셀프 가스라이팅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스스로를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로, <가스등(Gas Light)>(1938)이란 연극에서 유래한 용어이다. 가스라이팅은 가정, 학교, 연인 등 주로 밀접하거나 친밀한 관계에서 이뤄지는 경우가 많은데, 보통 수평적이기보다 비대칭적 권력으로 누군가를 통제하고 억압하려 할 때 이뤄지게 된다.
[네이버 지식백과] 가스라이팅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엔진연구소)
요즘 흔히 쓰이는 용어 이기도 한 [가스라이팅] 정확히는 누군가를 억압하고 교묘하게 이용하려는 심보를 가지고 심리적으로 괴롭힘을 주는것인데, 넓은 의미에서 타인의 자존감을 무너뜨려 스스로 올바른 판단과 이성적인 사고를 제한 한다는 의미에서도 쓰이는 거 같다.
33살 말에 시작해 36살에 첫 연애를 끈끈한 가족애라는 허울좋은 말에 실은 독립하지 못한 첫남친과 누나들의 일장 사건들로 인해 이별을 겪고.
또 누군가의 소개로 두번째 연애를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회사에서 매우 거친일? 을 하고 있었고, 회사의 분위기는 남자직원이 80%에 목공소와 같은 분위기의 공방같은곳에서 일하느라 몸을 많이쓰고 몸이 다칠 수 있다보니 서로서로 고운말보다는 본능적으로 원초적인 단어와 말, 고성이 오가는 직장이었다.
처음엔 그저 무언가를 만들고 완성작이 나오는걸 눈으로 바로바로 확인 할 수 있어 성미가 급한 나에게는 적성에 맞는 부분도 있었지만 위에 설명한 회사의 분위기와 자수성가한 사장님의 주인의식 강요. 로 직원들은 몸도 마음도 매우 지쳐있는 상태였다. 그런 분위기속에서 나이는 많은 여직원으로써 내 의견을 피력할 기회나 자리는 없었을 뿐더러 나또한 그냥 2년의 경력만 버티고 나오고자 이악물고 이었을 뿐이었다.
평일뿐만 아니라 주말도 출근이 잦고, 사무실은 경기도 구리즈음이었는데 지방 부산이며 여수며 전국팔도를 유랑하듯 출장을 다니니, 새벽 3,4시에 퇴근도 별일이 아니었고, 당연히 다음날 출근은 9시였던 지극히. 당연하고. 평범하고. 원리원칙. 적인 K-직장 이었다.
그렇다보니 솔직히 이사람의 직업이 처음엔 매력으로 다가오기도 했었다.
첫남친은 회사의 넋두리를 널어놓으면 옆에서 듣는둥 마는 둥 했다면 이사람은 듣는 귀는 늘 열려있었다.
"그랬구나." "응, 그랬어?" "아이고, 그랬구나..." 등등 장단을 맞춰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위로를 받고있었다.
서로 거리도 멀어 주말에 중간지점에서 만나는 것도 나를 위해 큰 시간과 공을 들이는 거라 생각한 나는 선물처럼 기름값을 내어주곤 했었다.
1년 즈음은 그렇게 그냥 평범한 듯 여느 연인들처럼 맛집을 찾아다니며, 출근하지 않은 주말에 만나거나, 평일에도 늦게퇴근하는 나를 위해 차를 끌고 회사근처에서 마중나와 늦은 저녁한끼를 먹고 헤어지곤 했었다.
그런데, 이사람은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라 계약이 만료된 후, 또 이직을 해야했었다.
문제는 이사람이 전직장에서 계약이 만료되어 퇴사한 것이 아니라 회사 보스와 다투고 홧김에 무단 결근을 한 날 부터 시작되었다.
정확히 이사람의 직업을 언급할 수는 없지만, 나름 재단과 시설이 연계되어 있어 소위 말하는 라인을 잘 타야하고, 윗선의 입김과 소개, 추천 등이 이직과 취업에 매우 막강한 영향을 주는 직종에서 일하고 있었다.
결국 이사람은 1년, 2년. 총 2년을 이직하지 못한체 새벽에 배송일을 해야했다.
결국 회사 보스의 영향때문인지 블랙리스트에 올랐었나보다...
당시에도 적지않은 나이이고 아무리 불합리하고 억울하더라도 본인이 직업을 가져야하고 본인을 책임져야 하는 입장이라며 무작정 그렇게 무단결근 하는 모습이 어른스럽거나 쉬이 위로가 나오지는 않는 상황이었다.
어쨋든 1년은 직업은 있는체, 2년은 본인의 전공과 경력을 살리지 못한 체 나와 연애를 했는데,
그 2년이 나에게는 나 스스로를 '가스라이팅' 하는 시간이 되어버렸다.
