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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RT 매거진 Mar 04. 2022

자가 수리 시대 제1막

애플이 발표한 셀프 AS 정책의 배경이 흥미로운 이유.

테크 저널리스트 김태영


8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자동차 회사가 가까운 미래에 내연기관을 단종하고 순수 전기차만 만들겠다고 발표했을 때, 온 시장이 술렁거렸다. SNS를 대표하는 기업인 페이스북이 사명을 바꾸고 메타버스 플랫폼에 주력한다고 할 때도 모두의 시선이 쏠렸다. 최근에는 애플이 일부 제품에 자가 수리 정책을 실행한다고 발표해서 화제다. 이 부분에서는 ‘갑자기’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해관계에 따라서는 꽤 오래전부터 진행된 이야기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일부 대기업이 정책을 180도 바꿀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새로운 제도나 환경 규제에 맞춰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고 시장을 이끌기 위해서다. 애플의 경우 지난해 초까지 제품 AS(사후 서비스) 정책을 강경하게 유지해왔다. 정식 서비스센터 외에 수리를 전면적으로 차단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임의로 수리를 하거나, 사설 서비스 센터를 이용한 흔적이 있을 경우 제품의 모든 정식 AS에서 제외시켰다. AS 기간 중 제품 소유권을 회사로 귀속시켜서 소비자의 동의 없이 진행된 문제를 회피하기도 했다. 초기 불량품에 대해 엄격한 기준으로 교환 및 환불을 실행해서 적지 않은 공분도 샀다. 아이폰 출시 이후 13년 이상을 고압적인 AS 정책으로 일관해왔던 바로 그 애플이 갑자기 태도를 바꿔 수리권을 소비자에게 개방하기로 했으니 놀랄 수밖에. 정확히 말하면 그럴 수밖에 없게 됐다.


2021년 7월 초. 미국 연방거래위원회는 ‘소비자 수리 선택을 제한하는 관행에 대한 조치를 강화하는 정책’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가전업체들이 수리 서비스가 소비자의 선택을 제한하지 못하도록 하는 내용이 담긴 법안이다. 2018년부터 꾸준히 등장하던 ‘수리할 권리’ 법제화가 드디어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유럽연합(EU)에서도 2020년 비슷한 법규가 시작됐다. 소비자가 전자기기 부품을 사설업체에서 사거나, 자유롭게 수리할 수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다. 더불어 전자기기 업체는 관련 부품을 최소 10년 동안 보유하고, 설명서도 의무적으로 제공해야 한다. 한국에서도 지난해 9월 ‘소비자 수리권 보장법’ 개정안이 발의됐다. 관련 개정안에는 ‘휴대폰 제조업자가 합리적인 이유 없이 수리 서비스를 제한하는 행위를 금지’하고 있다.


이렇게 세계 각국에서 ‘소비자의 수리할 권리’ 법제화가 추진되면서 그동안 폐쇄적으로 AS 정책을 고수하던 애플도 결국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됐다. 그리고 태도를 바꿔 2022년부터 일부 고장 부분에 대해서는 사용자가 정품 부품을 사서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제도를 도입하겠다고 밝혔다. 자가 수리 범위는 서비스 직전에 정확하게 공개되겠지만, 외신들에 따르면 아이폰12와 아이폰13 시리즈를 대상으로 LCD 화면과 배터리, 카메라를 소비자가 직접 수리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이후에는 M1 반도체가 들어간 맥 컴퓨터도 자가 수리 영역에 포함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러한 서비스는 미국 시장을 시작으로 향후 다른 국가로 확대될 예정이다.



‘수리할 권리’가 불러올 나비효과는

애플의 이번 조치에 대해 일부 소비자는 ‘수리권 운동의 승리’라고 해석한다. 소유한 제품에 대해 자체적으로 수리를 할 수 있는 권리는 당연한 것이라는 주장이다. 특히 자동차나 집, 총기같이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직접 수리하고 개조하는 미국이나 유럽인들의 관점에서는 전자기기의 자가 수리가 당연히 누려야 할 개인 권리다.


자가 수리는 환경단체 입장에서도 오래전부터 지지하는 정책이다. 고장 난 전자제품을 버리고 신제품을 사기보다 수리해서 쓰는 것이 탄소 배출을 줄일 수 있다는 주장이다. 수리권과 관련된 정책은 경제적인 관점에서도 이점이 있다. 비공인 수리점의 역할과 비중이 활성화되면서 대기업과 주변 상권이 공생할 수 있다. 소비자 입장에선 제품 수리에 선택권이 늘어난다. 수리점이나 부품 공급책이 많아지면 가격이 낮아지고 수리 시간도 줄어든다는 장점이 있다.


물론 이제 막 시작된 수리권 정책에 대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다. 분명 우려되는 부분도 있다. 정책을 풀이해보면 역설적으로 모든 소비자가 누릴 수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실제 전자기기를 직접 수리하는 소비자는 소수 단위다.


더불어 외부 수리의 영역이 늘어나면서 제품 보증기간과 관련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 보증기간은 제조사가 제품의 컨디션을 보증하고 문제가 생겼을 경우 책임지는 기간이다. 하지만 이 기간 임의로 제품을 고쳤을 때 보증기간 이내라도 공식적으로 보증이 안 될 가능성이 높다. 부품을 교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하더라도 방수 기능까지 까다로운 조건을 소비자가 완벽하게 실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또 다른 문제는 자가 수리 시장이 확대하면서 부품 공급이 비정상적으로 발생할 수 있다. 예컨대 분실한 스마트폰을 부품으로 쪼개서 판매하는 시장도 덩달아 커진다. 애플은 분명 보안 차원에서 이 부분도 고려하고 있을 것이다. 최신 운영체제를 통해 제품 수리 후 정품 부품이 사용됐는지 알 수 있는 ‘부품 및 서비스 기록’ 기능을 추가할 예정이라 밝히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부품에 대한 보안 강화는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금보다 정밀하게 부품을 추적할 수 있는 시스템이 동반되어야 한다.


애플의 계획을 제외하면 아직까지 전자기기 시장에서 자가 수리 정책에 반응하는 업체는 없다. 따라서 애플의 이번 서비스가 새로운 제도에 맞는 기준이자, 개척자로서 역할을 수행하리라 본다. 수년 전 애플이 스마트폰에 3.5mm 이어폰 단자를 삭제했을 때를 생각해보면 시장의 변화를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말도 많고 탈도 많겠지만, 애플이 만든 기준에 따라 시장이 변화하고, 적응할 것이다.


좋든 싫든 자가 수리 시대 1막이 올랐다. 똑똑한 소비자가 되려면 우리도 시장의 변화에 적응해야 한다. 정밀 드라이버 세트를 구매하고 스마트폰 구조에 대해 공부해야 할 때다.


테크 저널리스트 김태영

과학과 공학 분야에 관심을 두고 깊이 있게 고찰하는 것을 즐기는 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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