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이 아니라 학자라고 했다면 더 좋았으련만 아직 학자의 냄새는 풍기지 못한, 여전히 배움이 모자란 학생이었다.
직업의 특성상 휴일을 즐기는 것은 사치였다. 남들이 보기엔 시간이 많아 보이는 직업이지만 그 비어 있는 시간에도 늘 전공공부를 생각해야 했고, 만약 오롯이 딴 짓이라도 하고 있는 날에는 죄의식을 가져야 했으며, 많은 이들이 죄인처럼 수군거리기도 했다. 연구만이 삶의 이유여야 하는 공간은, 약간의 취미도, 조금 다른 분야에 대한 공부도, 가족간의 여행도 허락하지 않았다. 허락하는 척 할 뿐.... (이건 무려 15년 전 이야기. 지금 같은 n잡러 시대, 프로취미러가 넘치는 시대엔 아마 그곳 분위기도 바뀌었겠지. 바뀌어야 하고)
이 공간에서 근10년 있으면서 주변을 돌아보는 일을 하지 못했다. 하늘을 멍하니 보거나, 흐드러지게 피고 지는 꽃들을 살피지 못했다. 생명력 넘치는 온갖 생물들의 움직임을 알아보지 못했다. 그저 이미 생명 다한 인물들을 꾸며진 말로 포장하기 일쑤였다. 곰팡내 나는 책과 신문을 뒤질 수 있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열심히 하는 축은 아니었는데도...
스물 아홉 가을
이상하게 자주 아팠다.
아이를 갖기 어려울 수도 있다는 괴상한 질병도 확인하고, 현대인이 가질 수 있는 모든 질병을 달고 살았다.
그리고 서른이 되자마자 아이티에 지진이 발생했다.
다른 나라의 자연재해 소식을 처음 듣는 것도 아닌데
그해 그 소식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다.
물과 구호물품을 지원하는 일에 약간의 힘을 보탰던 일이 나를 살렸다.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역사 속 인물들을 평가하는 일은 나보다 더 잘나고 똑똑한 분들이 하실 테니, 자기복제 수준의 쓰레기를 양산하는 일을 그만 두어야겠다고 잠정적으로 결심했다.
그리고 서른 둘,
다른 삶을 살아보기로 했다.
멈춤을 결심한 그해내가 가장 행복했던 건 오롯이 휴일을 즐기고 있다는 것과 무엇보다 남들이 보지 않고 지나가는 자연의 모든 것에 귀기울일 수 있다는 것, 식물이 물 마시는 소리가 들린다는 것, 하늘의 미묘한 색깔 변화를 볼 수 있다는 것....
이었다.
업적을 내지 못한 자에게 여유와 여가는 사치라 하는 공간을 빠져나오니
"뭐든 해도 된다, 그래도 된다"의 세상이 펼쳐졌다.
오늘은 괭이밥과 함께
내일은 개망초와 함께
그리고 그 무렵
내가 전혀 닿아보지 못했던 세계,
자연을 천에 옮기는 법을 배워와 열심히도 그렸다.
내게 이런 하루를 허락해준 나의 결심에 다시 한번 격려를 더하며 꽃을 보고 꽃을 수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