처음엔 엉겁결에 실직을 해버린 그사람이 안타까워 옷이며, 신발이며, 한 두 벌씩 사주었는데,
나중에는 데이트 비용의 80%를 내가 감당하고 있고, 선물처럼 내주던 기름값도 당연히 내가 내는 그런 상황이 되어있었다. 같이 데이트를 하고 차에 기름이 떨어져 주유소를 갔는데 직원이 카드를 달라하자 두손놓고 빤히 나를 쳐다보던 눈빛이 아직도 참.. 얄밉다....
이때 사실 한번 싸움을 했었다. 기름값을 매번 내가 내야하는 상황에 불만을 표현하니 경기도에서 서울까지 데려다주는 자기 수고는 별거 아닌거냐며 기름값 내주는게 그렇게 어렵냐고 했었다.
이후 우리는 무조건 뚜벅이로 데이트를 했다...
물론 내가 경제적으로 좀 더 안정적인 상황이었으니 (나는 부모님과 동거/ 그 사람은 본가는 지방이고 경기도권에서 자취중) 데이트 비용을 더 부담하는것에 큰 불만은 아니었지만 점점 당연하게 생각하고 말끝 마다 "그럼 내가 계산하냐?" " 그래, 니가 사줘야지!" "나는 돈이 없자나!" 라는 말로 나를 서서히 가스라이팅 하고 있었던 거였다.
어느덧 나는 '그래 내가 계산해야지' '그래, 내가 사줘야지' '그래 남친은 돈이없자나...' 라는 합리화 하는 합리화로 내가 더 계산하고 내가 더 찾아가고 배려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연애한지 2년 쯤 되었을 때. 나는 직장에서 경미한 공황을 겪고 퇴사를 결심했다. 목표했던 2년을 채우기도 했었고.
이직을 준비하고 현재의 회사로 이직 후, 회사 스트레스로 상담을 다니면서 조금 눈이 열리고 생각이 객관화 됐던걸까. 정신차려보니 나는 서른아홉살 이었다.
36살에 이 사람을 만나 30대의 후반을 퍼주기만 하고 있었다.
나는 어떤 정서적, 감정적 보상을 받지못하고 새벽배송하느라 밤낮이 바뀌어 통화조차도 점점 어려워지고,자기는 일용직이나 다름없으니 회사 스트레스는 복에 겨운 불만이라며 되려 짜증만 내는 그사람.
이 나이 즈음이면 이제 아이도 초등학교를 보낼 때인거 같은데 나는 아직도 결혼도 기약할 수 없는 사람과 연애아닌 연애를 하고 있었다.
상담 중 마음이 정리가 되었다.
선생님께서는 "남친이 계륵이예요?"
鷄肋 계륵
「닭의 갈빗대」라는 뜻으로, 먹기에는 너무 양(量)이 적고 버리기에는 아까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형편(形便).
"..... 네, 그런거 같아요."
당시만해도 이별을 한다면 남친을 물가에 혼자 내놓는거 같아 너무 미안하고 내가 못된 여자가 될 거 같아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래도 적지않은 시간을 함께 했으니...
하지만 나에게 어떤 긍정적인 영향이나 미래를 그릴 수 없음에 나는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오빠, 나 이제 서른아홉이야. 두달 후면 마흔이라고. 이미 결혼은 늦어서 로망따위도 없긴하지만 오빠는 나랑 미래를 그리고 있는지, 내가 기다리면 되는건지. 어째야 하는거야?"
"글쎄~" 남자친구는 인스타 최신 릴스를 보면서 웃긴 영상을 나에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 어리숙한 회피형 인간의 모습에 실망감만 늘어난 나는 그 길로 다른 말을 더 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고 지하철역으로 함께 걷던 우리는 각자의 집 방향으로 헤어졌다.
그렇게 그게 마지막이 되었다.
적어도 일주일 뒤에는 남자친구가 연락이든 찾아오든 어떤 제스쳐가 있을거라 생각했는데 무려 두달이나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세상에서 가장 구질구질 하다는 잠수이별이었다.
그런데 되려 너무 나 또한 놀란것이 그 두달동안 이것이 이별이라면, 이라고 생각했을때 딱. 하루만 눈물을 펑펑 쏟았엇다. 다른 날들은 그냥 너무 아무렇지 않게 그냥 이제 나를 정비하고 나를 계획하고 건강해지고싶다. 그래도 나는 좋은사람을 만나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싶다. 라는 생각들로 가득차 건강검진도 예약하고 다이어트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그사람으로 부터 벗어나니 나를 보았고, 나를 세우기 시작했다.
그사람과 헤어지면 혼자 남게 될 그사람을 걱정하던 내 마음은 무너진 내 자존감에 대한 연민 이었던 걸까.
내 마음 보듯 실직하고 일상을 찾지 못하던 그사람을 위로햇던 걸까.
생각보다 덤덤했던, 이별이었고,
참 마지막까지도 어른스럽지도, 마무리조차 짖지 못하는 그사람의 상황이 안타깝기도 하지만 나는 더이상 그런 대접을 받을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방의 불을 다시 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