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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T 매거진 Mar 04. 2022

‘No 교수존’이 던진 질문

노 스모킹존, 노 키즈존, 노 교수존이 같을 수 없는 이유.

칼럼니스트 오찬호


‘No Professor Zone’이 등장했다. 

교수는 출입할 수 없다니, 그것도 대학 앞에서 장사하는 술집에 붙은 문구였다니 배짱도 이런 배짱이 없다.

안내문에는 “다른 손님들의 편안한 이용을 위해 정규직 교수님들은 출입을 삼가”달라면서 “혹여 입장하시더라도 큰소리로 신분을 밝히지 않으시길 부탁드린다”라는 부연설명을 붙였다.


출입 금지라기보다 손님으로서의 예의를 지켜달라는 수준이니, 기존 ‘노 ○○존’에 비하면 강경하진 않은 셈이다. 주인은 “내가 교순데!”라면서 거들먹거리는 진상 손님에 대한 나쁜 기억이 있고, 대학원생들이 교수를 마주하지 않고 편하게 휴식을 취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세운 룰이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해당 대학의 교수들은 ‘교수 전체의 명예를 매도했다’며 항의했고 주인은 조치를 철회했다. 무엇이든지 모 아니면 도로 해석하려는 경향이 강한 한국인들은 노 교수존이 화제가 되자 그게 차별인지 아닌지를 따지며 으르렁거리기 바쁘다. 한쪽에선 ‘오죽했으면’이라는 추임새와 함께 교수한테 당한 경험들을 경쟁하듯이 뱉어낸다. 다른 쪽에선 모든 교수를 도매금 취급하며 욕하지 말라면서 ‘일반화의 오류’를 장황하게 설명한다.


하지만 거칠게 싸우기만 하면, 대화하겠다는 의지와 설득하겠다는 자세는 증발한다. 언젠가부터 넘쳐나는 노 ○○존 현상에서 짚어야 할 질문이 분명 있을 건데 순식간에 공중분해된다. 호흡을 가다듬고 돌다리부터 두들겨보자.

‘노 스모킹존’처럼 사람의 행위를 적절히 통제하는 건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이것이 차별의 영역에서 논의되지는 않았다. 흡연 금지는 캠핑장에서 고성방가 금지, 목욕탕에서 빨래 금지, 영화관에서 통화 금지와 마찬가지의 금지니까 말이다. 개인의 자유를 특정한 공간에선 제한함이 마땅하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었다는 말이다.


노 키즈존의 진짜 문제

그러나 ‘그럴 것 같다’는 느낌으로 그룹을 통째로 배제하는 건 전혀 다른 이야기다. 저 사람은 개인의 자유를 남용할 것 같은 성별이라서, 저 사람은 타인을 불쾌하게할 종교를 지녔기에 특정 집단을 콕집어서 선을 넘어서지 말라는 걸 어찌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겠는가. 그럴 만한 이유를 대는 사람들이 넘쳐나 얼핏 사회적 공감대가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신중 또 신중해야 한다. 흑인이 백인과 함께 교육받지 못한 것도, 여성에게 투표할 권리조차 주지 않았던 것도 사회적 합의였으니 말이다. 그러니 의심해야 한다. 사람들의 정보가 편견은 아닌지, 어설픈 합의가 사회를 나쁜 방향으로 유도하는 건 아닌지를.


예를 들어 ‘노 키즈존’은 그럴 수밖에 없는데 대한 설명이 구구절절 차고 넘치지만, 그렇다고 차별과 혐오의 영역에 닿을 우려를 배제할 순 없다. 아이들의 행동이 아니라 존재를 막아버리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심각한 건 이런 논쟁을 하면 할수록 사람들의 감정이 날카로워진다는 거다. 노 키즈존 찬성 논리에는 개념 없는 부모에 대한 묘사가 반드시 등장한다. 그런데 이와 비례하여 지나칠 정도로 예의를 차리는 부모도 늘어난다. 식당에서 자리를 깨끗하게 정리한다거나, 비행기에서 주변 승객들에게 사탕을 돌리며 양해를 구하는 부모는 개념 있는 경우라며 훈훈하게 소개된다. 설마 천성이 착해서일까? 이 조심성의 근원에, 자칫 진상으로 찍혀 하루아침에 인터넷에 신상이 알려질 수 있다는 두려움이 없다고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진짜 문제는 누군가의 강박적인 예의 바름이 ‘부모의 올바른 자세’처럼 회자될수록, 사람들의 참을성이 납작해진다는 거다. 기차에서 아이 울음소리가 크든 작든 ‘원래 그렇지’라면서 신경도 쓰지 않던 사람이 이제는 2분도 버티지 못하고 짜증을 낸다. 5분이 지나면, 조용히 있고 싶은 자신의 권리를 침해했다면서 분노한다. 카페에서 아이가 약간만 어수선한 것만으로도 보호자를 바라보며 무려 ‘불쾌하다’는 감정을 느낀다.


지금 이 글을 SRT에서 읽는 사람들 중에도 어디선가 들려오는 아이들의 사소한 잡담을 들으며 ‘유아동반칸이 있는데, 왜 여기서 떠들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을 것이다. 백 명중 진상은 한 명인데, 보는 사람의 기준이 엄격해지니 둘 중 하나는 문제로 보인다. 이런 인식의 끝에 ‘저 인간은 당해도 싸다’는 차별과 혐오의 열매가 무럭무럭 열리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사람 사는 곳에 아이가 있게 마련이고, 그 아이는 어른하고는 다른 절제력을 가질 수밖에 없음을 받아들인다면 고만고만한 소음을 권리 침해 운운하며 확대 해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노 키즈존은 그 자체가 차별이라는 접근보단, 사람들이 ‘분리’에 익숙해지면 ‘차별’에 둔감해질 수 있다는 방향으로 논의가 확장되어야 한다.


그런데, ‘노 교수존’에는 다른 맥락이 존재한다. 노 키즈존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일방적인 배제의 형태였다면, 노 교수존은 위를 향해 아래에서 매우 조심히 부탁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표현의 자유가 ‘기득권을 향해’ 의미 있는 메시지를 던져줄 수 있기에 허용되는 것과 비슷하다. 가게의 운영방침을 환영하자는 게 아니라, 대한민국 대학에서 ‘교수와 학생’의 관계가 상당히 후진적인 권력구조로 여전히 존재하고 있음을 이 소란 속에서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는 고질적인 한국 사회의 문제이면서 학문 생태계의 건설적인 발전을 가로막아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퇴보시키는 원인이니 말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교수들은 세상 눈치를 보는 시늉조차 하지 않고 즉각적으로 항의하지 않았던가. 기득권이 아니고선 상상할 수도 없는 빠른 대응이었다. 


사회는 매우 복잡하다. 여러 상황이 결합하여 ‘노 ○○존’이 등장하고, 한가게의 영업방침에 불과할지라도 꼬이고 꼬여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그 실타래 속에는 분명한 차별을 합리화하는 논리도 숨어 있고 강자에 대한 소심한 항의를 알아주지 못하는 서운함도 배어 있다. 분별하는 건 시민의 몫일 거다.


칼럼니스트 오찬호

사회가 상식적이어야 개인도 행복해진다고 믿는 사회학자. 제주에서 책을 읽고 쓰며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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