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 속으로 멈춤을 결심했지만 실행에 옮기진 못하고 있던 어느 날,
엄마와 함께 보던 인간극장에서 안나리사 가족을 만났다.
그때 나는 "천천히, 느리게, 우리를 둘러싼 숱한 이야기들을 소중히 여기는" 그들의 삶을 욕망했다.
실천 없이 욕망만 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을 '욕망해도 괜찮다'라고 다독이면서, 그렇게 욕망했다.
그런 책이 몇 권 있다.
무심히 집어들었는데 머리를 뎅~하고 치고 간 책들.
박훈규의 책이 그랬고, 한강의 산문집이 그랬으며, 이우일과 선현경 부부의 책이 그랬다. 팔당 농부의 <사람에게 가는 길>은 말할 것도 없고.
자연스러움, 자연에 가까움, 사람, 느림, 더딤, 이야기, 삶에 대한 긍정성... 이 책들이 내게 남긴 화두들.
조금의 여유도 없던 척박한 삶의 패턴 한가운데에서 욕망했던 책 속의 가치들.
멈춤을 결심한 이후 조금씩 실천해보기로 했다.
모든 것을 멈춤의 상태로 돌리는 것은 굉장한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고 다들 말했지만 의외로 간단했다. 마음 먹는 게 어려운 거지 마음 먹은 후엔 그냥 빠져나오면 되는 일이었다. 마치 처음부터 내가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아쉽지 않았냐고? 10년 공부가 아깝지 않았냐고?
글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당장은 그저 그 공간에서 나를 빼와 살 만한 곳에 놓아줘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빠져나오고 나니 보지 못하던 세상도 보이고, 들리지 않던 이야기도 들리기 시작했다.
재촉하지 않고 채근하지 않고 비난하지 않는 삶.
잘잘못을 따지기보다는 다양한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삶.
자연스럽게
삶은 살아볼 만한, 재미있는 이야기로 가득찬 그림책처럼 생각되었다.
서른 둘의 여름날,
인생의 짐이었던 책들을 정리하며 다시 집어든 <안나리사의 가족>을 읽다가
자연에서 얻어지는 것들에 감사하고 내 손이 만들어내는 가치에 감사하는 삶을 사는 그녀의 가족처럼
나의 삶도 그렇게 흘러가기를 기도했다.