CRISPR 유전자 가위에 관한 내용이 생각났다.
또 병특 시작하기 전 학교에서 인턴십 프로그램을 운영했는데, 그 때 지원했었던 바이오 AI관련 업체도 생각났다.

생각해 보니 대학원 지원할 때 썼던 연구계획서도 이와 관련되어 있었다.

비록 하고 싶은 연구를 못한다는 점, 선배들과의 트러블, 등 여러 이유로 대학원은 그만두었지만 관련 업계에서 일하고 싶다는 생각은 강하게 들었다.

크리스퍼, 인공지능, 유전자 치료제, 종자개발...
심지어 미국 바이오벤처 창립자 중에 학사 출신이 많다는 사실까지.

내 심장은 다시 뛰기 시작했다.

난 여전히 바이오를 사랑했고, 이를 이용한 기술을 개발해 세계적으로 경쟁력 있는 한국계 바이오 대기업을 세우고 싶었다.

학사 출신이라도, 공백기간이 길었어도 길은 있었다.
비록 매우 힘든 길이겠지만.

결국 돌고돌아 원점으로 돌아온 것이다.
여기까지 참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시간도 오래 걸렸고.

이제서야 머릿속의 잡다한 생각이 안개 걷히듯 정리되는 기분이 들었다.
공부도 손에 잡히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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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마리의 반딧불이가 동면을 취하고 있었다.
누군가 수북히 쌓인 눈을 걷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낙엽을 들추자 찬 바람이 온몸을 감쌌다.
'추워...'
누군가는 반딧불이를 손바닥 위에 사뿐히 내려놓았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오래 기다렸지? 시간이 조금 걸렸어."
"..."
그의 목소리에, 반딧불이의 몸에 혈액이 돌기 시작했다.
"나를 위해 다시 불빛을 밝혀줄 수 있을까?"
반딧불이는 조심스레 날개를 폈다.
그리고 날아올랐다.

희미한 불빛이 어두운 숲속을 비추었다.
흐릿한 그의 눈동자가 다시금 푸르게 빛나기 시작했다.


(끝)

목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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